#16화
“메리, 준비 다 되었지?”
“네.”
“빠뜨린 건 없고?”
“물론이죠.”
자신만만한 메리의 얼굴에 덩달아 나도 의기양양해졌다.
정말 오랜만에 파티 분위기가 나는 아멜리오 백작저는 내가 봐도 완벽했다.
됐어! 이제 에녹만 도착하면 돼! 늦어도 이틀 뒤면 도착하겠지?
어쩐지 설레는 기분에 몸을 살짝 들썩이자 옆에 있던 메리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좋으세요, 아가씨?”
“당연하지! 이게 얼마 만에 만나 뵙는 건데.”
“그럼 한 번쯤 수도로 올라가지 그러셨어요. 황태자 전하도 그러길 바라셨던 거 같은데.”
“하하…….”
장난스레 건넨 말에도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건 안돼, 메리. 에녹 만나러 가는 길에 죽을 수는 없잖아.
‘그나저나 다리가 좀 아프네.’
오랜만에 열심히 움직여서 그런지 몸이 좀 쑤셨다.
하긴, 며칠 동안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도와주겠다고 나섰었지.
생각해 보니 안 아픈 게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좀 쉬시는 게 어때요? 식사 시간 되면 제가 불러드릴게요.”
“그럴까?”
“네, 아가씨가 좋아하는 차랑 케이크 가져다드릴 테니 올라가 계세요.”
“두 조각 가져다줘. 길버트한테는 비밀인 거 알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자 메리가 자기만 믿으라는 듯 한쪽 눈을 찡긋했다.
나는 메리가 주방으로 향하는 것을 가만히 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오늘 많이 고생했으니 남은 하루는 느긋하게 쉬어야지. 그렇게 결심하며 방으로 가자마자 침대에 털썩 누웠다.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하루였다.
케이크를 가지러 간다던 메리가 빈손으로 다급히 돌아오기 전까지는.
“저, 아가씨, 잠깐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무슨 일인데?”
“손님이 오셔서…….”
뭐야. 에녹이 벌써 왔다고?
‘하마터면 제시간에 못 맞출 뻔했잖아?’
침대에 누워 있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메리를 따라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갔다.
1층으로 들어서자마자 꽤 여러 사람이 홀에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카일룸 제국의 상징인 드래곤이 수놓아져 있는 기사복을 입고 있었으니 그들이 황실 기사들임을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설마 했는데 진짜 에녹이었네.’
현실감이 없는 광경에 멍하니 서 있자 기사들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 모습에 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나를 보며 환히 웃어 줄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의 주인을 찾아서.
‘어디 있지?’
하지만 아무리 고개를 돌려도 은발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그 정도 외모가 눈에 안 띌 리가 없는데.’
이때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어야 했다.
아니, 에녹의 얼굴을 알고 있는 메리가 정확히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을 때부터, 손님이 왔다며 말꼬리를 흐렸을 때부터 그랬어야 했다.
“로레이나.”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숨길 수 없는 반가움이 깃든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자리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칼이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살짝 흩날렸다. 나는 검은색도 저렇게 반짝일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조금 더 시선을 내리자 머리카락에 어울리는, 루비같이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세상에 잘생김의 신이 있다면 아마 이 남자가 아닐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예쁜 적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남자가 미소 짓는 장면이 한 폭의 명화 같았다.
“오랜만이야, 로레이나.”
남자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내 팔을 잡아당기는 힘을 느끼고 나서야 내가 뒤로 넘어가려고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똑바로 세운 남자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
……아니요, 하나도 안 괜찮은데요.
하지만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내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으니까.
‘내가 주인공입니다!’를 외치고 있는 것 같은 외모와 기사들이 저 남자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나타나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적절한 타이밍까지.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았을 때 나올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이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 와중에도 내 팔은 여전히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이 모습으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니 내 소개를 다시 해야겠지.”
“…….”
“내 이름은 레오나드 젠 데르키안.”
자신을 남자 주인공이라 칭한 남자가 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너를 만나러 왔어, 로레이나.”
난데없는 상황에 숨이 턱하고 막히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은가.
왜 남자 주인공이 갑자기 내 앞에 있는 거냐고! 혹시 꿈인가 싶어 볼을 꼬집어 보았으나 꿈이 아니었다.
정말로 남자 주인공이 우리 집에 와있었고, 나를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게다가 이 모습으로 만나는 건 처음이라니?’
꼭 다른 모습으로는 만났던 적이 있었던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레오나드를 만난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말이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왜 저 잘난 얼굴이 묘하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거냐고.
잔뜩 당황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레오나드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로레이나.”
내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한 레오나드가 천천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생각보다 따뜻한 손길에 가만히 있자 머리 위쪽을 배회하던 손이 귀를 타고 내려와 내 오른쪽 뺨에 닿았다.
그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고개를 들었을 때 다시금 레오나드와 눈이 마주쳤다.
“나중에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잖아.”
“…….”
“벌써 잊어버렸어?”
그 순간, 여태껏 하던 생각들이 깨끗이 지워지고 4년 전의 일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나중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 언제나 따스했던 온기. 보석같이 찬란하게 빛나는, 붉디붉은 눈동자.
머리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입이 먼저 열렸다. 일종의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젠?”
내가 뱉은 익숙한 이름에 낯선 남자가 감격에 겨운 미소를 지었다.
그 광경이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나는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넌 모르겠지.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뭐라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짙은 감정에 질식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사이 레오나드가 천천히 내 뺨을 쓰다듬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애절한 낮은 음성과 함께.
“뭐든지 다 할 테니까 내 옆에 있어 줘.”
“…….”
“제발.”
* * *
젠이 레오나드다. 레오나드가 젠이다.
그러니까 눈앞의 이 사람이 정말로…….
‘……정말 젠이라고?’
믿기 어려운 현실에 몸과 머리가 따로 노는 사이 레오나드가 입을 열었다.
“할 이야기가 있는데, 응접실에서 해도 괜찮을까?”
“……아, 네. 네?”
횡설수설하는 내 모습에 그제야 표정을 풀고 미소 짓던 레오나드가 응접실을 향해 먼저 걸음을 옮겼다.
분명 여기는 내 집인데 행동이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 꼭 여기 살아 봤던 사람처럼.
……진짜 젠인가?
“저, 잠시만요!”
번뜩 떠오른 사실에 서둘러 레오나드의 앞을 막아섰다.
잘 모르겠다면 내가 직접 확인해 보면 그만이지.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헨티슨 남작가의 파티장. 정확히는 다이아나의 칵테일파티였지.”
기습적인 질문에 대한 답 치고는 꽤 빠른 답이 돌아왔다.
오호. 맞췄다, 이거지.
“그럼 우리 집 집사 이름은요?”
“길버트.”
“길버트가 가장 자신 있는 요리는?”
“애플파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돈.”
“……야, 내가 그거 지워 달라고 그랬잖아!”
책이라고 책! 도대체 몇 번을 말하는 거냐고.
나도 모르게 레오나드의 이마에 꿀밤을 먹이려 손을 들었다.
예전에 젠에게 하던 것이 몸에 배어 있었기에 무의식중에 나온 행동이었다.
조금 전 레오나드의 대답은 젠이 하던 것과 너무나 비슷했으니까.
하지만 내가 날린 꿀밤이 레오나드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마치 내가 이럴 것을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레오나드가 내 두 팔을 가볍게 막았기 때문이었다.
“아직 내 대답 안 끝났어.”
내 팔을 잡은 채로 소파를 향해 걸음을 옮긴 레오나드가 나를 그대로 앉혔다.
팔에 닿아 있던 온기가 천천히 내려와 내 손을 감쌌다.
“이것도 있잖아.”
“……무슨.”
“네가 좋아하는 거.”
레오나드가 내 손을 가져다 자신의 눈가에 가져다 댄 것은 그다음의 일이었다.
“예뻐서 마주하고 이야기할 때 좋다고 했잖아.”
“…….”
“아니야?”
레오나드가 내 손에 얼굴을 기대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나는 결국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젠이 맞다는 것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전에 했던 것처럼 반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맙소사. 진짜 젠이라고? 내가 동생 삼으려고 했던 꼬마가 남자 주인공이었단 말이야?
갑작스러운 상황에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얼굴에 살짝 열이 오르는 것을 보아하니 마냥 놀라서는 아닌 것 같았다.
정신 차리자. 아무리 잘생겼다고 해도 그렇지 이 상황에서 이러면 어쩌자는 거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나중에 다 설명할게. 일단 나랑 같이 가자.”
“……어디를요?”
여전히 멍한 얼굴로 묻는 말에 레오나드가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지극히 당연하다는 말투였다.
“황궁으로.”
……예? 갑자기 황궁이라니? 설마, 내가 잘못 들었겠지.
“일단 내가 너랑 먼저 가고. 기사들은 그 뒤에 올 거야. 본체화한 모습은 처음 볼 테니 조금 낯설겠지만 떨어질 일은 없을 테니…….”
“자, 잠깐만요!”
잘못 들은 게 아니었어? 게다가 본체화라니. 지금 나더러 드래곤 등 뒤에 올라탄 채로 황궁까지 가라는 건 아니겠지?
……나 비행기도 타 본 적 없는데?
“저, 지금은 갈 수 없어요. 일단 너무 갑작스러워서……. 아니,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뭐가 이렇게 급한 거야. 일단 나는 네가 어떻게 나와 대화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단 말이다.
‘나와 있었던 일은 어떻게 다 기억하고 있는 거야?’
4년 전에 우리 집에서 아무 문제 없이 생활했던 것도 이상하고 말이야. 마녀의 저주에 걸려서 고생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다른 사람 얼굴도 못 보고 같이 있었던 일도 기억 못 하는 것 아니었냐고.’
뒤죽박죽인 머릿속 때문에 혼란스러웠지만 이를 전부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내가 저주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게 되잖아.
딱 봐도 수상해 보일 텐데 그럴 수는 없지.
“……같이 갈 수 없다고? 왜?”
레오나드는 내가 거절할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 사람 좀 보게?
“왜라니요? 다짜고짜 와서 황궁으로 가자고 하면 누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겠어요?”
타박하는 말투에 여전히 내 손에 얼굴을 대고 있던 레오나드가 천천히 몸을 뒤로 뺐다.
동시에 손을 감싸던 온기가 빠져나갔다. 그 광경이 묘하게 아쉬운 것은 왜일까.
“……그래, 네가 왜 나랑 안 가겠다고 하는지 알겠어.”
안다니 다행이네. 이제야 조금 정상적으로 대화가 되려는 모양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것을 본 레오나드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얼핏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했다.
“이해해. 아무런 연락도 없다가 4년 만에 나타나서 당황스럽겠지.”
“…….”
“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 주먹은 왜 꽉 쥐는 건데. 왜 그렇게 살벌한 눈빛을 하는 거냐고.
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겠다고 말하는 레오나드를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말 같았다.
잠시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던 레오나드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덕분에 나는 레오나드와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로레이나.”
나를 바라보는 눈에 원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라도 내가 잊어버린 게 있으면 옆에서 말해 주겠다고 약속했잖아.”
“…….”
“내가 보지 못한 것까지 전부 다.”
내가 남자 주인공에게 그런 약속을 했다고? 말도 안 돼. 내가 언제…….
……그랬지. 그래, 맞아. 내가 그랬다. 눈앞에 있는 꼬마가 남자 주인공인 것도 모르고.
아,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력 좋은 건 안 좋은 것 같아.
이게 원작 내에서 공식적인 설정이라 기억 안 난다고 발뺌도 못 하잖아.
“……네, 기억해요.”
어쩔 수 없이 나는 내 잘못을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건 나도 조금 억울하다.
젠이 레오나드인 줄 알았더라면 절대로 그런 말은 함부로 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래?”
“네, 아주 선명하게 기억…….”
“그런데 왜 그랬어?”
……네? 무엇을요?
열심히 고민해 보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생각나는 건 없었다.
그럴수록 레오나드의 눈빛은 아까보다 더 사나워졌다.
“내가 설마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아니, 그러니까 도대체 뭘 말하는 거냐고. 나도 좀 알자, 제발.
뭘 잘못했는지는 도무지 모르겠지만 일단 입을 열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비는 게 낫지.
“죄송…….”
그렇게 말을 내뱉던 순간, 레오나드도 동시에 말을 이었다.
이어서 들린 말은 뱉던 사과가 다시 쏙 들어가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실실 웃기만 하는 놈이 그렇게 좋았어?”
……네?
뭔 놈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