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지? 그 사람은 또 누군데?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해서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이 침묵을 다르게 이해한 모양인지 레오나드가 헛웃음을 뱉었다.
“엄청 좋았나 보네. 대답도 못 할 정도면.”
“…….”
“그래. 그러니까 그럴 생각을 했던 거겠지.”
……누구, 나한테 설명 좀 해 주실 분?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데? 나도 좀 알자.
“네가 내 옆에 있어 주길 바란 건 맞아. 부정하지 않을게.”
“…….”
“하지만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냥 보내 주었을 거야.”
레오나드가 다시 손을 뻗어 내 손을 그러쥐었다. 뱉는 말과는 달리 손에 느껴지는 힘이 꽤 강했다.
“그렇게 도망치지 않아도…….”
“……저, 말 끊어서 죄송한데. 왜 자꾸 제가 도망간다고 하는 거예요?”
내 말에 레오나드가 아련하게 창밖을 보며 말했다.
누가 보면 실연이라도 당한 줄 알 법한 눈빛이었다.
“굳이 그렇게 숨길 거 없어.”
“그러니까. 제가 도대체 뭘 숨기는데요?”
“……진짜 잔인하네. 그걸 굳이 내 입으로 말하게 해야겠어?”
상처받은 얼굴로 내 손을 매만지던 레오나드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이 정도의 크기가 최선이라는 듯이.
“……에녹 데프론 말이야.”
“에녹이요?”
“그래, 네가 에녹 데프론과…….”
잔뜩 미간을 찌푸린 레오나드가 뭐라 말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응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오나드를 따라온 기사 중 하나인 것 같았다.
“폐하, 죄송합니다만. 잠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지?”
“저, 그것이…….”
안에 있는 나를 의식한 것인지 기사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에 조용히 한숨을 내쉰 레오나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 이야기 끝난 거 아니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
“아, 네…….”
“어디 도망가지 말고 있어.”
신신당부한 레오나드가 응접실을 나섰다. 여기가 내 집인데 자꾸 누가 도망을 간다는 건지.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레오나드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니 그제야 몸을 휘감던 긴장감이 사라졌다.
폭풍처럼 몰아친 일에 멍하니 있는 사이 메리가 응접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밖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잔뜩 사색이 된 채였다.
“아, 아가씨, 괜찮으세요? 어디 다친 데는 없으시고요?”
“응, 나 괜찮아.”
“다행이에요…….”
메리가 짙은 한숨을 토해냈다.
단순히 낯선 손님을 맞은 탓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안도하는 얼굴이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게…….”
잠시 망설이던 메리가 천천히 입을 뗐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밖에서 말을 들어보니까…… 반란이 일어났는데 성공한 모양이더라고요.”
“으응, 나도 방금 알았어.”
나는 메리의 말에 어느 정도 놀란 척 맞장구를 쳐주었다.
사실 레오나드의 반란이야 이미 예정되어 있던 일이니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4년 전 백작저에서 함께 지내던 꼬마가 남자 주인공이었다는 점에 놀랐다면 모를까.
뭐, 어쨌든 그건 지극히 내 기준이니, 아무것도 몰랐던 상태라면 놀라는 게 당연하지.
“그것 때문에 이렇게 헐레벌떡 온 거야?”
“아니요. 이것도 문제긴 한데요, 더 큰 문제가 있어서요.”
긴장했는지 메리가 마른침을 삼키며 주위를 살폈다. 그 행동에 나 역시 궁금증이 일었다.
이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메리가 젠이 레오나드라는 사실을 알 리는 없고, 도대체 무슨 일이지?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메리가 이내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지금 밖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얼핏 들어보니까 전하……, 아니, 에녹 님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에녹 이야기를 했다고?”
그러고 보니 아까 레오나드도 에녹 이야기를 했었지. 그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건가?
“네, 편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았어요. 에녹 님과 아가씨가 꽤 오래 편지 주고받은 걸 알고 계시는 모양이더라고요.”
“……그래?”
뭔가 이상하기는 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도 에녹 쪽을 주시하고 있었을 테니 나와 에녹이 편지를 주고받는 거야 당연히 레오나드 귀에 들어갔겠지.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고?’
내가 에녹과 친분이 있다는 건 레오나드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4년 전 그 시간에는 레오나드도 함께 했었으니까.
‘그럼 뭐지, 도대체?’
레오나드가 자리를 비우고 겨우 사라졌던 긴장감이 다시금 고개를 내밀었다. 무언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다른 말은? 또 뭔가 말한 거 없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빨리 제거해야 한다고 했어요.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고요.”
그리고 그 긴장감은 메리의 말이 이어질수록 크기를 더해갔다.
빨리 제거해? 너무 많은 걸 알아?
“그게 무슨 소리야?”
“저도 잘 모르겠어요. 분위기가 엄청 심각하더라고요. 아, 그리고 반지를 받자마자 급하게 여기까지 내려오셨다고 했어요.”
반지라고? 이 시점에 반지라면 대대로 카일룸 제국의 황제가 꼈다던 반지를 말하는 게 분명했다.
‘그 반지를 받자마자 내려왔다는 건…….’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제야 뭔가 큰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황궁에서 아멜리오 백작가 영지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이틀은 걸린다.
정말 레오나드가 반지를 받자마자 내려왔다면 반란은 이틀 전에 성공했다는 건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제국 전체가 너무 조용하잖아.’
무려 황위 교체다. 그것도 이미 몰락했다고 알려진 데르키안 황가의 핏줄이 나타나 황권을 거머쥔 대대적인 사건.
그런 큰 사건이 있었는데 이틀 동안 소문이 안 퍼진다고?
아무리 아멜리오 백작가가 수도에서 떨어져 있다고 한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는 건 반란이 일어난 지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건데.’
황궁부터 백작저까지 오는 시간이 있기에 이 또한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레오나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까도 본체화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았던가.
반란에 성공하자마자 급하게 여기까지 날아왔다면,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지지.
‘하지만 굳이 왜?’
황궁에 남아 상황을 정리하기에도 모자랄 시기에 여기에 왔다고?
단순히 예전 인연을 만나러 왔다고 보기에는 너무 부자연스럽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머리를 싸매는데, 아까 메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에녹 님과 꽤 오래 편지 주고받은 걸 알고 계시는 모양이더라고요.’
‘빨리 제거해야 한다고 했어요.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고요.’
‘분위기가 엄청 심각하더라고요.’
거기까지 되짚은 순간, 누군가가 뒤통수를 때리기라도 한 듯한 강렬한 충격이 몸을 강타했다.
서, 설마 혹시…….
‘내가 에녹과 같은 편이라고 생각해서 그냥 없애버리려는 건가?’
게다가 얼마 전에는 황태자비 제안도 받았었지 않은가. 물론 이건 레오나드가 아는지 모르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생각해 보니 아까 레오나드가 묘하게 나를 원망하는 기색이었어.’
……그래. 아마 알고 있었을 거야. 레오나드는 무려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남자 주인공의 정보망을 우습게 보면 안 되지.
그리고 레오나드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나를 제거하려는 이유도 이해가 갔다.
나는 레오나드가 성체가 되기 전의 모습을 알고 있잖아.
‘어쩌면 저주에 관해 뭔가 눈치를 챘다고 생각했을지 몰라.’
일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이 상당히 위급한 상황이라는 거였다.
그야말로 데드 엔딩을 목전에 둔 셈.
‘……어쩔 수 없어. 방법은 하나야.’
이대로 있다가는 죽을지도 몰라. 레오나드가 돌아오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 해.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며 메리의 손목을 잡았다.
혼자 가만히 있던 내가 갑작스레 손을 뻗자 메리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제법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메리, 이제부터 조용히 나 따라와.”
* * *
“폐하.”
기사는 제 눈앞의 남자를 보며 본래부터 그의 것이어야 했던 호칭을 입에 담았다.
레오나드 젠 데르키안. 생명의 신이 아직 이 땅에 애정이 있다는 유일한 증거. 카일룸 제국의 유일한 주인.
온갖 ‘유일한’이 붙은 수식어는 다 달고 태어난 남자는 타고난 드래곤의 성정과 달리 제법 아랫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었다.
저주의 영향도 아예 없다고 보지는 못하겠으나 그보다는 결함이 있는 자신의 옆에 있어 준 이들에 대한 일종의 배려였다.
다른 선택지가 많았음에도 온갖 불편함을 감수하고 자신을 선택한 이들에 대한 보답.
그것을 잘 알고 있던 기사는 그 배려와 보답에 기대어 긴장감을 누르고 입을 열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저는 후환을 방지하는 편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기사의 앞에 있던 레오나드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알 수 없는 불쾌감에 기인한 행동이었다.
“평범한 백작 영애가 제국의 후환이라니. 웃기는 소리군.”
“평범한 백작 영애에게 황태자비 자리를 맡기는 이는 없습니다, 폐하.”
그리고 누구도 신의 축복을 받은 이종족에게 ‘평범하다’라고 일컫지 않는다.
이종족이 두 명밖에 남지 않은 지금 이 시점이라면 더더욱.
“아멜리오 영애는 보통 인물이 아닙니다. 아이작 데프론에 대해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의 인정을 받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요.”
“…….”
“편지에는 곧 황궁으로 올라가겠다고 했으면서 여태 백작가에 남아 있었던 것도 수상합니다. 공작에게 무언가 전달받은 것이 분명…….”
“그만.”
잠자코 듣고 있던 레오나드가 나직이 말했다. 그에게 다시 한번 대꾸하려던 기사는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불길이 솟아 이리저리 일렁이는 적안을 본 탓이었다.
“지금 한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지. 진짜로 곧 잊어버릴지도 모르고.”
“하지만 폐하…….”
“봐주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 내가 그 정도로 생각이 없어 보이나?”
“……아닙니다.”
“예정대로 로레이나를 데리고 황궁으로 간다. 이 결정에 번복은 없어.”
마지막 말을 뱉은 레오나드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한 치의 미련도 없는 태도였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기사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녀가 폐하께 어떤 의미길래 그러십니까?”
성큼성큼 걷던 걸음이 순식간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반쯤은 혼잣말에 가까운 물음이었기에 당황한 기사가 변명거리를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레오나드는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지금과 다른 상황, 다른 눈높이지만 그에게는 매한가지로 어려웠던 과거의 어느 날을 떠올리는 것처럼.
‘의미라…….’
속으로 되뇐 레오나드가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그 스스로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이었다.
‘……로레이나는 저주를 풀지도 모를 유일한 열쇠야. 곁에 두어야 해.’
그래, 그뿐이야. 그러니 다른 사람과 달리 특별하게 여겨지는 거다.
그리고 그런 중요한 존재에게 이 정도의 정성과 시간을 들이는 건 당연한 일이고.
레오나드는 제 행동의 의미를 그렇게 정의하며 애써 마음을 잡았다. 물론 그것도 찰나였지만.
‘……멍청하기는.’
로레이나와 재회하던 순간, 자신이 얼마나 멍하니 서 있었는지는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다.
4년 내내 그녀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생각하던 것들이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쓸모가 없어졌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예정에도 없던 말을 뱉었다. 로레이나를 황궁으로 데려가야겠다고.
물론 언젠가 만나러 갈 생각이긴 했다. 하지만 이런 시기에, 이런 방식으로는 아니었다.
‘섣부른 판단이었지.’
사실, 아까 기사의 말을 끊기는 했지만 레오나드 역시 로레이나가 자신의 편이 아닐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정말로 로레이나가 에녹 데프론과 긴밀한 사이가 되었다면? 그래서 데프론 공작가의 첩자가 되길 자처한다면?
공작이 심은 끄나풀이 된다면?
분명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결론은 자꾸만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왜일까. 왜 로레이나에 대한 것만 이렇게 판단력이 흐려지는 걸까. 도대체 언제부터…….
작게 중얼거리며 복도를 가로지르던 레오나드의 시선이 창밖으로 옮겨갔다.
커다란 사과나무.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호수. 주인의 향기가 물씬 느껴지는 아담한 정원.
그 모든 추억을 훑던 레오나드의 입에서 실소 비슷한 것이 터졌다. 저도 모르게 올라가던 입꼬리를 느낀 탓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마음속에 이상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폭풍우가 치던 여느 날과 달리 간질간질하고 따스한 바람이.
그것을 눈치챈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아무래도 직접 얼굴을 봐야 알 듯싶었다.
하지만 당장에 레오나드가 제 마음을 알게 되는 일은 없었다.
조급한 걸음이 단순히 확인을 위함이 아닌 다른 감정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하.”
끼이익. 발걸음이 멈추고 문이 열리자 응접실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로레이나는 응접실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