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8화 (18/144)

#18화

로레이나가 사라졌다.

더 설명할 것도 없는, 군더더기 없이 간단한 말이었으나 레오나드에게는 결코 그렇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불안감이 앞섰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그것을 드러내는 대신 응접실 앞을 지나던 시종 하나를 붙잡았다.

단순히 볼 일이 있어 자리를 비웠을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 섣부르게 생각해서는 안 되었으니까.

“아멜리오 영애는 어디에 있지?”

“으, 응접실에 계시는 것으로 아는데…….”

다소 흉흉한 기운에 시종이 움찔 몸을 떨며 답하다 말을 흐렸다.

문 사이로 보인 광경에 응접실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탓이었다.

“……모, 모르겠습니다. 어디 가신다는 말씀은 따로 없으셨어요.”

“…….”

“제가 얼른 화, 확인을…….”

“서두르도록.”

대답이 떨어짐과 동시에 시종이 레오나드의 시야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나서서 찾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레오나드는 반란을 일으켜 이제 막 황위에 올랐다.

그런 자가 귀족가의 저택을 뒤지고 다니는 게 타인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레오나드는 얌전히 시종을 기다렸다. 이상하리만치 커진 불안감을 억누르면서.

시종이 돌아온 것은 레오나드가 수백 번의 생각을 하고, 그 결론으로 멍청한 짓거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였다.

“아, 아무래도 외출을 하신 것 같습니다. 자주 있으시던 곳을 다 찾아봤는데도 보이시지 않아요.”

지금 상황에 외출이라고? 손님이 방문했는데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우다니. 로레이나의 성격상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아까 분명 이야기가 안 끝났으니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았던가.

“그럼 어디 가는지 말은 하고 갔겠지. 아는 사람은 있나?”

“어, 없습니다.”

“……원래도 아멜리오 영애가 비밀리에 외출을 자주 했었나 보군.”

“아, 아닙니다. 그런 적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비밀리에 외출은커녕 로레이나는 외출 자체를 별로 하지 않았다.

나가야 할 일이 있으면 사용인들을 대신 보냈고 그럴 여건이 아니라면 꼭 호위 기사와 함께, 어디에 가는지 알리고 나갔다.

그건 4년 전 아멜리오 백작저에 있었던 레오나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왜 외출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다 찾아본 것도 아니지 않나.”

“그것이…….”

레오나드를 힐끗 보며 잠시 망설이던 시종이 잘게 떨리는 손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 직속 시녀와 함께 큰 가방을 들고 어디론가 가는 모습을 본 자가 있다고 해서…….”

“켈리온.”

“예, 폐하.”

레오나드가 불쑥 부른 이름에 기사 하나가 그의 뒤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 로레이나에 관한 말을 했던 기사였다.

시종의 말을 들은 직후부터 레오나드는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뱉은 마지막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직 이야기 끝난 거 아니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

‘어디 도망가지 말고 있어.’

마지막 말에 로레이나가 대답을 했던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던 레오나드가 실소했다.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로레이나를 붙잡아 둔다는 말인가. 그녀가 원한다면 아무것도 못 하고 보내 줄 생각인 주제에.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레오나드는 로레이나를 만나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자신이 왜 여기를 찾아왔는지, 왜 로레이나가 필요한지에 대해.

적어도 그 말은 해야만 했다.

“찾아내. 혹시 도망가는 중이라면 위치를 파악하는 즉시 나에게 알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위험한 상황이라면…….”

거기까지 말하던 레오나드가 입을 다물었다. 적안에 알 수 없는 빛이 스쳐 갔다.

“아니, 내가 직접 간다. 그편이 빠르겠어.”

“폐하?”

기사가 붙잡을 새도 없이 말을 마친 레오나드가 곧장 몸을 돌렸다. 숨길 수 없는 조급함이 묻어난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배가 되어 불어났다.

레오나드는 아직 제 마음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이런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로레이나를 다시 만나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자신이 평소와 다르게 행동했다는 건 그 스스로가 가장 잘 인지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초조했다. 그리고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로레이나에 대해 제법 잘 안다고 자부했으면서도 그녀가 외출하면 어디를 가장 먼저 찾을지 하나 알지 못했다.

그까짓 첩자 이야기, 나중에 할 수도 있는 거였는데 굳이 자리를 비웠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만약 정말로 로레이나가 도망을 친 거라면…….

“……이제 다시는 못 보는 건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허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천장에서 덜컹- 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눈앞에 사다리 하나가 내려왔다.

그것에 놀라 고개를 들 새도 없이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레오나드의 머리를 툭 치고 땅에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레오나드가 멍하니 땅바닥을 내려다봤다.

“……편지?”

그래, 저 네모난 모양의 녹색 봉투는 분명 편지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편지가 하늘에서 떨어지지?

저 편지가 무엇일지 일순 궁금증이 일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먼저가 아니었다. 그런 것 따위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끼이익.

위쪽에서 다소 낯선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레오나드가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였던 것은 코가 동그란 하늘색 구두였다. 그다음은 실크 레이스가 촘촘하게 달린 치맛자락.

무언가 가득 담긴 가방을 든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마지막으로 익숙하면서도 낯선, 아담한 느낌의 어깨.

거기서 조금 더 시선을 올렸을 때, 레오나드는 동그란 눈과 마주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가 애타게 찾아 헤맸을지 모를 푸르른 색채.

“아.”

작은 탄성을 뱉은 로레이나가 밑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뒤로 넘겨 정리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란 듯 이리저리 움직이던 눈이 곧 부드럽게 휘며 살포시 접혔다.

“……저기, 그 편지 좀 주워주시겠어요?”

하하하.

이어지는 어색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레오나드는 몸을 숙였다. 손끝에 바닥에 있는 편지의 모서리 부분이 닿았다.

잘게 떨리는 손가락을 한번 쥐었다 핀 레오나드가 이내 편지를 집어 들었다.

언제부턴가 바닥을 나뒹굴던, 저도 모르는 사이에 떨어뜨린 제 마음도 함께.

* * *

‘……도대체 무슨 일이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나는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고 눈만 요리조리 굴렸다.

잠깐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이게 대관절 무슨 분위기람.

다락방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마주친 레오나드는 그때부터 응접실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쭉 묘하게 날이 서 있는 얼굴이었다.

중간중간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기도 해서 나는 그때마다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막 반란 일으키고 온 사람이 저러는 건 좀 반칙 아니야? 저 안 그래도 목숨 간당간당한 엑스트라거든요.

그리고 아무리 레오나드가 젠이었다는 걸 알았다고 한들, 이 모습으로는 초면이니 낯선 건 마찬가지고 말이야.

‘일단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그래, 사정이 있었더라도 손님을 두고 언질 없이 자리를 비운 건 잘못한 거지.

나는 슬쩍 레오나드의 눈치를 보다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레오나드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베일 듯 날카롭고 숨이 자꾸 막히는 것이, 이대로 더 있다가는 진짜 큰일 날 것 같았다.

‘빨리 사과하자.’

조용히 심호흡한 뒤 레오나드에게 사과하려 입을 열었다.

“저기, 레오나드.”

생각보다 작은 부름이었는데도 레오나드는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마치 이것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그것이 조금 부끄러워서 나는 다시 한번 목을 가다듬은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많이 화났어요? 미안해요. 제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연신 눈치를 보며 말을 잇는데, 레오나드가 물었다.

“화가 나?”

“……음, 아니에요?”

고개를 갸우뚱하며 반문하자 레오나드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왜 또 한숨인데. 그리고 내 말의 요점은 ‘당신이 화가 났다’가 아니라 ‘내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라고.

후자에 집중해 주세요, 후자.

그렇다고 이 말을 진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싱긋 웃었다.

레오나드는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화가 난 게 아니야.”

“그럼요?”

“지금 그걸 몰라서 묻는…….”

내 말에 뭐라 대꾸하려던 레오나드가 말을 멈추었다. 무언가 깨달았다는 얼굴과 함께 옅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내가 할 소리는 아니네.”

“…….”

“그래서, 갑자기 다락방에는 왜 간 거야?”

“아, 그게요.”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방 하나를 가지고 왔다.

아까 다락방에서 가져온 가방이었다. 내가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고.

“이것 때문에요.”

짧은 말과 함께 가방을 뒤집어 내용물을 쏟아 내었다.

가방 안에 든 것은 아까 레오나드 앞에서 떨어뜨린 것과 같은 편지였다.

갈 곳을 잃은 종이들이 살짝 일어난 바람에 둥실- 허공에 몸을 띄웠다가 그대로 바닥에 안착했다.

순식간에 바닥을 메운 편지들을 훑던 레오나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편지에 한결같이 쓰여 있는 이름을 본 탓이었다.

“……에녹 오델리아 데프론.”

“저기, 일단 제 말 좀 먼저 들어줄래요?”

나는 다시금 뒤바뀐 공기의 흐름을 느끼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말 좀 끝까지 들어주세요. 아직 제 말 안 끝났다고요.

‘이런 얼굴을 할 줄은 몰랐는데.’

물론,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운 것이니 화날 만 하긴 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데드 엔딩에 일조할지 모를 ‘전 황태자’ 에녹과 주고받은 편지는 여러모로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좋았으니까.

그렇기에 내가 잘 출입하지 않는 다락방에 두었다. 비밀 유지를 위해 이 장소는 나와 메리만 알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저 많은 양의 편지를 메리 혼자 들고 오라고 할 수는 없으니 당연히 내가 같이 가야지.’

괜히 소란스럽게 하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다녀오려고 한 거였는데.

설마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편지를 담기 위해 들고 간 큰 가방이 문제였던 모양이다.

“음, 일단 편지들 좀 읽어 주세요. 대충 몇 개만 읽으면 될 거예요.”

“로레이나.”

레오나드가 편지를 보던 시선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상처받은 것 같은 눈빛에 순간 몸이 움찔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해. 이렇게 돌려서 말하지 말고.”

“…….”

“지금 눈앞에 있는 이것들. 다 찢어버리고 싶은 걸 참는 중이니까.”

그 말이 허언은 아닌지, 의자 팔걸이를 잡은 그의 손등이 하얗게 질려 있는 것이 보였다. 저러다 의자 부서지겠는데.

‘어쩔 수 없지. 그냥 말하는 수밖에.’

레오나드는 지금 에녹과 내 사이를 오해하고 있다. 아마도 내가 이미 그쪽 사람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겠지.

‘그냥 편지를 보는 게 제일 빨리 오해를 푸는 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편지를 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오해를 부른 모양이었다.

‘이대로 가면 원작대로 죽을지도 몰라.’

이렇게 끝날 수는 없었다.

이러려고 그렇게 싫어하는 다락방까지 올라간 것이 아니었다.

“저, 레오나드, 혹시 제가 에녹과 결혼할 거라 생각해서 그러는 거예요?”

생각보다 직설적인 말에 놀랐는지 레오나드가 몸을 움찔했다. 그리고 잠시 뒤 예상했던 답변이 돌아왔다.

“그럼 아니라고?”

“당연히 아니죠! 4년 동안 얼굴도 본 적 없다고요.”

“하지만 분명 황궁에 온 편지에는…….”

역시 내가 황제, 아니, 아이작에게 보낸 편지를 봤구나.

운도 참 없지. 어떻게 타이밍이 이러냐.

“제가 황궁으로 가는 걸 거절하면 여기로 내려오시겠다는데 그럼 어떡해요? 일단 그렇게 말씀드려놓고 에녹이 돌아오면 같이 이야기해볼 생각이었어요.”

“…….”

“편지 보면 알겠지만 별 내용 없어요. 그냥 일상 주고받은 게 다라고요.”

나는 편지를 마음껏 보라는 식으로 팔을 활짝 펼쳐 보였다.

물론 에녹과 주고받은 편지를 이렇게 보여 주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건 알았다.

에녹, 미안해. 이렇게라도 살아야지 어떻게 하겠어.

하지만 확인을 위해 곧바로 편지를 볼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레오나드는 이제 편지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었다.

그래도 열심히 해명한 보람은 있었다. 아까부터 쭉 날이 서 있던 기운이 묘하게 풀어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정말 다락방에는 왜 간 거야?”

“아까 말했잖아요. 편지 가지러 갔다니까요.”

왜 물었던 말을 또 묻는 거지.

“혹시 아직도 안 믿겨서 그래요? 그럼 다른 거라도 보여 줄…….”

“아니, 그게 아니라.”

레오나드가 다급히 말을 잇는 나를 만류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물었다.

“다락방에 가는 거 진저리칠 정도로 싫어하지 않았나.”

“네, 엄청 싫어해요.”

“그런데 왜 그랬지?”

그렇게 묻는 레오나드는 사뭇 긴장한 눈치였다.

묘한 조급함까지 묻어나는 얼굴에 나는 담담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것보다 당신이 오해하는 게 더 싫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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