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오해를 풀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요.”
그 말을 하는 로레이나는 지극히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레오나드는 조금, 아니 많이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레오나드는 로레이나가 얼마나 다락방을 싫어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랬던 사람이 다락방에서 내려오는 것을 봤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그러니 필시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레오나드도 곧장 납득할 수 있는 그런 이유가.
하지만 지금 들은 건 상당히 뜻밖이었다. 설마 이런 말이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음, 못 믿겠다는 얼굴이네요.”
로레이나가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늘어뜨렸다.
내가 그런 얼굴이었던가. 레오나드는 손을 들어 잠시 제 얼굴을 매만졌다.
잠시 그대로 있던 레오나드는 곧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제 일상에 스며든 이 아가씨는 언제나 제게 비현실적이었으므로.
“으음.”
턱에 손을 올린 채 무언가를 고민하던 로레이나는 결론을 내렸는지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 모습에 레오나드는 저도 모르게 설핏 웃음을 흘렸다.
“뭐, 그런 얼굴이어도 어쩔 수 없어요! 믿기 어렵겠지만, 저한테는 레오나드와 관련된 일이 꽤 중요하거든요.”
이 여자는 지금.
“4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는 있는 걸까.
아니, 모를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자신이 바라는 말만 해 줄 수 있는 거겠지.
“황궁에 가는 건 조금만 더 생각해 볼게요.”
“…….”
“오늘 하루만 주세요. 그 정도는 괜찮죠? 어차피 바로 황궁으로 올라가는 건 너무 힘들잖아요.”
저를 바라보는 푸른빛 눈동자가 호의와 생기로 반짝였다.
그 색채를 차분히 응시하던 레오나드가 이내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지금도 제 눈에 일렁이고 있을 소유욕과 추악한 집념들을 들키게 될까 봐.
그것을 안 로레이나가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워서.
* * *
“하아…….”
하루를 잘 마무리한 나는 후련한 마음으로 발코니로 나섰다.
깨끗이 씻고 머리까지 잘 말리고 나오니 정말로 홀가분해진 기분이었다.
아직 초봄이었지만 꽤 두꺼운 잠옷에 숄까지 걸쳐서 이 또한 괜찮았다.
‘생각보다 잘 해결되어서 다행이야.’
혹시라도 레오나드가 바로 나를 죽일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말에 레오나드는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하루 머물렀다가 가라는 말에도 별다른 말 없이 지정된 방으로 들어갔고.
무작정 아멜리오 백작저까지 날아와 황궁으로 가자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좀 의외였다.
‘당장이라도 같이 가자고 할 줄 알았는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레오나드의 저주가 나한테는 통하지 않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레오나드 입장에서 그런 상대를 그냥 내버려 둘 리 없겠지. 그 와중에 이렇게 나오는 게 좀 의문이긴 한데…….
뭐, 솔직히 이유가 뭐든 간에 나에게는 큰 상관없는 일이었다.
‘데리고 가준다면야 나야 고맙지!’
사실, 아까부터 환호성이 나오려는 걸 꾹 참는 중이었다.
괜히 그랬다가 위층에 있는 손님방에 있을 레오나드에게 들려서 일을 그르치면 큰일이니까.
세상에. 내가 맡았던 꼬마가 남자 주인공이었다니! 어떻게 이런 황금 같은 우연이!
당연히 따라가야지.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이걸 놓쳐?
처음에는 당황스러워서 대답을 못 했지만, 나중에는 당장이라도 따라가겠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냉큼 같이 가겠다고 하는 게 이상해 보일 것 같아서 꾹 참았단 말이다.
내가 4년 전에 얼마나 실망하고 절망했었는지를 생각하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너무 대견해서 스스로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로.
‘이걸로 내 살길 찾고 여주랑 남주 연애하는 거 옆에서 구경도 하고!’
돈은 지금도 충분하니까. 아, 아니지. 레오나드 옆에 있으면 나도 주인공 기운을 좀 받아서 떼부자가 되지 않을까.
생각지도 못했던 첫 번째 꿈과 두 번째 꿈이 목전에 와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혹시 죽었나 걱정하던 젠이 살아있다는 것도 알았지. 생각하면 할수록 좋은 일투성이잖아.
나는 절로 나오는 콧노래에 맞춰 발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크게 소리를 치는 것도 아니니 이 정도는 괜찮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이는 내 오산이었다.
“뭐 하는 거야?”
“아, 깜짝이야.”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밤하늘과 잘 어울리는 흑발이 시야에 잡혔다.
내 방에서 대각선에 자리한 방의 발코니에서 레오나드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던 거지?
“어, 언제 나왔어요?”
“별로 안 되었어.”
“……어디서부터 봤는데요?”
“네가 노래 부르면서 한 바퀴 돌았을 때부터?”
……다 봤잖아? 이런 젠장.
혹시 미친 애 같아 보여서 제안을 무르는 건 아니겠지?
나는 밀려오는 어색함과 부끄러움에 눈을 도르르 굴리다가 최대한 무해하게 웃었다.
도망가지 마세요. 해치지 않아요.
다행히도 레오나드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싱글벙글 웃는 낯을 가만히 보던 레오나드가 불쑥 물었다.
“잠깐 그쪽으로 가도 돼?”
응? 갑자기?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레오나드를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보아도 이미 들은 말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뭐지. 앞으로 함께 지내야 하니 뭔가 의논하려는 건가?
아니면 내가 제안을 거절할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설득하려고?
생각이 많아졌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낮에 레오나드에게도 말했다시피 그는 나에게 꽤 중요한 존재였으니까.
그것이 살기 위한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든, 반년을 함께 한 추억 때문이든지 간에.
“네, 괜찮아요. 그럼 밖에 있는 시녀들한테 이야기 좀 하고 올게요.”
갑자기 레오나드가 내 방앞 복도에 등장하면 다들 놀랄 테니까. 미리 말은 해 주어야지.
바로 방으로 들어가려 몸을 트는데 레오나드가 살짝 고개를 기울이더니 난간에 두 손을 올렸다.
“그럴 것까지 있나.”
“네?”
살짝 장난기가 어린 말에 뭐라 대꾸하려던 순간이었다.
난간 위에 얹은 손에 힘을 실은 레오나드가 그대로 몸을 날렸다.
……아니, 잠깐만요. 여기 3층인데!
심지어 층간 높이도 엄청나다고. 저러다 떨어지면 어떡해.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레오나드는 매우 안정감 있게 내 앞에 착지했다.
공중에서 바닥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너무 가벼워서 몸이 둥실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아주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맞다. 이 사람 남자 주인공이었지.
온갖 버프를 다 받은 사람을 보통 사람들과 비교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괜히 호들갑을 떤 것 같아서 헛기침하자 그것을 무슨 의미로 생각한 건지 레오나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굳이 일 크게 만들 필요는 없지. 이 시간에 방에 남자를 들이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그 당사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나는 조용히 항변했다.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사실 듣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어.”
“듣고 싶은 말이요?”
하고 싶은 말도 아니고 듣고 싶은 말?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으나 레오나드는 꽤 오랫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입까지 꾹 다물고 있는 것이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는 듯했다.
본인이 먼저 말을 꺼내놓고 이건 뭐 하는 건가 싶었지만 굳이 그런 말로 이 고요를 깨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꽤 오랜만에 옛 인연을 만났다는 반가움과 적당히 차가운 바람 때문도 있었지만.
낮에 처음 말했을 때와는 달리 어딘가 가라앉아 있는 것 같은 적안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다. 한동안 가슴 속에 묻어둔 옛날이야기를 끄집어내었던 것은.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나네요.”
“옛날?”
“네, 예전에도 밤에 제 방으로 찾아온 적 있었잖아요.”
물론 그때는 정식으로 노크도 하고 문으로 들어왔지만.
손으로 문을 두드리는 시늉을 하며 덧붙이자 레오나드가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뱉었다.
역시. 이것도 기억하는구나.
“맞아요. 제가 입술 다쳤을 때 말이에요.”
그때는 정말 생각이 많았지. 젠이 레오나드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좀 나았을 텐데.
“이제 와 말하는 거지만, 그때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거 허세 부린 거였어요. 조금, 아니 많이 겁났거든요.”
“입술이 원래대로 안 돌아올까 봐?”
“아니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영향이 아예 없었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그게 아니었으니까.
“모두가 다 제 곁을 떠나고 혼자 남겨질까 봐요.”
그래서 이전 세계에서처럼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갈까 봐.
빙의되고 6년간 맛본 달콤함은 꽤 황홀해서 이전 삶의 기억은 쳐다도 보고 싶지 않게 만들었다.
그것이 비록 ‘로레이나 아멜리오’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나서야 얻은 것이라고 해도.
그래서 이 아름다움이 색이 바래면, 꿈처럼 이어지던 행복도 끝나지 않을까, 잠깐 그런 생각을 했었다.
물론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지만.
“그때 제 방에 찾아와줘서 고마워요.”
내가 그 밤을 혼자 보내지 않게 해 줘서 고마워.
“괜찮다고, 예쁘다고 해 줘서 고마워요.”
결국 입술이 낫긴 했지만,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밤잠을 못 이루는 일은 없었을 거야.
전부 네 덕분이야.
“다시 만나게 되면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
“정말 고마워요.”
순간, 어쩐지 코끝이 찡해진 나를 달래려는 것처럼 미풍이 불었다.
바람에 흔들리며 나는 풀 소리가 더해지자 어쩐지 지금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사삭- 사삭-.
귓가를 스치는듯한 소리가 점점 잦아들 때쯤 레오나드가 나직이 입을 뗐다.
묘하게 일그러진 것 같은 얼굴이었다.
“……너는.”
“…….”
“내가 갑자기 찾아와서 같이 가자고 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 무슨 일인지 말도 안 해 주는데?”
“아…….”
음, 그건 생각도 못 했는데.
나야 레오나드의 저주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으니까 예외 대상인 내가 필요하겠거니 생각했지만.
‘확실히 레오나드가 보기에는 이상해 보이겠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한담.
원작을 읽고 와서 별다른 설명 없이도 당신 상황을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잖아.
‘내가 원작을 읽지 않은 상황이었다면, 뭐라고 답했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사실 답이 이미 나와 있는 문제였다.
원작에 대해 알지 못했더라도 나는 레오나드를 따라갔을 테니까.
왜냐하면.
“뭔가 중요한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요. 그러니 그 정도 배려는 당연히 할 수 있어요.”
생긋 웃은 나는 생각해왔던 바를 그대로 뱉었다.
레오나드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레오나드는 저한테 꽤 특별하고 중요한 사람이거든요.”
이 말이 그에게 어떤 비수가 될지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