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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20화 (20/144)

#20화

내 말을 듣고도 레오나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잔잔하게 울리던 풀 소리가 점점 거세지고 살짝 불던 바람이 차가움을 더해간 다음에도.

그렇게 한참이나 나를 보며 입술을 달싹이던 레오나드가 곧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배려라고.”

한 발자국.

“참 너다운 대답이야, 로레이나.”

두 발자국.

“넌 언제나 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해 주니까.”

마지막 세 발자국.

내게로 성큼 다가온 레오나드가 살짝 허리를 숙였다. 안 그래도 가깝던 거리가 숨소리가 느껴질 만큼 가까워졌다.

어쩐지 긴장되는 상황에 가만히 숄의 끝자락만 만지작거리는 사이 레오나드가 내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이제는 꽤 강해진 바람에 헝클어졌던 머리가 큼지막한 손에 금세 정리되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유영하듯 움직였다.

“그 사실이 미칠 듯이 좋으면서도.”

“…….”

“참 달갑지가 않아.”

말을 뱉는 목소리의 끝이 메마른 가지처럼 잔뜩 갈라져 있었다.

그것이 몹시 어색해 겨우 고개를 들었을 때 레오나드가 손을 뒤로 물렸다.

“내가 이래도 되는 걸까 고민하고 망설이게 되거든.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는 상황인데도.”

“그래서 자꾸 손해 보는 선택을 하게 돼.”

그리고 이번에도, 아마도 그럴 것 같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나직이 내려앉았다.

레오나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똑똑히 다 들었는데도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멍하니 있는 사이 다시금 손을 뻗어 내가 덮고 있는 숄을 정리해 준 레오나드가 속삭였다.

“추우니까 이제 들어가.”

뭐라 답할 새도 없이 레오나드가 몸을 돌렸다. 그에 정신을 차린 나는 불쑥 떠오른 말에 입을 열었다.

“아까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서요. 그게 뭐예요?”

내 부름에 잠시 우뚝 멈춰 선 레오나드가 그대로 고개만 살짝 돌려서 대답했다.

이미 듣고 싶었던 말을 들었다고.

* * *

‘뭐지.’

나는 어느새 떠오른 태양을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원래라면 잠들어 있어야 할 시간에 눈을 뜨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어제 일 때문에 꼴딱 밤을 새워버린 탓이었다.

‘밤새 고민했는데 결국 무슨 뜻으로 한 말이었는지 못 알아냈어.’

술을 마신 것도 아닐 텐데 왜 그런 취중진담 같은 말을 하고 간 거야.

사람 마음 심란하게 진짜.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자.’

그럼 복잡한 머릿속도 조금 정리가 되겠지.

나는 대충 옷을 갈아입은 후 머리를 질끈 묶고 밖으로 나섰다.

아침을 맞이한 아멜리오 백작저는 평소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창밖의 정원에 핀 꽃들도 예뻤고 주방 쪽에서는 길버트 특유의 애플파이 냄새가 났다.

메리는 홀을 정리하고 있었고 그 앞쪽 복도에는 제럴드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정말 여느 날과 같은 하루…….

……아니, 잠깐만.

“……헨티슨 영식?”

“네, 저 맞습니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는지 복도에 서 있던 제럴드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4년 만에 만나는 제럴드는 소년티를 벗어던지고 꽤 늠름해져 있었다.

물론 그래 봤자 레오나드의 변화에는 발끝도 못 미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는 남작……, 아니, 공작이지만요.”

“아아, 작위를……. 네? 공작이요?”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 지금까지의 공을 치하해 주셨거든요.”

“와아, 너무 축하드려요.”

나는 진심으로 제럴드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남작에서 공작이라니. 완전 파격 승진이 아닌가.

가문 대대로 오랫동안 레오나드를 보살핀 것이 드디어 빛을 보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제럴드가 부끄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그 모습을 꽤 뿌듯한 얼굴로 보다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생각해 보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여긴 어떻게, 아니, 언제 오신 거예요?”

어제 왔던 사람 중에 분명 제럴드는 없었는데?

“오늘 아침에 왔습니다. 폐하께서 데리러 오셨더라고요.”

“폐하께서요?”

“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오셔서 어찌나 놀랐는지. 등 뒤에 타고 오느라 죽을 뻔했습니다.”

레오나드가 간밤에 수도까지 다녀왔다고? 어차피 나랑 수도로 올라갈 텐데. 왜 제럴드를 데리고 온 거지?

의아함에 고개를 갸우뚱했을 때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걸음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예상대로 레오나드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복도에 나란히 선 제럴드와 나를 보던 레오나드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잠깐 모여봐. 할 말이 있어.”

* * *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 예감에 나는 메리에게 차를 내올 것을 부탁했다.

아직 쌀쌀한 날씨를 고려해 따뜻하게 내온 차 위에는 말린 석류가 동동 띄워져 있었다.

제럴드와 나를 불러 놓고도 여전히 말이 없는 레오나드의 적안만큼이나 붉은색이었다.

어쩐지 이 고요가 어색하게 느껴져서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 맞다. 공작님, 헨티슨 영애는 잘 지내나요?”

“똑같습니다. 이번에는 수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죠.”

오호. 아무래도 다이아나의 칵테일 제조 실력이 그새 성장한 모양이었다.

나중에 슬쩍 얻어먹을 수 있냐고 물어봐야지.

언제가 좋을지 고민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음, 뭔가 더 말하려고 했는데 할 이야기가 없네. 애초에 제럴드와 나 사이에 뭐가 있었어야지.

어쩔 수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

“저, 그러고 보니 공작님은 왜 저를 찾아오신 건가요? 에녹에 대한 오해는 이미 풀렸는데 공작님까지 여기 오신 게 이상해서요.”

“그게, 사실…….”

잠시 레오나드를 힐끗 보던 제럴드가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이미 말씀을 하셨는지도 모르겠지만, 영애를 황궁으로 스카우트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스카우트요?”

역시 그렇구나. 상황 설명하려고 온 거였어.

“예, 지금 폐하께 영애가 꼭 필요하거든요.”

“……혹시 이유가 뭔지 알 수 있을까요?”

사실 답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물었던 것은 순전히 내 궁금증 때문이었다.

과연 이들이 나에게 사실대로 말해 줄까, 하는.

그리고 예상대로 제럴드는 난처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영애.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아, 괜찮아요.”

정말 말 그대로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니까.

모르는 척하는 게 불편하겠지만 그거야 내가 조심하면 된다.

“모르더라도 일에 지장은 없죠?”

“네, 그렇습니다.”

“그럼 되었어요.”

“허락하시는 겁니까?”

긴장한 목소리에 나는 차를 한 모금 머금고는 살짝 미소 지었다.

“물론이에요. 저라도 괜찮으시다면야.”

생각보다 쉽게 떨어진 허락에 제럴드가 함박웃음을 지을 때였다.

아까부터 조용히 있던 레오나드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정말 허락하는 거야?”

“그렇다니까요.”

“……왜 네가 필요한지 말해 줄 수 없는데도?”

어젯밤에 했던 질문의 연장선에 있는 말이었다. 아니, 사실은 똑같은 말이나 다름없었다.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는 건 그만큼 그가 불안해한다는 증거였기에 나는 확신이 어린 어조로 답했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왜?”

“당연하잖아요.”

일부러 조금 더 활짝 웃으면서.

“당신이 나한테 안 좋은 일을 시킬 리 없으니까.”

그 순간, 안 그래도 불안정해 보이던 레오나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내 말에 안도하리라는 예상과 너무나 다른 태도에 나는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왜 저러지.’

안색이 너무 안 좋잖아. 레오나드가 걱정되었던 나는 그를 살피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내 걸음이 레오나드에게 곧바로 닿는 일은 없었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잔뜩 굳은 얼굴이던 레오나드가 나와 제럴드가 말릴 새도 없이 다시금 입을 열었고.

“네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알려줄게, 로레이나.”

아주 큰 폭탄을 던졌으니까.

“내가 저주에 걸렸기 때문이야.”

“폐하!”

제럴드의 입에서 비명 섞인 외침이 터졌다. 나도 놀랐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미친 거 아니야?’

소수의 측근만 아는 치명적인 약점을 말해 준다고? 한낱 엑스트라에 불과한 나한테?

경악에 찬 눈으로 레오나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시선을 받으면서도 레오나드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300년 전에 마녀가 나한테 저주를 걸었어. 내 아버지가 자기가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했던 게 원망스러워서.”

“아니, 저, 레오나드…….”

“덕분에 나는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볼 수도, 그 사람과 있었던 일을 기억할 수도 없지.”

“잠깐…….”

“내가 다른 이와 교류할 길을 아예 없애버리고 싶었던 거야.”

모든 걸 다 털어놓을 기세인 레오나드의 모습에 제럴드가 한숨을 내쉬더니 밖으로 나갔다.

레오나드는 그것조차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계속 입을 열었다. 붉은 눈동자 안에 오로지 나만이 담겨 있었다.

“생명의 기운이 강한 아버지조차 저주를 피하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니까.”

불쑥 들린 칼리드에 대한 이야기에 나는 그를 말리려던 것도 잊고 고개를 들었다.

원작에서는 이사벨의 저주 이후에 칼리드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죽었다고만 나와 있었으니까.

솔직히 말해 궁금하긴 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하다고 알려진 드래곤이, 신의 축복을 받은 이종족이 어떻게 병에 걸려 죽게 된 걸까.

“……결국 네 곁에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으리라.”

레오나드가 익숙한 문장을 뱉었다. 그를 300년이나 고통 속에서 허덕이게 한, 바로 그 저주였다.

“이게 나한테 걸린 저주야. 아버지는 이 저주 때문에 돌아가셨어.”

“…….”

“저주에서 언급한 것이 ‘사람’이라 이종족인 아버지는 해당되지 않았거든.”

가만히 레오나드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이어지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죽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저주의 조건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건데. 의아함에 살짝 인상을 찌푸린 순간, 레오나드와 시선이 맞닿았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레오나드가 나와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네 생각대로 이종족이 저주의 영향을 피해갔다면 좋았겠지. 하지만 그러지는 못했어.”

“무슨…….”

“어쩌다 보니 말은 그렇게 나왔지만 그 마녀가 의도한 건 그게 아니었을 테니까.”

조용히 말을 잇던 레오나드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무언가 엄청난 이야기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그의 입가가 살짝 떨렸다.

그리고 예상대로 레오나드는 아주 놀라운 비밀을 고백했다.

“나와 가까운 곳에 있던, 그러니까 수도 근처에 있던 이종족들은 다 목숨을 잃었어.”

“…….”

“사소한 말실수로 허점이 생겼으니, 저주의 힘이 어떻게든 이를 보안하려 한 거야. 예외 대상이 다 죽어버리면 저주는 완전해질 테니까.”

이종족이 완전히 멸종해 버린 이유가, 바로 자신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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