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21화 (21/144)

#21화

지금 뭐라고…….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레오나드가 뱉은 말은, 내가 그의 앞에서 표정 관리를 하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엄청난 말이었다.

안 그래도 사람들 사이에서 이종족의 멸종에 대해 말이 많았었으니까.

원래도 점점 사라져가는 중이긴 했지만 언젠가부터 그 변화가 눈에 띌 정도였다고. 참 이상한 일이라고.

좀처럼 저택 밖으로 나가지 않는 나도 이종족들이 실험체로 쓰인 거 아니냐는 등의 소문을 듣지 않았는가.

그랬는데 설마 그게…….

‘다 이사벨의 저주 때문이었단 말이야?’

정말 고작 그런 이유로 다 죽인 거라고? 저주를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서?

내 생각보다 저주의 힘이 너무 강력했다. 원작에서는 몇 줄만 설명하고 넘어갔는데, 그렇게 간단하게 넘어갈 것이 아니었잖아.

혼란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살짝 내리자, 그것을 보던 레오나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마법이란 참 무섭지. 나 하나 괴롭히자고 그렇게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가니 말이야.”

레오나드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방금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을 고백한 사람치고는 태연한 태도였다.

……아니, 그렇다고 착각했다.

“나 하나 고통스럽게 하자고…….”

다시 고개를 든 레오나드의 눈은 텅 빈 껍데기처럼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 시선이 한없이 공허하고 위태로웠다. 꼭 이대로 어딘가로 사라져버릴 것처럼.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 나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말 안 해 줘도 괜찮아요. 저는 괜찮으니까…….”

“하지만 너는 달랐어, 로레이나.”

“레오나드.”

“그동안 내가 보통 사람처럼 살 수 있었던 것은 다 네 덕분이야. 넌 저주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더라고.”

“레오나드, 그만해요.”

“처음이었어. 내 근처에 있어도 죽지 않고, 저주의 영향을 받지도 않는 사람은.”

계속되는 만류에도 레오나드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꼭 고장 난 인형 같은 모습에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내며 빠르게 뛰었다.

“어젯밤 내내 고민해봤는데 아무래도 네가 하프 엘프라서 저주가 통하지 않는 것 같아.”

“이제 그만…….”

“완전한 인간도 아니고 완전한 이종족도 아니니까. 저주도 혼혈까지는 생각 못한 거겠지. 이종족이 인간과 이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잖아.”

“레오나드.”

“아니면 저주의 영향력이 약해졌던가. 하긴, 300년이나 지났으니까.”

“그만 해요.”

“어쨌든 네가 특별한 존재라는 건 확실해. 그래서 4년 전 널 따라서 백작가로 온 거야. 어제 널 찾아와 다짜고짜 같이 가지고 한 것도 이것 때문…….”

“레오나드!”

나는 더 참지 못하고 달려가 레오나드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보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떨고 있는지가 닿은 피부를 통해 느껴졌다.

그가 어떤 얼굴로 내 품에 얼굴을 묻으며 내 옷자락을 붙잡는지도.

……생각보다 훨씬 끔찍한 기분이었다. 글자로만 보고 넘기던 소설 속 주인공의 고통을 직접 눈으로 본다는 것은.

그리고 그 대상이 내가 익히 아는 사람이라는 건 더더욱.

내가 이 세계에 오기 전 읽은 원작은 1인칭 시점인 만큼 레오나드의 심정을 소설 내내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심리 묘사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가끔가다가 한 화를 다 차지하는 경우도 있어서 불평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지나치지 않았다. 더 서술해도, 더 이야기해도 모자랐다.

소설을 읽어 주인공의 마음을 아는 것은 실제로 겪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글자 몇 줄은 그의 마음을 전부 설명해주지 않았다.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을 털어놓는 건 어떤 기분일까. 자기 때문에 여러 목숨이 사라졌다는 죄책감을 몇 백 년이나 안고 사는 건 어떤 심정일까.

에녹이 나 때문에 독화살에 맞은 줄 알았던 일만으로도 괴로워했던 나는 그 감정의 깊이를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처음 만난 날, 헨티슨 간의 파티장에서 레오나드가 왜 그렇게 간절하게 내 팔을 붙잡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내가 레오나드의 옆에 있는 걸 너무 쉽게 생각한 건 아닐까.

갑작스레 든 생각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제 그만 해요.”

“…….”

“다 알겠으니까. 제발 그만…….”

“아니, 너는 몰라, 로레이나.”

내 옷자락을 움켜쥔 손이 덜덜 떨렸다.

이제 막 숨 쉬는 법을 배운 어린아이처럼 허덕이며 바르작거리던 레오나드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내가 얼마나 끔찍하고 역겨운지.”

곧 레오나드가 천천히 나를 밀어냈다.

이윽고 마주한 얼굴은 그 어떤 것보다 참혹했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너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하지 않았어. 갑작스러운 제안에 네가 어떨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였지. 미친놈처럼 말이야.”

“……하지만 제가 괜찮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을 미친놈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것이 레오나드라면 더더욱.

하지만 레오나드의 생각은 나와 달랐던 모양이었다.

“바로 그게 문제야. 너는 계속 괜찮다고 하겠지. 내가 무엇을 부탁하든.”

“…….”

“목걸이 사건이나 에녹 데프론의 독살 사건에도 고민 없이 나섰던 것처럼 말이야.”

“그게 왜…….”

“난 그게 제일 두려워.”

나에게서 완전히 몸을 떨어뜨린 레오나드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더 위험한 일이 생겨도 넌 계속 괜찮다고 할까 봐.”

레오나드의 입에서 나온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가 내 생각을 정확히 짚었기 때문이었다.

레오나드가 나를 원한다면, 그래서 그가 조금이라도 가혹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어느 정도는 기꺼이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앞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레오나드는 이런 나를 눈치챈 것 같았다. 나직한 목소리에 아까와는 다른 단호함이 느껴졌다.

“아까 제럴드가 했던 말은 잊어. 널 데려갈 일은 없을 테니까.”

“…….”

“오랜만에 얼굴 봐서 좋았어, 로레이나.”

레오나드가 고개를 들어 나를 향해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차라리 우는 것이 나았을,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아니야. 그러지 마.’

당신이 웃었으면 좋겠다고는 했지만 그런 식으로 웃기를 바란 적은 없었어.

“정말 미안해.”

당신이 왜 미안해. 미안해해야 하는 건 오히려 나였다.

나는 원작에서 레오나드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봤으면서도 내 살길만 생각한 이기적인 인간이었으니까.

뿐만 아니라 저주에 걸린 레오나드와 재회하고 나서도 시한부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만 하며 신나했다.

레오나드가 단순히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아니라 나와 같은 ‘진짜 사람’이라는 걸 인지했다면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는데.

나는 고통에 허덕이는 레오나드의 얼굴을 직면한 지금에서야 내가 이 세계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세계에서 살아간 지 6년째인데 참 바보 같게도.

“잘 지내.”

마지막 말을 남긴 레오나드가 응접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예전과 달리 꽤 묵직한 발소리가 천천히 멀어졌다.

꼭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 * *

졸지에 오자마자 짐을 챙기게 된 제럴드는 제 주군을 살피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부터 이럴 생각으로 데리러 오신 거군. 같이 갈 사람이 없으니까.

“솔직히 말씀드려도 됩니까?”

“……뭐든지.”

“저는 폐하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제럴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불평했다.

평소라면 진즉에 화를 내고도 남았을 행동이었지만 레오나드는 그러지 않았다.

스스로도 조금 전 행동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멜리오 영애를 데려가려고 이 먼 곳까지 달려오신 것 아니었습니까?”

“그랬지.”

“그것도 지금. 막 황권을 잡은, 제일 중요한 시기에요. 그런데도 이렇게 그냥 돌아가신다고요?”

“그러게.”

레오나드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한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저 다시 깨닫게 되었을 뿐이다.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지, 다짜고짜 찾아와 제 곁에 있어 달라 요구 한 것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저주가 언제 풀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그때까지 로레이나를 옆에 붙잡아 두려고 했었다.

‘쓰레기가 따로 없군.’

로레이나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다 내팽개친 채 달려온 제 추악함까지 떠올린 레오나드는 고개를 저었다.

“……이거면 됐어.”

얼굴 한 번 봤으니 되었다.

아까 보지 않았는가. 저주에 대해 들을 때 로레이나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그리고 마지막에 한 말도 있었으니 로레이나도 충분히 알아듣고 단념했을 것이다.

“이제 가자.”

레오나드가 천천히 뒤를 돌아 마차에 한 발을 디뎠다.

평소라면 단숨에 올랐을 마차에 오르는 과정이 매우 느렸다.

꼭 무언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 설마 기대하고 있는 건가.’

끝까지 이기적인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자신은 기대하고 있었다.

방금 매몰차게 거절하고 나왔으면서, 더는 로레이나의 배려를 받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또 그 배려에 기대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로레이나가 저택에서 나와서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기를.

“레오나드!”

바로 저렇게.

‘……어?’

상상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생동감 넘치는 목소리에 레오나드가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짐 가방을 든 채 백작저를 나온 로레이나가 이쪽을 향해 힘차게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치 4년 전 그날처럼.

“자, 잠깐만 기다…… 앗!”

정말 그날을 재현이라도 하는 것처럼 로레이나가 발을 헛디뎠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레오나드가 로레이나를 한 번에 받아 냈다는 점이었다.

숨차게 달려오던 로레이나가 안정적으로 레오나드의 품에 안착했다.

“괜찮아?”

“…….”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뭐라고 말 좀 해 봐.”

로레이나의 몸을 살피며 묻던 순간, 기다리던 대답 대신 별안간 이마 위로 작은 손이 날아들었다.

딱.

꽤 넓은 공간에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레이나가 어제부터 그렇게 날리고 싶던 꿀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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