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나한테 이마를 맞은 레오나드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디 잘못 맞아서 머리가 이상해졌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벌게진 이마가 아프지도 않은지 한참을 가만히 있는 레오나드를 보며 결국 먼저 입을 열었던 것은 나였다.
“또 이렇게 가려고요?”
“……어?”
레오나드가 멍청한 얼굴로 대답했다. 마치 내가 올 줄 몰랐다는 태도라 헛웃음이 나왔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심정인데.’
어떻게 하면 내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지.
“또 이렇게 갈 거냐고요. 저번에도 이렇게 마차 타고 떠났다가 훌쩍 크니까 찾아왔잖아요. 그동안 연락 한번 없었고.”
“아…….”
“그럼 이번에는 어떻게 하려고요? 또 연락 한번 없다가 죽고 나서 유령 되면 찾아오려고요?”
“…….”
“아, 아니지. 나보다 오래 살 테니까 그럴 일은 없겠구나. 내가 죽을 때면 모를까.”
“……로레이나.”
화가 난 모양인지 레오나드의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았다. 내 몸을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렇게 불러 봤자 하나도 안 무서워요. 내 말이 심하다고 생각해요? 아니, 전혀요. 심한 건 오히려 레오나드죠.”
나는 굳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레오나드를 올려다보았다. 그 와중에도 내 눈을 피하지 않는 것이 짜증이 났다.
이렇게 내 말을 잘 들어 주면서 지금은 왜 이러는 건가 싶어서.
“그렇게 속에 있는 말 쏟아 내고 가면 내가 그렇구나, 하고 그냥 보내 줄 줄 알았어요? 황궁 안 가서 다행이라며 마음 편히 발 뻗고 잘 거라고 생각했냐고요.”
“……로레이나, 그게 아니야.”
“괜찮다고 말 안 하면요? 딱 봐도 말하기 곤란해 보이는데 그걸 하나하나 다 물어봐요? 좋아요. 그럼 물어볼게요.”
“…….”
“4년 동안 왜 연락 한번 없었어요? 내가 보낸 편지에도 답장 한번 없는 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요?”
“로레이나.”
레오나드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내 이름만 나직이 뱉었다.
그게 신호탄이라도 된 것일까. 눈에다 누군가가 물을 붓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아, 젠이 잘못되었구나.”
“…….”
“역시 젠을 그렇게 보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나 때문이구나. 내가 조금만 더 생각하고 잡았더라면 이렇게 연락이 끊기는 일은 없었을 텐데.”
지난 4년 동안 그 생각 때문에 밤마다 악몽을 꾸었다. 꿈에는 늘 젠이 아멜리오 백작가 영지를 떠나는 날이 나왔다.
그리고 그 꿈의 결말은 항상 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서는 항상 자책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달래도 별 소용이 없었다.
나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사생아라는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으면서 그냥 보냈다.
“그날 그렇게 보내지 말걸. 그랬으면 젠이…….”
“미안해.”
“…….”
“내가 생각이 짧았어. 다 내 잘못이야.”
레오나드가 내 목 뒤로 손을 받쳐 나를 더 깊이 끌어안았다.
“그러니까 울지 마, 제발.”
서툴게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눈물을 펑펑 쏟았다.
사실 레오나드가 잘못한 건 없었다.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보안이 제일 중요한 시점에서 나에게 편지를 보낼 수는 없었겠지.
하지만 지금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레오나드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으니까.
저는 그런 엄청난 일을 겪고도 스스로를 끔찍하다고 말하면서, 고작 이런 어리광에 품을 내어주는 다정함이.
제 비밀을 다 털어놓고도 어떤 조치도 하지 않고 나를 위해 떠나는 배려심이.
그것이 너무나 좋으면서도 정말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내 방 발코니로 넘어와 나와 이야기하던 레오나드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나는, 당신의 괴로움을 미리 알고도 그런 배려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당신은 왜 이런 손해 보는 선택을 해.
하지만 이 말은 도저히 레오나드에게 할 수 없어서, 종종 나를 괴롭히던 악몽을 핑계로 펑펑 울었다.
한참을 눈물을 쏟던 내가 레오나드에게서 떨어진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난 뒤였다.
“……훌쩍. 같이…… 갈 거예요. 저도 황궁에 따라갈 거라고요.”
“……로레이나.”
“진짜예요. 짐 가방 들고 있는 거 보이죠?”
눈물을 훔치며 내 몸집만 한 가방을 살짝 들어 보였다. 그것을 보던 레오나드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로레이나, 나는 네가 예전에 알던 어린아이가 아니야.”
“누가 그걸 몰라요? 딱 봐도 보이는데.”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야.”
“저도 장난하는 거 아니에요.”
레오나드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내가 제일 잘 안다. 어쩌면 레오나드보다도 더.
“나 되게 이기적인 사람이야.”
“그것도 알아요.”
이기적인 거라면 나도 만만치 않다. 지금 내가 레오나드를 따라가겠다고 마음먹은 건 순수하게 그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곳이 레오나드의 옆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해도 변하지 않아.’
나는 저주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는 더 확실해졌다. 어쩌면 나 같은 엑스트라의 죽음도 빗겨 가게 해 줄지도 모르지.
이렇게 분명한 목적이 있는 이상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레오나드에게 다가간 셀리아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러니까 이건 레오나드가 나에게 미안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중간에 포기할까 생각도 했었지만.’
아까 레오나드가 응접실에서 나가버린 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레오나드 옆에 있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일까?
가까이에서 마주한 레오나드의 고통은 내 생각보다 훨씬 컸다. 그런 그를 살기 위해 이용해도 괜찮은 걸까?
쉽지 않은 일에 머리가 복잡했지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나는 곧 결론을 내렸다.
레오나드에게 내가 필요하다면 그걸로 되었다고. 어떻게든 그에게 도움이 되겠다고.
“제가 괜찮다고 하는 게 싫다고 했죠?”
“그래.”
“그럼 제가 당신이 필요하다고 한다면요?”
“…….”
“저는 당신이 필요해요. 당신은 내가 필요해요?”
몸 전체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만큼 나에게는 제법 큰 용기가 필요한 말이었다.
“다른 사람으로는 도저히 대체가 안 될 만큼?”
빠르게 덧붙인 말에 레오나드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거 묻지 마.”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대답이었다.
“그럼 괜찮아요. 따라갈게요.”
그거면 되었다. 내가 가장 바라던 답이었으니까.
“레오나드 젠 데르키안, 당신 옆에 있겠다고요.”
말을 뱉음과 동시에 벅차오를 만큼의 쾌감이 느껴졌다.
레오나드가 처음이었다. 내가 필요하다고, 오로지 나만을 원한다고 말해준 건.
그 마법 같은 말에, 정말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난 반드시 당신에게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당신을 꼭 행복하게 만들 거야.
여주인공을 만나는 날까지, 조금이라도 웃는 순간이 많아지도록. 백작저를 떠나기 위해 짐을 싸면서 그렇게 결심했다.
태연하게 말을 내뱉는 나를 물끄러미 보던 레오나드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게 마지막이야. 로레이나, 이 시간이 지나면 그때는 정말 못 놓아 줘.”
“…….”
“……그래도 같이 갈 거야?”
어쩐지 울음기가 섞인 것 같은 물음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짧지만 많은 뜻이 함축되어있는 말에 레오나드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좋은 쪽이라는 것쯤은 확신할 수 있었다.
혹시라도 내가 말을 바꿀세라 레오나드가 나를 안고 있던 그 상태로 번쩍 들어 올려서 마차에 태웠으니까.
고개를 들어 다시 본 레오나드의 입가에는 꽤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물론 그 미소가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하하하…….”
마차에 탄 것은 나와 레오나드뿐만이 아니었다. 제럴드 역시 멋쩍게 웃으며 같은 마차에 올랐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레오나드가 미간을 찌푸렸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메리까지 같이 가니 누군가는 이 마차에 타야 하단 말이다. 이왕이면 저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좋지 않겠어?
“크흠. 그럼 지금부터 아멜리오 영애가 해야 하는 일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좋아요.”
안절부절못하는 제럴드에게 살짝 웃어 주고는 레오나드를 살짝 흘겨보았다.
자꾸 눈치 주지 말라니까. 아까 눈물 펑펑 쏟는 것을 다 보여줬는데 나라고 안 불편하겠어? 어쩔 수 없잖아.
그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결국 레오나드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채로 얼마간 말이 없던 레오나드가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그냥 본체화해서 날아갔어야 했는데.”
……죄송한데, 그건 제가 사양합니다. 적어도 추락 사고 엔딩으로 죽고 싶지는 않다고.
“그래서, 제가 할 일은 뭔가요?”
“간단합니다. 폐하의 일과를 기록해 주시면 됩니다.”
“……그게 끝이에요?”
너무 쉬운데. 심지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잖아.
생각하는 바가 얼굴에 다 드러났는지 제럴드가 살짝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말은 쉽지만 아무나 못 하는 일이거든요.”
“종이에 폐하의 일과를 기록하는 게요?”
“아니요, 그렇게 하면 누군가가 훔쳐볼 위험이 있으니까요.”
“그러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끝을 흐리자 제럴드가 다시금 웃으며 대답했다.
아까부터 계속 웃네. 이복동생에게 못살게 구는 파렴치한에서 벗어난 게 저리도 좋은가.
“영애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저장해 두시면 됩니다.”
“……네?”
……내 머릿속에 뭘 저장해?
학창 시절에 유명했던 모 연예인이 떠오른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정신 차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공작님 말씀은 제가 폐하의 일과를 다 지켜보았으면 한다는 거죠? 엘프의 기억력이 남다르니까?”
“제가 말하고 싶은 바를 정확히 파악하셨네요.”
제럴드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며 짝짝 손뼉을 쳤다. 칭찬을 받은 느낌이라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조금 말린 것 같기도 한데 기분 탓이겠지?
“말씀드렸듯이 영애의 일은 폐하의 일과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해 주셔야 합니다.”
“전부 다요?”
“그게 어렵다면 하루에 있었던 일 중 가장 기억에 남거나 중요했던 일만 기억하셔도 좋습니다. 그 정도만 되어도 지장은 없을 테니까요.”
“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열혈 수강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나는 제럴드가 하는 말에 따라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제럴드 선생님 말씀은…….
“제가 폐하의 걸어 다니는 일기장이 되었으면 한다는 거죠?”
“정확합니다!”
이번에도 제럴드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연이어 손뼉을 쳤다. 자연스럽게 요구 사항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고.
“기록된 내용을 밤마다 주인에게 읽어 주는 일기장이면 더 좋을 것 같아요!”
그에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보통 로맨스 판타지 소설 주인공들은 황녀나 주요 인물의 약혼녀, 그것도 아니면 귀부인으로 빙의하던데.
……나는 도대체 뭐지?
시한부 선고받은 엑스트라인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이젠 하다 하다 일기장이라니.
작게 욕을 뱉은 나는 결국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뭐, 내가 운이 없었던 게 한두 번인가.
* * *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마차에 타고 조금 시간이 지난 뒤였다.
‘이 길은 수도로 올라가는 길이 아닌데.’
더 이상한 것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묘하게 익숙하다는 점이었다. 기분 탓인가?
“저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네가 잘 아는 곳.”
“이쪽으로 쭉 가면 크루시아 축제가 열렸던 곳인데…….”
혹시 몰라 말끝을 흐리자 레오나드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맞구나.
“거기는 갑자기 왜 가는 거예요?”
“볼일이 있어서.”
“혹시 축제 구경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크루시아 축제는 축제 의미상 봄에만 열리는데…….”
“축제는 안 열리더라도 나무들은 그대로 있지 않아?”
조금 불안한 듯 묻는 레오나드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겠지. 누가 나무를 뽑지 않는 이상.
“그럼 됐어. 축제를 즐기려고 가는 게 아니라 소원 나무에 볼일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소원 나무요? 가서 소원 빌려고요?”
“응, 저번에 빈 소원이 이루어졌거든. 효과가 있는 것 같아서 이번에 하나 더 빌어 보려고.”
오,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당시 젠 소원이 나랑 계속 같이 있고 싶다는 거였으니까.
“이번에는 뭐라고 빌 거예요?”
“글쎄…….”
레오나드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눈매가 사르르 접히며 부드럽게 휘어졌다.
“비밀이야.”
“뭐야. 얼마나 엄청난 거길래 비밀이에요? 저번처럼 또 누구랑 같이 있고 싶다고 빌기라도 하…….”
거기까지 말했을 때 싸한 감각이 갑작스레 몸을 훑고 지나갔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아, 실수했다.
아니나 다를까 건너편에서 살짝 떨리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정적에 눈치를 보는 듯한 제럴드의 작은 헛기침 소리와 함께.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