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레오나드.”
“…….”
“레오나드 젠 데르키안 황제 폐하.”
열심히 따라가며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묵묵히 걷는 모습에 나는 결국 속도를 좀 더 내어 앞을 가로막았다.
그래 봤자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없었던 건 마찬가지였지만.
“레오나드.”
“…….”
“젠.”
어라. 이렇게까지 불렀는데도 대답 안 한다 이거지.
그렇다면야 다 방법이 있지.
“혹시 삐졌어요?”
얼굴을 살피려고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그 말에 푹 숙였던 얼굴이 순식간에 들어 올려졌다.
아, 깜짝이야.
“……삐지다니.”
레오나드가 잔뜩 굳은 얼굴을 손으로 가리려 애쓰며 외쳤다. 맞는구먼, 뭘. 삐졌네, 삐졌어.
이건 확실히 내가 잘못한 일이 맞으니 풀어주어야겠지.
삐진 얼굴이 귀여워서 조금 더 보고 싶기는 하지만. 그러다가 나중에 달래기 힘들어지니까.
“미안해요. 그…… 뭐랄까. 나쁜 마음으로 훔쳐본 건 아니었고…….”
“…….”
“그냥 그때는 젠이 진짜 동생 같아서 재미, 아니, 걱정되는 마음에…….”
무심코 내뱉은 본심에 잠시 나를 흘겨보던 레오나드가 다시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아, 거기서 재미있어서 그랬다는 말이 왜 튀어나와. 이 바보, 멍청이!
나는 재빨리 레오나드를 쫓아가 팔을 잡고 매달렸다.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비는 수밖에 없다.
“내가 진짜 잘못했어요, 레오나드. 이제 화 풀어요, 응?”
팔을 잡고 매달린 필사의 노력에 레오나드가 조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앞으로 계속 붙어 있어야 할 텐데 지금 안 풀어 두면 사이 이상해진다고.
게다가 나는 레오나드 옆에 있어야 살 수 있다는 말이다! 떠나도 당신 연애하는 것까지는 꼭 보고 떠날 거라고.
“저한테 바라는 거 없어요? 뭐든지 말만 해요. 소원 나무에 거는 거 말고 내가 소원 하나 들어줄게요!”
백작 부인의 서재 덕에 이론적인 면에서는 나름 박식한 편이었다.
길버트의 특제 애플파이 맛을 내 달라는 것만 빼면 다 해 줄 수 있지. 말만 해라.
“흐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작게 헛기침을 한 레오나드가 기분이 좋아진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그 소원 하나는 나중에 쓰는 것으로 할게.”
언제 부끄러워했냐는 듯 레오나드가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이상하다. 분명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는데.
……왜 말린 것 같은 기분이지?
“소원 안 적어?”
“아, 적을 거예요!”
서둘러 레오나드의 옆으로 뛰어갔다. 축제가 열리는 기간이 아니라서 따로 종이와 펜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그거야 제럴드의 필수품이라 얼마든지 구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제럴드에게서 종이를 받아 든 레오나드가 잠시 내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설마 또 볼 생각은 아니지?”
“……네? 물론이죠.”
내 말에 레오나드가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더니 종이에 뭔가를 적어 내려갔다.
솔직히 뭐라고 적는지 보고 싶었지만, 그냥 포기했다.
‘이번에 보다가 걸리면 한동안은 대화도 안 할 것이 뻔하니까.’
나는 4년 전과는 달리 훌쩍 커 버린 키만큼 높은 곳에 종이를 다는 레오나드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나중에라도 슬쩍 볼까 생각도 했었는데 그러지도 못하겠네.
“걸었어?”
“아, 잠시만요.”
혹시라도 레오나드가 볼세라 재빨리 접은 뒤 종이를 걸 곳을 찾았다. 나도 되도록 높은 곳에…….
……어라.
“왜 그래?”
“제 손이 닿는 곳에는 종이를 걸 자리가 없네요.”
말을 뱉으면서도 계속 살폈으나 정말 없었다. 아니 도대체 이 축제에 커플이 몇이나 온 거야.
“아직 겨울이라 그런가 봐요. 다음 축제가 열리는 봄까지 소원 종이 수거를 안 하니까.”
“내가 대신 걸어 줄까?”
“아니요.”
소원 종이는 직접 쓰고 직접 걸어야 의미가 있는 거란 말이다. 다른 사람 손이 닿으면 안 된다고.
“뭔가 딛고 올라갈 만한 게 없을까요? 나무 상자 같은 거…….”
밟고 올라갈 만한 것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으려니 레오나드가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벌써 찾았나?
“굳이 찾을 필요가 있어?”
“그럼 어떻게 걸어요. 제 손이 닿는 곳이 없……. 우왓.”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려 대답하던 순간, 갑작스레 공중에 몸이 붕 떴다.
정신을 차리니 레오나드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찔한 높이에 서둘러 레오나드의 어깨를 잡았다.
……이, 이게 뭐야.
“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위쪽에다가 걸라고. 이 정도 높이면 걸 수 있잖아.”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기다려 봐. 나무에 조금 더 가까이 갈 테니까.”
레오나드가 내 무릎 뒷부분을 안듯이 잡은 채로 움직였다.
매우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지만 내 상반신이 흔들리기에는 충분했다.
“우왓. 자, 잠깐만요.”
떨어질 것 같다는 예감에 본능적으로 레오나드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무, 무서워요.”
설마 이러다가 떨어져 죽는 결말은 아니겠지?
불안감에 몸을 떠는데 자신만만하게 움직이던 레오나드가 왜인지 말이 없었다.
왜 대답을 안 하는 거야. 나 진짜로 무섭단 말이야.
“……레오나드?”
“…….”
“설마 이 상태로 자는 건 아니죠?”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내 품 안에 얼굴을 묻고 있던 레오나드가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내 손아귀에 있던 검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머리카락 다 뽑아 버릴까.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그럼 종이 못 걸 텐데.”
“…….”
“뭐, 나는 상관없지만.”
활짝 웃는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레오나드의 머리에서 손을 떼었다.
천천히 어깨로 손을 옮기는데 도중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자세히 살펴보니 검은 머리카…….
크흠. 이건 비밀로 하자.
“절대 놓으면 안 돼요. 알겠죠?”
레오나드 몰래 증거 인멸에 성공한 것을 확인한 뒤 작게 속삭였다. 다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을 보아하니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휴, 숱이 많으니 다행이지. 하마터면 남자 주인공 몸에 흠집 낼 뻔했네.
“꽉 잡고 있을 테니까 어서 달아. 떨어뜨리면 본체화해서라도 받을게.”
“약속한 거예요?”
“그래.”
확답을 받아 내고 나서야 작게 심호흡을 하며 소원 나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레오나드가 나무 바로 옆까지 간 탓에 손은 생각보다 금방 닿았다.
그나저나 너무 높이 단 거 아닌가. 나중에 사람들이 수거할 수 있을까 모르겠네.
“다 됐어?”
“네, 다 묶었어요.”
“천천히 내릴 테니까 그동안 내 목에 팔 두르고 있어.”
그 말에 레오나드의 목을 바로 끌어안았다.
혹시라도 나를 떨어뜨릴까 봐 힘주어 안자 내 귓가에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내려앉았다.
‘남의 속도 모르고 막 웃네.’
목을 끌어안은 채로 몸을 다 폈는데도 땅에 발이 안 닿는 공포를 당신이 아느냐고.
하긴, 저렇게 큰 사람이 뭘 알겠어.
날 등에 태우고 황궁까지 날아가겠다고 한 사람이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뭐라고 적었어?”
내가 땅에 발을 디딘 것을 확인하자마자 레오나드가 불쑥 물었다.
이보세요. 본인도 안 가르쳐 줬으면서 그런 걸 물으시면 안 되죠.
“비밀이에요.”
“4년 전 내 소원도 알고 있잖아. 하나만 말해 주는 거 어때?”
“안 돼요. 그리고 그건 레오나드가 말해 준 게 아니라 제 능력으로 알아낸 거잖아요.”
싱긋 웃어 준 뒤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아쉬운 듯 소원 나무를 보던 레오나드 역시 나를 따라 발을 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 소원을 알아내는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힌트도 없어?”
“없어요.”
“내가 거는 거 도와줬는데도?”
“정 궁금하시면 소원 하나 쓰시는 거 어때요? 그럼 알려 드릴 텐데.”
“아니, 됐어.”
금세 내 옆까지 따라온 레오나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민할 새도 없이 바로 대답하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싫었던 모양이었다.
“이런 귀한 걸 이렇게 쉽게 쓸 수 없지. 아꼈다가 나중에 쓸 거야.”
레오나드가 엄청난 것이라도 얻은 것 같은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그와 반대로 내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얼마나 엄청난 걸 빌려고 저러는 거지? 저렇게까지 말하니 갑자기 조금 불안한데.
……괜히 소원 들어주겠다고 했나?
“뭘 적었든 간에 이루어졌으면 좋겠네.”
“제가 진짜 말도 안 되는 거 적었으면 어쩌려고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어.”
꽤 단호한 대답에 앞으로 향하려던 고개를 돌려 다시 레오나드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였는지 레오나드가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저도 이루어졌으면 좋겠네요.”
부끄러운 마음에 일부러 보폭을 크게 하며 걸었다. 물론 레오나드는 별 수고 없이 금방 따라왔지만.
“천천히 걸어. 넘어져.”
“이 정도로는 안 넘어져요. 그리고 제가 언제 넘어졌다고 그래요?”
“……내 앞에서만 해도 두 번 넘어졌는데?”
“…….”
“그것도 아주 대차게.”
웃으며 작게 덧붙인 말에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차를 향해 뛰어갔다.
뒤에서 결국 웃음보가 터진 레오나드가 다시금 천천히 가라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절대로 말하지 말아야지.’
소원 종이에 레오나드가 행복해지기를 바란다고 적었다는 건.
“그러다 넘어진다니까.”
어느새 나를 따라잡은 레오나드가 마차 문을 열었다.
이제는 나보다 훌쩍 커 버린, 목을 꺾어야 눈을 마주할 수 있는 레오나드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보니까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 그때는 내가 제일 첫째 같은 느낌이었는데.
에녹도 엄청나게 컸을 텐데 다시 만나면 이런 느낌이려나.
신기하면서도 흐뭇한 기분에 살짝 웃던 찰나였다. 뭔가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라, 잠깐만. 나 뭔가 잊고 있는 것이 있었던 것 같…….
‘아, 맞다! 에녹이 있었지!’
맙소사. 레오나드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홀라당 잊어버렸다.
아멜리오 백작가 영지에 들린다고 편지까지 했었는데.
‘제대로 설명 못 하고 나왔는데 어떡하지?’
길버트가 잘 설명해 주기를 기대하기에는 그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급하게 나오느라 당분간 레오나드와 함께 황궁에 있을 것이라는 말만 하고 나왔는데.
‘영지를 잘 부탁한다는 말도 겨우 했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더 자세하게 말했으면 레오나드도 놓칠 뻔했던 상황이었으니.
다급해 보이는 내 얼굴에 길버트가 알겠다며 보내 주었으니 망정이지.
안 되겠다. 황궁에 도착하는 대로 편지라도 해야겠어.
‘설마 이것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 레오나드 같은 일이 또 생기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