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그날 저녁 아멜리오 백작가.
에녹은 편지에 적어 놓은 대로 알렌 왕국에 함께 간 기사들을 이끌고 찾아왔다.
아멜리오 백작가 영지를 떠난 지 무려 4년 만의 방문이었다.
“오랜만이네.”
에녹이 길버트를 보며 방긋 웃었다.
갑작스레 떠난 로레이나 때문에 잠시 허둥지둥하던 길버트는 연륜 있는 집사답게 곧 능숙한 솜씨로 손님을 맞았다.
“오랜만입니다, 에녹 님.”
에녹과 기사들을 위해 알맞은 방을 배정해 주고 오랜 여정에 지쳤을 이들을 위해 식사도 대접했다.
‘잘 해내야만 해.’
로레이나가 길버트에게 저택을 맡기고 간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어떤 일이든 간에 평소보다 잘 해내야만 했다.
로레이나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지만 에녹이 로레이나의 행방을 물었을 때 길버트는 어쩔 수 없이 당황하고 말았다.
로레이나의 행방을 들은 에녹 역시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고.
예상 밖의 소식을 들은 에녹이 눈을 크게 떴다.
로레이나의 이야기를 물으며 부드럽게 휘어지던 녹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지금 뭐라고…….”
입 밖으로 나온 말이 차마 끝맺지 못한 채로 공기 중에 흩어졌다.
하지만 길버트는 그것만으로도 에녹이 어떤 심정인지 알 수 있었다.
아니, 에녹이 아예 말을 꺼내지 않았더라도 그랬을 것이었다.
로레이나가 갑작스레 황궁으로 간다고 했을 때 자신의 마음도 그러했으니까.
“아가씨는 오늘 아침 황궁으로 떠나셨습니다.”
“…….”
“……황제 폐하와 함께요.”
잠시 에녹의 눈치를 보던 길버트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 짧은 순간에 수만 가지의 생각이 오갔다.
갑작스레 황태자 자리를 박탈당한 사람 앞에서 새로운 황제를 언급하다니.
물론 에녹이 화낼까 봐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지.
‘괜찮으신 걸까?’
차마 묻지 못한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오늘 아침 저택에 찾아온 남자가 새로운 황제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쭉 들었던 생각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남자보다는 반년 동안 같은 집에서 지낸 에녹이 더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길버트의 걱정이 무색할 만큼, 정작 에녹이 신경 쓴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애초에 에녹은 길버트가 걱정한 부분에서 놀라지도 않았다.
자신의 일정을 꿰고 있는 아버지 덕에 며칠 전 황위 교체가 이루어졌다는 것쯤이야 이미 연락을 받은 상태였으니까.
‘……황궁으로 갔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로레이나가?
지난 4년간 아무리 편지로 애원해도 한 번도 수도로 올라오지 않던 로레이나였다.
바빠서 그렇다거나 몸이 안 좋아서 그렇다는 등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딱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로레이나가 수도로 올라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그런데 그런 로레이나가 처음 보는 사람을 따라 황궁으로 올라갔다고?
“……로레이나가 별다른 말은 없었는가?”
“워낙 급하게 나가시느라 저에게 말을 걸 시간도 없으셨습니다. 짐도 겨우 꾸리셨는걸요.”
길버트의 말에 에녹은 생각을 굳혔다.
로레이나는 원치 않는 곳에 억지로 끌려간 것이 분명하다고.
도대체 어떤 상황이었길래 짐도 제대로 못 꾸리고 나간다는 말인가.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가 로레이나를 데려갈 만한 이유가 없었다.
‘오늘 아침에 떠났다면 황위 교체가 이루어지자마자 거의 바로 왔다는 건데.’
수도에서 거리가 먼 아멜리오 백작가 영지까지 그렇게 급하게 내려올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황위 교체에 반발할까 봐 로레이나를 인질로 붙잡아 두고 있는 경우.
‘저항 없이 황위를 넘기셨다고 했으니 아버지는 붙잡을 명분이 부족했을 거야.’
그러니 대신 로레이나를 선택했겠지.
자신이 로레이나와 어떤 사이인지는 조금만 조사해보면 바로 알 수 있었을 것이었다.
단순히 같은 이종족이라 데려갔다고 하기엔 너무 과한 행동이었다.
세상에 그런 이유로 즉위하자마자 이 먼 곳까지 날아올 황제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지금 로레이나가 황궁에 간 건 자신 때문이었다.
‘……실수했다.’
이건 변명의 여지도 없이 자신의 실수였다.
자신이 보낸 편지가 로레이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간과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으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있었는지 몰랐다.
로레이나와 일상을 공유한다는 것이 너무 좋아서.
“왜 황제 폐하께서 아가씨를 데리고 가셨을까요? 혹시 잘못되기라도 하시면…….”
길버트가 점점 어두워지는 에녹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 걱정스러운 얼굴에 에녹은 도무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걱정하지 말게.”
이처럼 도움 안 되는 말은 아마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에녹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데리고 올 테니까.”
반드시 꼭.
* * *
마차는 꽤 오래 달렸다. 잠을 자지 못했던 탓에 좀 자고 일어나니 처음 보는 곳에 와있었다.
하긴, 수도로 올라가는 길은 어디로 가든 처음 보았겠지만.
빙의되고 나서 제일 멀리 나갔을 때가 크루시아 축제에 참석했을 때이니.
‘황궁에 가서도 레오나드 없이는 못 돌아다닐 테니 바깥 풍경 좀 많이 봐둬야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살피던 중 차가운 바람이 들이닥쳤다.
최근 몇 년간 느껴 보지 못한 추위에 나는 재빨리 창문을 닫았다.
추운 게 제일 질색이었다. 추위에 괴로워한 것은 이전 세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아멜리오 백작가 영지가 따뜻한 편이라고 하더니. 정말이었네.’
앞으로 옷을 더 꼼꼼히 입어야겠다고 생각할 때쯤 아까보다 확연히 어두워진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이대로 가다가는 야영하게 될 것 같은데.
“폐하, 저희 슬슬 묵을 수 있는 여관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
“폐하?”
왜 대답이 없지?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돌리니 제럴드가 조용히 해 달라는 듯 검지를 손가락에 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고른 숨을 내쉬며 눈을 감고 있는 레오나드의 모습도 함께.
“……최근에 일이 많아서 잠을 전혀 못 주무셨습니다.”
“아…….”
“여관을 찾는 건 저와 기사들이 할 테니 잠시만 폐하를 부탁드릴게요.”
“네, 다녀오세요.”
속삭이는 목소리를 따라 일부러 조용히 말하자 짧게 웃던 제럴드가 마차 밖으로 나갔다.
그 와중에도 레오나드는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진짜 피곤했던 모양이네.
‘그런 와중에 아멜리오 백작가까지 내려오고.’
새근새근 잘도 자는 레오나드를 보고 있는데 별안간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팔짱을 끼며 몸을 살짝 떨기도 했다.
“추운가…….”
그러게, 누가 저렇게 얇게 입고 오래. 괜히 신경 쓰이게 진짜.
……안 되겠다. 추울 때를 대비해서 챙겨 왔던 담요 좀 몇 개 꺼내 달라고 해야지.
기사들도 많으니 메리까지 여관을 찾으러 가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아마 근처에 있을 것…….
“메리!”
별생각 없이 마차 문을 열고 나온 순간이었다.
고개를 들자마자 웬 남자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잔뜩 술에 취했는지 동공이 많이 풀려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그가 나를 보고 있다는 건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눈에 묘한 불쾌감이 어려 있다는 것도.
“……죄송합니다.”
그러니 갈 길 가세요. 저는 그냥 다시 들어가겠습니다.
최대한 무해한 얼굴로 웃으며 살짝 뒷걸음질 쳤다. 어차피 모르는 사이이니 이래도 별 상관 안 할 테니까.
그렇게 은근슬쩍 들어가려던 순간, 가만히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멜리오 영애 아닌가?”
남자의 입에서 나온 내 이름에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자 남자가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다.
“맞구나? 로레이나 아멜리오.”
확신에 찬 얼굴을 한 남자의 눈동자가 묘한 쾌감에 번들거렸다.
뭐야, 나를 어떻게 알고 있지?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남자가 마치 내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뱉었다.
그 와중에도 몸이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헨티슨 남작가에서 본 이후로 처음이네. 그때도 예쁘긴 했는데 훨씬 더 예뻐졌잖아?”
날 어떻게 아나 했더니 다이아나의 파티에서 본 모양이었다. 거기서 못 봤더라도 머리카락 때문에 알아봤겠지만.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나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나랑 한마디라도 말을 했으면 내가 기억 못 할 리 없지.’
그럼 일단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라는 말이었다.
내가 빙의하기 전의 로레이나랑 아는 사이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려 6년이나 연락 안 한 건데 그 정도면 그냥 남이지.’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메리나 길버트가 미리 언질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냥 신경 안 써도 될 것이었다.
나는 살짝 인사를 하며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가려고 뒤를 돌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직이 욕지거리를 뱉은 남자가 거칠게 손목을 잡아챘다.
“망할. 왜 데이트 한번을 안 해 줘?”
“…….”
“내 편지 답장은 왜 안 해 주냐고! 편지를 그렇게 보냈는데 만나 줘야 할 거 아냐!”
그 말에 나는 조용히 남자의 다리 사이를 걷어차려던 발을 내렸다.
아멜리오 백작가로 땔감을 보낸 사람이라고?
‘내 앞으로 땔, 아니, 편지를 보낸 이들은 다 웬만큼 직위가 높은 귀족들이었는데.’
혼자였으면 아무 상관 없이 그냥 쳤을 테지만 지금 나는 레오나드를 도우러 황궁으로 가는 중이었다.
혹시라도 일이 나한테 불리하게 돌아가서 내가 레오나드 옆에 있지 못하게 되기라도 한다면.
끔찍한 상상에 잠시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래, 레오나드를 봐서라도 참는 것이 좋…….
“부모 형제도 없이 홀로 있는 것이 불쌍해서 돌봐 주려고 했더니만 왜 그렇게 비싸게 굴어?”
“…….”
“뭐, 그래도 성년이 될 때까지 약혼자도 없는 걸 보니 상황을 알 만하군. 부끄러웠던 모양이지? 다 이해해. 그럼 내가 몰래 챙겨주는 건 어떠…….”
……지 않지. 아무리 그래도 내가 이런 말들을 참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못 들을까 싶어서 아주 천천히, 분명한 발음으로.
“당신 같은 사람 만나기 싫어서 아직 약혼 안 한 거야.”
“……뭐?”
“나랑 한 번이라도 이야기해 본 적 있어? 그것도 아니면서 다짜고짜 사랑한다고 편지 보내면 내가 당신이랑 데이트해 주어야 해? 그런 법이라도 있냐고.”
말하고 보니까 더 어이가 없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남자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설사 그런 법이 있다고 해도 절대로 너랑은 안 만나.”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분을 못 이긴 듯 몸을 부들부들 떨던 남자가 손을 올렸다.
“이, 이게!”
찰싹. 꽤 넓은 길 한가운데 강렬한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남자가 내리친 곳은 뺨이었다. 맞은 오른쪽 뺨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손톱에 긁히기라도 한 모양인지 살짝 피도 나는 것 같았다.
‘……어쩜 이렇게 예상대로 움직여 주지?’
그것도 제일 잘 보이는 위치를 때려 주다니. 남자의 반응을 확인하며 슬쩍 주위를 훑어보았다.
‘파란 지붕 집에 갈색 머리 아가씨 하나. 저쪽 길목에 남색 머리 아저씨…….’
좋아. 월척이다. 목격자가 다섯이나 되네.
이 정도면 나중에 이 남자가 지금 일로 문제를 제기하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해.”
“뭐라는…….”
“당신이 먼저 나 공격한 거야.”
무슨 말이냐고 남자가 물을 새도 없이 나는 내가 생각해 둔 곳을 발로 찼다. 그것도 아주 있는 힘껏.
“커헉…….”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보던 남자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기절했다.
표정을 보니 공격이 꽤 잘 먹혀들어 간 모양이었다.
“꼴좋다.”
뭐야. 별거 아니네. 후련한 마음에 남자를 내려다보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맞은 뺨이 꽤 아프기는 했지만 괜찮은 기분이었다.
별안간 뒤에서 대답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뭐가 꼴좋은데?”
“……아, 깜짝이야!”
슬쩍 뒤를 돌아보니 방금 깬 것인지 레오나드가 몽롱하게 눈을 뜬 채로 마차 안에서 고개만 내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심장이 벌렁거리는 기분에 나는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뭘 그렇게 놀라? 무슨 죄지었어?”
“저, 그게…….”
나는 뒤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보여 주는 대신, 일단 웃으며 뒤를 돌았다.
충격적인 것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보면 조금 낫잖아.
“사실 일이 좀 있었…….”
웃는 얼굴로 차근차근 설명하려던 순간이었다. 몸이 얼어붙을 듯 차가운 음성이 귓가에 꽂혔다.
“……누구야.”
그제야 나는 레오나드에게 내 뺨을 가감 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망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