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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25화 (25/144)

#25화

장난스러운 어조였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나른하게 풀려 있던 붉은 눈도 어느새 또렷하다 못해 불타오른 뒤였다.

생전 처음 보는 표정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몸이 절로 떨려서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가 힘들었다.

‘어떻게 해야…….’

다행히도 이 긴장감은 레오나드가 내 뺨을 어루만지면서 풀어졌다.

서늘한 얼굴과 달리 매우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누가 이랬어?”

“아…….”

상처 난 뺨 위로 레오나드의 손이 스치자 살짝 따끔했다.

예상치 못했던 통증에 작게 신음을 흘리자 레오나드가 흠칫 몸을 떨었다.

곧 뺨을 살피던 손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도대체 누가…….”

레오나드가 뒷말을 삼키며 입술을 거칠게 짓씹었다.

……이러다 내 뒤에 있는 남자 죽을 것 같은데?

“……저 괜찮아요! 이 정도는 하루 자면 금방 낫는다니까요. 기억하죠? 예전에 입술 다쳤던 것도 금방 나았던 거.”

내 말에도 레오나드는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진짜인데 왜 저러지.

‘자기도 봐 놓고선 그러네.’

때마침 저 멀리서 제럴드가 여관을 찾았다며 팔을 휘젓는 것이 보였다.

그쪽을 향해 잠시 시선을 주던 레오나드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는 내 뒤쪽으로.

아, 걸렸네.

“……먼저 들어가 있어, 로레이나.”

“레오나드는요?”

내 말에 잠시 아래쪽을 보던 레오나드가 나직이 답했다.

“나는 잠깐 근처에서 할 일이 있어서.”

그 할 일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던 나는 레오나드의 팔을 잡으며 작게 속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죽이지는 않을 거죠?”

내 말에 잠시 망설이던 레오나드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내가 물으니 대답은 하겠지만 이 상황이 상당히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노력해 볼게.”

“아니, 그거 가지고는 안 돼요.”

노력했는데 죽어 버렸다고 하면 끝이잖아. 나는 내 근처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물론 내 뺨을 친 건 조금 괘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내가 충분히 복수도 해 줬단 말이야.

“죽이지 말아요. 알겠죠?”

연거푸 부탁하는 내 모습에 레오나드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왜 그렇게 저 자식을 신경 쓰는지 모르겠는데.”

“…….”

“네 얼굴을 망가뜨렸잖아.”

……아, 순간 너무 기가 막혀서 혀를 찰 뻔했다. 아니, 왜 또 생각이 그쪽으로 가.

“제가 신경 쓰는 건 저 사람이 아니라 레오나드에요.”

“그럼 내가 어떻게 하든 상관없잖아.”

“상관없지 않아요. 레오나드가 저런 사람한테 시간을 쏟는 게 싫다고요.”

그 말에 레오나드가 잠시 멈칫했다. 처음 말을 꺼냈을 때와 달리 꽤 누그러진 얼굴이었다.

“노력해 볼게.”

아까와 같은 말이었지만 느낌은 상당히 달랐다. 내 입장에서는 그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이걸로 누가 죽지는 않겠어.

안도하며 살짝 옆으로 비켜서자 레오나드가 그 사이로 지나갔다.

딱 봐도 무거워 보이는 남자를 한 손으로 거뜬히 든 레오나드가 다시 뒤를 돌았다.

“금방 올게.”

그 말에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레오나드가 남자를 들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 *

다행히도 밤중에 이 근처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속옷 차림의 남자가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는 말이야 있었지만. 그거야 뭐, 너무 더우면 그럴 수도 있지.

……지금이 잘못하면 얼어 죽을 정도로 추운 겨울이더라도 말이다.

‘죽이지 않은 게 어디야.’

물론 이 겨울에 속옷 차림으로 밖에 내놓은 것부터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뜻인 것 같지만.

‘이 날씨에 밖에서 떨었을 것을 생각하니 조금 불쌍하기는 한데.’

그래도 결과적으로 죽지는 않았잖아.

그러니까 다행이지. 어제는 진짜 누구 하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고.

그럼 내 얼굴이 얼마나 멀쩡해졌나 볼…….

쨍그랑.

“아가씨 무슨 일이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메리가 들어오기 전에 재빨리 바닥에 흩어진 거울 조각을 주우며 외쳤다.

다행히도 메리는 내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뒤 메리가 자신에게 배정된 옆방으로 다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옆방 문이 닫히는 소리에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이다.”

혹시라도 다칠세라 조심스럽게 거울 조각을 줍는 사이 제법 큰 조각에 내 얼굴이 비쳤다.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피딱지가 생긴 오른쪽 뺨이.

‘왜지?’

분명 4년 전에는 독에 닿은 입술도 잘만 나았잖아.

그러니 당연히 이번에도 자고 일어나면 나아 있을 줄 알았는데.

“혹시 몸 상태가 축복에 영향을 미치는 건가?”

그런 거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메리한테 이 모습을 안 보인 게 어디야.

어제 다친 거 보고 울려고 하는 거 신의 축복 때문에 다 나을 거라고 겨우 달랬는데.

‘시간이 지나면 낫겠지, 뭐.’

이렇게까지 장거리로 움직이는 건 처음이니 몸이 못 견뎌서 그런 걸 거야.

찝찝했지만 그냥 그렇게 생각하며 넘겼다.

문제는 메리 몰래 제럴드에게 약을 받으러 가면서 터졌다. 내 상처를 살피던 제럴드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 정도면 흉이 질 것 같은데요.”

“……네?”

흉이 지다니? 겨우 뺨 한 번 맞은 거 가지고?

“손톱에 제대로 긁힌 것 같은데요. 어쩌다 이렇게 되셨습니까?”

“어제 일이 좀 있어서……. 아니, 근데 정말 흉이 지나요? 심하게요?”

“사람 다치는 것만 몇 년째 보고 있는걸요.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남을 겁니다.”

제럴드가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내 손에 약을 꼭 쥐여 주었다.

자기 전에 꼬박꼬박 바르라는 말도 함께 덧붙여서.

‘설마 또 얼굴에 문제가 생길 줄이야.’

……열 받아서 안 되겠다. 가서 그 자식 한 번 더 차 주고 와야…….

“무슨 일이야?”

검은색 바지에 헐렁한 흰색 셔츠를 입은 레오나드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제와 달리 꽤 편한 옷차림이었는데 그마저도 상당히 잘 어울렸다.

“아멜리오 영애가 다친 모양이더라고요. 바를 약을 챙겨주고 있었습니다.”

그 말에 레오나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내 오른쪽 뺨으로 향했다. 내 상처를 살피던 붉은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

……아니,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그러지 마, 제발. 어제 데리고 나갔다가 왔잖아.

이러다 진짜 사람 하나 죽이겠어.

“……그럼 저는 식사 준비가 다 되었나 확인하러 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제럴드가 짐을 챙긴 뒤 방 밖으로 나갔다.

묘하게 나가는 걸음이 빨랐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제럴드도 저 눈빛을 본 것이 틀림이 없었다.

……나도 같이 나가. 진짜 분위기 숨 막혀 죽겠다고.

“……좀 봐 봐.”

내 쪽을 향해 다가온 레오나드가 내 턱을 살짝 들고는 오른쪽 뺨을 살폈다.

상처를 확인한 레오나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다친 것은 나인데 오히려 자기가 더 아픈 거 같은 얼굴이었다.

“밝은 곳에서 보니까 더 심한데…….”

“……그렇긴 하죠?”

걱정 어린 시선을 받는 것이 어쩐지 간질간질한 기분이라 작게 웃었다.

그 웃음에 레오나드의 얼굴은 한층 더 굳었지만.

“지금 웃음이 나와? 그런 놈이 왔으면 날 깨우지 왜 가만히 맞고……. 아니다.”

계속 상처를 살피던 레오나드가 눈을 내리깔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알아서 깼어야…….”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자책이 왜 이렇게 수준급이야.

“제가 일부러 안 깨운 거예요. 그냥 맞고 끝내려고요.”

“뭐? 왜 그런 짓을 해?”

“레오나드가 나서면 일이 커질 것 아니에요. 이제 막 즉위했는데 괜한 일에 휘말리면 안 되잖아요.”

“…….”

“그냥 제가 맞고 끝내는 것이 마음 편해요.”

그리고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저도 마냥 맞기만 한 건 아니라고요.

눈을 찡긋하며 덧붙이자 레오나드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라, 이게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레오나드가 어느 부분에서 한숨을 내쉬는지 모르겠다.

이런 식의 걱정을 받아 봤어야 알지.

“그래, 네 말이 맞아. 시기상 괜한 일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좋지.”

“역시 그렇죠?”

“……이게 괜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지.”

다시금 오른쪽 뺨을 훑는 시선에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저기, 너무 가까운 것 같은데요.

“너는 좀 더 네 몸을 챙길 필요가 있어, 로레이나.”

“저는 지금도 챙기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이렇게 약도 받으러 왔죠.”

몸을 살뜰히 챙기니까 죽지 않으려고 당신 따라서 황궁도 가고 있는 거고. 물론 이건 비밀이지만.

“그런 거 말고 애초부터 다칠 일을 안 만들 수는 없어?”

“저도 다치고 싶어서 다치는 건 아니에요. 그게 더 효율이 높으니까 그냥 내버려 두는…….”

“그게 문제라는 거야. 왜 효율이 높은 게 네 몸보다 우선이야?”

재빨리 내 말을 끊은 레오나드가 짓씹듯이 중얼거렸다.

“제발 네 몸부터 생각해. 다음부터는 이런 일 생기면 차라리 나를 불러.”

“…….”

“알겠어?”

참 이상한 일이다. 레오나드가 한 말은 4년 전 에녹이 내게 했던 말과 같았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역시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왜일까?’

레오나드와 에녹의 생각이 나와 다른 이유는.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제법 설렜을 법한, 로맨스 소설의 한 편을 장식할 장면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한테는 묘한 씁쓸함이 먼저였다.

그것은 사실 내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살아온 방식이 다소 이상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래서, 뭐?’

어떻게든 지금까지 살아왔으니 그것으로 된 거 아닌가.

“……레오나드를 부를 것까지 있을까요? 어차피 신의 축복 때문에 금방 나을 텐데요.”

“……로레이나.”

“그렇잖아요. 조금만 있으면 나을 텐데 무엇 하러 레오나드까지 고생을 시키냐고요. 물론 지금이야 몸 상태가 안 좋아서 낫지 않았지만…….”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

무슨 말인가 싶어 되묻자 내 턱을 감싸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레오나드의 얼굴이 내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아까보다 한참은 낮아진 목소리로 레오나드가 물었다.

“그때 정말로 신의 축복 때문에 나은 거라고 생각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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