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26화 (26/144)

#26화

붉은 눈동자가 나를 꿰뚫기라도 할 것처럼 타올랐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알맞은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들리는 말의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레오나드가 내뿜는 분위기에 압도된 기분이었다.

신의 축복 때문이 아니라니.

그럼 4년 전에 나는 어떻게 멀쩡해졌던 건데.

“……나한테 이 말을 하는 이유가 뭐예요?”

“그냥.”

심호흡하듯 말을 짧게 끊은 레오나드가 다시금 작게 속삭였다.

“내가 4년 전에 어떻게 했었는지를 네가 알면.”

“…….”

“조금은 네 몸을 아껴 줄까, 해서.”

조금만 움직이면 코끝이 닿을 정도까지 와 있던 레오나드가 뒤로 몸을 물렸다.

그 잠깐조차도 나에게는 꽤 느리게 느껴졌다.

“숨 쉬어.”

그 말에 나는 그제야 한 번에 숨을 몰아쉬었다. 언제부터 숨을 참고 있었던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때 입술이 나았던 게 레오나드 때문이었다고?’

레오나드한테 그런 능력이 있었나?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레오나드가 또다시 성큼 다가왔다.

그와 동시에 하고 있던 생각이 또 멎었으나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아, 이 사람 화났구나.

생각해 보면 레오나드는 늘 감정이 제어가 안 될 때 이런 분위기였다.

“로레이나.”

“……네?”

“볼에 있는 상처, 낫게 해 줄까.”

낫게 해 주겠다고? 화내던 도중에 한 말이라 갑작스러웠지만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손해 볼 것 하나 없는 제안이었으니까. 레오나드는 내가 승낙하자마자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내가 원작 속 레오나드의 능력에 대해 떠올렸던 것은.

쪽.

다소 낯선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감촉이 뺨에 느껴졌다.

그것에 놀라 몸을 떨 새도 없이 레오나드가 다시금 다가왔다.

그 뒤로는 볼 위로 자잘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레, 레오나드.”

이상한 기분에 몸을 뒤로 물리며 바르작거리니 레오나드가 손을 뻗어 왔다.

곧 큼지막한 손이 얼굴을 감쌌다. 얼굴이 고정되자 붉은 눈과 시선이 맞닿았다.

“가만히 있어. 치료하는 데 방해돼.”

“아니, 저 그게…….”

“…….”

“간지러워요.”

민망한 기분에 작게 속삭이자 잠시 멍하니 굳어 있던 레오나드가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입술을 내렸다.

아까보다 신경을 쓴 듯 움직임이 꽤 조심스러워진 것이 느껴졌다.

“아프면 말해.”

“……네.”

자연스럽게 대답하다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잠깐. 이거 뭔가 이상한데?

‘왜 갑자기 이런 분위기가 되어 버린 거지?’

레오나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원작에서 레오나드가 셀리아의 손을  입맞춤으로 치료해 주던 장면이 있었으니까.

과연 로맨스 소설다운 설정이라며 감탄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레오나드가 쓸데없이 저런 기운을 내뿜지만 않았어도 더 빨리 떠올렸을 텐데.

그러니 이게 치료의 과정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이건 조금…….’

셀리아한테 할 때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보다는 훨씬 담백했다고.

‘물론 원작이 미완결이라 아직 둘이 맺어지기 전이긴 했지만.’

아니면 원작에서도 이랬는데 글로 잘 표현이 안 되었던 건가?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몇 번째인지 모를 입맞춤이 또 내려앉았다.

레오나드는 여전히 내 얼굴을 감싸고 있는 채였다. 눈꺼풀을 살짝 내리깔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뒤로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다소 민망한 소리만 작게 들려왔다.

치료의 과정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볼에 새살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간지러워.’

그 감각 때문일까 묘한 기분에 발끝이 살짝 오므라들었다.

상처를 따라 고개를 조금씩 움직이는 모습에 어쩐지 숨이 막혔다.

추운 날씨에도 방 안이 꽤 덥다는 느낌이 들 무렵 레오나드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생각보다 길게 난 상처의 끝자락. 내 입술 바로 옆 부분이었다.

“……다 됐어요?”

긴 침묵 끝에 꺼낸 말에 레오나드가 흠칫 몸을 떨었다.

다소 가라앉아 있는 것 같던 눈이 그제야 제빛을 되찾았다.

“……응.”

자다 깨기라도 한 것처럼 갈라진 음성이 귓가에 나직이 와 닿았다.

……왜 그래. 점점 분위기 이상해지잖아.

“거, 거울 좀 주세요! 확인 좀 해 보게.”

다급히 팔을 뻗자 내게서 몸을 떨어뜨린 레오나드가 손거울 하나를 가지고 왔다.

휴, 드디어 숨이 제대로 쉬어지는 느낌이다.

“우와, 정말 깨끗해졌네요?”

피딱지까지 얹어져 있던 볼이 어느새 말끔해져 있었다.

초인적인 힘에다가 이런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니.

‘생명의 신의 영향 때문이겠지.’

괜히 이종족 중에서 드래곤이 가장 귀한 취급을 받는 게 아니라니까.

“그런데 방법이 이거 하나뿐이에요?”

“뭐가?”

“그러니까…….”

어쩐지 부끄러운 마음에 레오나드의 얼굴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조금 전 상황이 있는데 이 정도면 알아듣지 좀.

“그…… 입술 말이에요. 다른 부위를 접촉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다친 곳에 손을 댄다든가…….”

“안 돼.”

레오나드가 딱 잘라 말을 끊었다.

“그러면 효과가 너무 미미해지거든.”

……그런 게 어디 있어!

진짜 말도 안 된다. 솔직히 너무 뻔한 로맨스 소설 설정이잖아.

다친 부위가 뺨이었으니 망정이지 다른 데였으면 어쩔 뻔했어? 입술을 대기에 민망한 부위였으면…….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정신없어서 잊고 있던 기억이 머릿속을 비집고 올라왔다.

그럼 나 4년 전에는 도대체 어떻게…….

“……레오나드.”

“응?”

레오나드가 나른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설마, 아니겠지.

“혹시 예전에 제 입술에 입 맞췄어요?”

꽤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여유롭던 레오나드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흠칫 몸을 떨었다.

누가 봐도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맞구나, 이 자식!

“어떻게 이럴 수가. 도대체 언제…….”

“그게 그러니까…….”

“그날 밤이죠? 입술 다쳤던 날 밤에 방에 찾아왔었잖아요.”

아니, 잠깐만. 그럼 내가 자고 있을 때 그랬다는 거잖아!

뭔가 민망하고 억울한 기분에 고개를 숙인 채 레오나드를 지나쳐 방 밖으로 나왔다.

곧 레오나드도 나를 따라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로레이나.”

“…….”

“로레이나 아멜리오.”

대답 없이 걸어가자 내 이름을 부르던 레오나드가 살짝 허리를 숙이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 과정이 너무 간단해서 더 짜증이 났다.

“혹시 삐졌어?”

“……아니거든요?”

이게 삐진 거로 보여? 내가 어제 한 말 따라 하는 거야, 뭐야.

“미안해. 하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그냥 두기에는 네가 너무 속상해했잖아.”

“……알아요.”

알긴 아는데. 이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걸 어떻게 해.

나도 내 나름의 로망이라는 게 있었단 말이다.

“……처음이었는데.”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리자 내 얼굴을 살피던 레오나드가 슬쩍 몸을 일으켰다.

“아.”

“…….”

“……그렇군.”

……뭐야. 그게 끝이야?

묘하게 떨리는 것 같은 음성에 고개를 드니 레오나드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미처 가리지 못한 부분 탓에 입꼬리가 씩 올라가 있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는 것도 모른 채로.

……지금 그렇게 좋아할 때야? 내 얼굴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드는 거냐고.

“아침 먹고 출발하자. 뭐 먹을…….”

“오늘은 따로 먹어요. 전 메리랑 먹을게요. 금방 내려온다고 했거든요.”

“혼자 먹다가 기억 날아가면 큰일…….”

“헨티슨 공작님과 먹으면 되잖아요. 공작님이 잘 챙겨주실 거예요.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저 지금 같이 밥 먹을 기분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좀 비켜 주시죠.

때마침 테이블을 잡고 앉은 제럴드가 여기라며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여관 주인 바로 앞에 있는 기다란 바 형식의 테이블에 앉았다.

“여기서 제일 잘 나가는 메뉴가 뭔가요?”

“소고기 스테이크입니다만…….”

“그럼 그걸로 두 개 주세요.”

여관 주인만 뚫어지게 보며 음식을 주문했다.

그에 내 옆을 서성이던 레오나드가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슬쩍 살피니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제럴드가 있는 곳으로 가 앉는 것이 보였다.

‘……좀 심했나?’

어찌 되었든 간에 나를 도와주려고 그런 건데.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에 레오나드 쪽을 보고 있으려니 여관 주인이 손짓하며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가씨.”

“네?”

“남자친구분이 저렇게 비는데 이제 화 푸시는 게 어때요?”

응? 내가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거지?

“……남자친구 아닌데요?”

“아, 죄송합니다. 그럼 그 옆에 있는 신사분이신가요? 어쩐지. 아가씨가 머물 방 좀 신경 써 달라고 그러시더라고요.”

“그것도 아니…….”

“아, 네! 지금 갑니다!”

제럴드를 가리키는 말에 부정할 새도 없이 여관 주인이 새로운 주문을 받으러 뛰어갔다.

저기, 그렇게 가시면 제 입장이 상당히 이상해지는데요.

아니나 다를까 옆쪽에 있던 여자 하나가 말을 걸려는 듯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난데없이 여관에서 벌어진 사랑싸움에 관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보아하니 이 여자 말고 다른 테이블 사람도 관심이 있는 것 같고.

미치겠다, 진짜.

“어머, 저분이 애인인가요? 그런데 왜 따로 앉았어요?”

“애인 아니에요.”

“에이, 싸운 건 알겠는데 그렇게 부정하지는 말아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에요. 진짜로요.”

“그렇다고 하기에는 지금도 저렇게 눈치를 보고 계시는걸요. 그냥 마음 풀어요. 나중에 분명히 후회하는 날이 온다고요. 제가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그래요.”

여자의 말에 주변에서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마저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는 건 알겠다만 그만 좀 해 줄 수 없을까? 진짜 창피한데.

“아니, 진짜 아니…….”

“아닙니다.”

조금 흥이 오른 분위기를 가르고 꽤 익숙한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 목소리의 주인이 레오나드라는 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니 그만하시죠.”

신분을 알리고 싶지 않은 듯 평소와 달리 말투가 매우 정중했다.

그 안에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네? 아니라니요?”

이 상황이 흥미로운 듯 여자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동시에 주변이 숨소리도 안 날 만큼 조용해졌다.

……이 사람들이? 이거 드라마 아니거든요.

“제 말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별건 아닙니다. 그냥 무언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아서요.”

“어머, 무엇을요?”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 같은 여자의 얼굴을 보고 있을 때 별안간 어깨에 따스한 온기가 내려앉았다.

정신을 차리니 레오나드가 내 어깨를 감싸 안은 뒤였다.

그 상태로 레오나드가 입을 열었다.

내 옆에 있는 여자의, 아니, 여기 있는 모두의 취향을 저격했을 말을 뱉으면서.

“이 사람, 제 사람입니다.”

레오나드가 그 말을 뱉음과 동시에 주변에서 탄성이 터졌다.

……물론 나는 절대 아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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