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어머, 오해해서 미안해요.”
레오나드의 폭탄선언에 여자가 싱긋 웃으며 사과했다.
시선은 내 어깨 위에 얹어진 레오나드의 손에 향한 채였다.
‘아니, 아직 오해가 안 풀린 것 같은데.’
오해가 풀린 게 아니라 또 다른 오해가 시작된 것 같다고.
이것만으로도 기가 막히는데 레오나드의 대답은 더 가관이었다.
“별말씀을요. 이제라도 오해가 풀렸으니 다행입니다.”
레오나드의 말에 다시금 웃던 여자가 여관 안쪽으로 사라졌다.
지금이라도 붙잡고 오해를 풀어야 하나.
……아니다. 어차피 볼 사람도 아닌데, 뭐. 저 여자보다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문제지.
“제가 왜 레오나드의 사람이에요?”
화가 났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나름 허리에 팔까지 올렸건만, 레오나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심지어 묻는 말에는 대답 안 하고 엉뚱한 말만 해 댔다.
“이제 그 일은 용서해 주는 거야?”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요. 아까 왜 그런 거예요? 사람들이 오해하잖아요.”
“뭐가 문제야?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레오나드가 어깨를 잡고 있던 한쪽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잔뜩 찌푸려져 있는 내 미간을 꾹꾹 눌러 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사람 맞잖아.”
자신이 한 말이 퍽 마음에 든 것인지 레오나드가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웃었다.
그 얼굴에 내가 말문이 막힌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람은 자기 얼굴을 너무 잘 쓴다니까.’
4년 전에 젠이 많이 웃었으면 좋겠다고 빌기는 했지만. 이렇게 쓰라고 그랬던 건 아니었는데.
“카일룸 제국민이라면 모두 다 내 사람이야. 내 백성이니까.”
“그런 식으로 하면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레오나드의 사람이겠네요?”
“그렇지.”
“헨티슨 공작님도 마찬가지고요.”
“물론.”
살짝 입꼬리를 올린 레오나드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것만으로 끝나면 좋을 텐데 레오나드는 거기에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너도.”
……이상하다. 특별한 의미가 담긴 것 같지는 않은데 꼭 내가 진 느낌이었다.
찜찜한 기분에 레오나드를 올려다보는 사이 불쑥 뒤에서 누군가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폐, 폐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레오나드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레오나드에게 가려 보이지 않았던 제럴드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있었던 건지 얼굴이 잔뜩 상기된 채였다.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은 제럴드가 눈물을 쏟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공식적으로 폐하의 사람이라고 말해 주시다니. 저를 그 정도로 생각하시는 줄 몰랐는데…….”
그 누구보다 레오나드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제럴드 헨티슨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도대체 제럴드의 평소 취급이 어떻게 되는 거지?
“아멜리오 영애, 방금 제가 들은 말이 헛것은 아니겠죠?”
믿을 수 없다는 듯 제럴드가 나에게 물었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습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저렇게 좋은가.
“제대로 들으신 것 맞아요.”
“아멜리오 영애와 제가 똑같이 폐하의 사람이라고 하신 거 맞죠?”
“네, 맞아요.”
못 믿는 눈치인 것 같아서 레오나드의 옆구리를 살짝 치며 동의를 구했다.
“그렇죠?”
잠시 말이 없던 레오나드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나를 한 번, 그리고 제럴드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보던 레오나드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똑같이라.”
왠지 뒤에 어떤 말이 나올지 알 것만 같아서 레오나드의 발을 살짝 밟았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다.
“윽…….”
곧 원망스러운 기색을 담은 눈빛이 나를 향했다. 레오나드가 내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아닌 것을 맞다고 할 수는 없잖아.”
“때로는 그런 거짓말도 필요한 거라고요.”
“굳이 그런 거짓말이 왜 필요한데?”
“그거야 당연하죠. 공작님이 속상해하잖아요. 신경 안 쓰여요?”
그 말에 살짝 뾰로통한 표정을 한 레오나드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지금 이 상황이 상당히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이었다.
“난 제럴드보다 네가 더 신경 쓰이는데.”
……뭐지, 저 솔직함은. 레오나드가 원래 저런 성격이었나?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원작에서 레오나드가 저런 대사를 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철벽을 엄청 쳤지.’
남자 주인공이 철벽을 치는 게 뭐가 문제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크루시아>를 읽기 전, 작품 후기만 봤던 나도 똑같이 말했거든.
여자 주인공을 제외한 여자들을 쳐 내는 것이 로맨스 소설 남자 주인공의 기본 중 기본이잖아.
‘그러니 더더욱 문제일 수밖에 없지.’
레오나드의 철벽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여자 주인공인 셀리아였으니 말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엄청 경계했었던 것 같은데.’
물론 셀리아가 저주의 영향을 받는 ‘인간’이기에 어느 정도 이해는 되었다.
얼굴도 안 보이는 사람이 갑자기 찾아와서 네 저주를 풀어주겠다고 하면 당연히 수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어?
‘그 경계하는 구간이 로맨스 소설치고는 지나치게 길었던 점이 문제긴 하지만.’
그런 면에서 로레이나가 하프 엘프인 것은 진짜 천운이었다.
누가 알았겠어. 그런 말장난으로 저주를 피해 갈 줄은.
“로레이나.”
아까부터 뭔가를 고민하는 것 같던 레오나드가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
“만약에 네 말대로 똑같다고 말하면.”
“말하면?”
“이제 밥 같이 먹어 주는 건가.”
눈을 맞춰 오며 묻는 말에 나는 결국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와중에도 레오나드는 같이 먹어 줄 거냐며 되물었다.
내가 못 살아.
* * *
마차는 별 탈 없이 수도를 향해 올라갔다. 수도로 올라가는 길은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지난 6년간 크루시아 축제를 제외하고는 일절 영지 밖으로 나가지 않아서 온통 처음 보는 것투성이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보니까 나 완전 라푼젤 아니야? 물론 스스로 감금되었다는 점에서 좀 다르긴 하지만.
‘수도로 올라가면 또 황궁에만 있을 테니 마찬가지이려나.’
거기 가면 정말로 레오나드 옆에 붙어 있어야 할 테니까.
어차피 만날 사람도 없으니 상관없…….
아, 맞다. 에녹이 있었지.
“레오나드.”
“응?”
“저번에 제가 보낸 편지 어떻게 했어요? 황제…… 아니, 데프론 공작님께 보냈어요?”
이름을 입 밖으로 뱉으면서도 어색했다. 데프론 공작가라니.
설마 피 한 방울 흘리는 일 없이 황위 교체가 이루어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그게 진짜 가능한 일이라는 것도.
“……그건 왜?”
“이제 곧 수도로 들어가잖아요. 혹시 만나 뵙게 될지도 모르니까 편지의 행방 정도는 알아 두어야죠.”
별생각 없이 던진 말에 레오나드가 대답 없이 시선을 먼 곳에 두었다.
‘왜 저러지?’
혹시 몰라 아무런 말 없이 대답을 기다려 보았으나 레오나드는 입을 열지 않았다.
긴 침묵 끝에 내 말에 대답했던 것은 레오나드가 아닌 제럴드였다.
“하하……, 기억이 안 나시나 봅니다.”
“아……, 그래요?”
나랑 관련된 거는 다 기억하는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가?
기준이 너무 모호하네.
“아마 데프론 공작에게 전해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것까지 신경 쓸 정신이 없었거든요.”
“그럼 데프론 공작님은 답장을 못 받으신 상태겠네요?”
“생각해 보니 그렇겠군요. 미리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정신없으셨을 텐데요. 어차피 거절할 생각이었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고개를 숙이는 제럴드를 향해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답장 좀 안 했다고 데프론 공작이 찾아오는 것도 아니니까.
이런 것 때문에 찾아오는 거였으면 아멜리오 백작가 영지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을 거라고.
‘어차피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길버트에게 편지를 쓸 생각이었으니 그때 같이 쓰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수도로 들어가는 성문을 통과했다.
그랬기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진짜로 답장 안 썼다고 나를 찾아오는 인간이 있을 거라고는.
* * *
성문을 통과하자마자 잘 달리던 마차가 천천히 속도를 늦추었다.
‘아직 황궁까지는 거리가 꽤 남았는데?’
의아한 마음에 레오나드를 힐끗 보았으나 그 역시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마차가 완전히 멈추자 창밖을 살피던 레오나드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무슨 일이지?”
“그것이…….”
말끝을 흐리는 마부의 뒤로 웬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레오나드의 얼굴을 확인한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큰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기사들이 한 인사에 레오나드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황제 폐하라는 말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오, 저러니까 조금 황제 같은데?
“마차를 막은 것이 자네들인가?”
“죄송합니다. 황제 폐하의 마차인 줄 모르고…….”
“그럼 누구 마차인 줄 알았다는 거지?”
레오나드가 감정을 제어하기 어려울 때 으레 그러했듯 이번에도 서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 압박감에 기사들이 몸을 떨었다. 바로 기절하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였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다리가 떨리고 얼굴도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라? 뭔가 익숙한 얼굴들인데?
“……혹시 에녹…….”
불쑥 떠오른 예전 기억에 무심코 이름을 내뱉었다.
그러자 레오나드의 앞에서 벌벌 떨던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 쪽으로 쏠렸다.
아, 맞다. 마차 문 열려 있었지.
“……로레이나 아가씨?”
기사들의 입에서 나온 내 이름에 레오나드가 흠칫 몸을 떨었다.
곧 의문스러운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생각해 보니 레오나드는 못 알아보겠구나.
“4년 전에 에녹과 같이 아멜리오 백작가에 왔었던 기사들이에요.”
마차에서 내리며 레오나드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기사들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온 이상 나도 마차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게 되었으니까.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4년 만이죠?”
“저희를 기억하고 계시다니!”
기사들이 일제히 입을 막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중간에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했다.
“어쩜 마음도 이리 따뜻하신지!”
……딱히 기억하기 위해 노력한 건 아닌데. 기억력이 좋아서 잊어버릴 수가 없어서 그런 거지.
하지만 지금 말해봤자 별 소용없어 보였다. 굳이 말할 필요 없기도 하고.
“아가씨, 혹시 데프론 공작가에 잠시만 같이 가 주실 수 있으십니까?”
“네? 데프론 공작가요?”
갑자기 거기를 왜?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뵙기를 원하십니다. 편지 이야기를 하면 아마 아실 거라고…….”
……맙소사. 설마 답장 안 했다고 기사들까지 보낼 줄이야.
내가 수도에 올라온 건 또 어떻게 알았대?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아가씨. 죄송하지만 저희랑 같이…….”
“싫은데.”
말을 끊고 들려온 대답에 기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하게도 대답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아까부터 내 옆쪽에서 싸늘한 얼굴로 기사들을 바라보고 있는 레오나드였지.
마차에 몸을 기댄 레오나드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뭘 가만히 쳐다보고 있지? 말했잖아.”
웃는 기색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얼굴로.
“안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