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나는 레오나드와 함께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집무실에서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제럴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거봐. 내가 그랬잖아.’
저러고 있을 것 같았다니까.
높게 쌓여 있는 서류들을 보아하니 어떤 심정인지 충분히 이해되었다.
“……이제 오신 겁니까?”
제럴드가 아까보다 훨씬 밝아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에 레오나드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서류 더미 속에서 울고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 한 모양이었다.
“……그럼 저는 아멜리오 영애, 아니 아멜리오 백작에게 지낼 방을 안내하고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알려주겠습니다…….”
“……그래.”
자리에서 일어난 제럴드가 나에게로 비척비척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까 좀비가 따로 없네.
“가시죠, 백작. 앞으로 머물 방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제럴드는 쓰러질 듯한 걸음으로 나를 안내했다.
이윽고 도착한 방은 내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침대는 내가 한참을 굴러도 떨어지지 않을 만큼 컸고 그 위로는 하얀 레이스가 달린 캐노피가 길게 내려와 있었다.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정도만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바닥에 깔린 카펫 하며 벽에 걸린 그림들, 그리고 곳곳에 새겨진 장식들까지 전부 비싸 보이는 것들뿐이었다.
동화 속 공주님이나 황녀님 방을 직접 눈으로 본다면 이런 느낌이려나.
“여기 제가 혼자 쓰는 방 맞나요?”
일기장에게 주어진 방치고는 너무 화려한 것 같은데.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기도 민망할 정도라고.
“예. 아멜리오 백작이 혼자 쓰는 방이 맞습니다. 본래 황녀님이나 황자님께서 쓰시던 방이라 지내기에 불편함은 없으실 겁니다.”
오늘 날씨를 이야기하듯 태연한 말투에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잠시 멈칫했다.
맙소사. 진짜 황녀님 방이었어? 너무 부담스럽잖아!
“저 그냥 다른 방 써도…….”
“폐하께서 백작이 이 방이 싫다고 하면 폐하의 옆방으로 안내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할까요?”
“……아니요!”
죄송합니다. 그냥 입 다물고 쓸게요.
“그럼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제럴드가 차분히 말을 시작했다. 내가 할 일은 많지 않았다.
레오나드가 즉위하고 처음 열리는 회의 날까지 참석하는 귀족들의 얼굴을 다 외우는 것.
귀족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레오나드를 위해 내가 옆에서 알려주어야 하니까.
이전에 제럴드가 나에게 부탁했던 일기장으로써의 역할도 물론 해내야 하고.
“그런데 회의 중에 레오…… 아니 폐하께 어떻게 알려 드리나요?”
무심코 이름으로 부르려다가 말을 바꿨다. 아직까지 입에 잘 붙지 않아서 탈이었다.
이러다가 회의하는 날까지 레오나드라고 부르겠어.
“글쎄요. 그건 아직…….”
“그럼 그것까지 같이 생각해 봐야겠네요.”
레오나드에게 회의 중에 어떻게 알려줄 수 있을까.
그냥 대놓고 말해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너무 반복되면 귀족들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몰라.’
그럼 어떡하지? 종이에 몰래 써서 건네주기라도 해야 하나.
“귀족들 얼굴은 어떻게 하면 볼 수 있나요?”
“도서관에 주요 귀족들의 얼굴이 담긴 자료가 있습니다.”
오, 따로 자료들까지 있다는 말이야? 인원이 꽤 될 텐데 굉장하네.
“혹시 황궁 도서관에 다른 귀족들도 출입이 가능한가요?”
“예, 백작 이상의 작위를 가진 귀족은 가능합니다.”
잠깐만. 그러면 조금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내가 거기 있을 때 다른 귀족들이 들어오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만약에 누군가를 마주치게 되면 저를 뭐라고 소개하는 게 좋을까요?”
사실 황궁에서의 내 위치는 상당히 애매했다.
레오나드의 저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야 그러려니 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잖아.
‘게다가 내가 황궁에서 지낸다는 사실을 레오나드가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이고.’
제럴드는 그 부분까지 생각 못 했다는 듯 뭔가 깊게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이렇게까지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을 보니 실감이 났다.
내가 보낸 편지 보고 바로 내려왔다고 하더니 정말이었구나.
“그 문제는 제가 폐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회의할 때도 폐하의 가까이 앉아야 하니 비서관 정도가 어떻겠습니까?”
“저는 괜찮아요.”
일기장에서 비서관이라니. 파급 승진이네.
그래 봤자 하는 일이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럼 오늘 도서관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폐하의 비서관이라고 소개하면 될까요? 아직 공식적인 발표 전이라 걱정이 되어서…….”
“아, 그 부분은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방에 무슨 문제는 없는지 잠시 훑어보던 제럴드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도서관에서 사람을 만날 일이 없을 테니까요. 사서를 제외하고는.”
그게 무슨 소리지?
“귀족들의 황궁 도서관 출입을 막기라도 하는 건가요? 그럴 필요까지는…….”
“아니요? 황궁 도서관은 정상적으로 운영됩니다.”
제럴드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보았다.
“아, 혹시 폐하께 아무런 말씀도 듣지 못했습니까?”
“네? 무슨 말이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자 제럴드가 이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야. 왜 그러는데. 나는 또 왜 이렇게 불안한 거고.
“아멜리오 백작이 갈 도서관은 백작의 전용 도서관입니다.”
“황궁 도서관이 아니라.”
순간 머릿속에서 뎅-뎅- 하고 종소리가 울리는 기분이었다.
뭐, 뭐라고?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내 전용 도서관이라니?
“백작을 위한 도서관이니 당연히 다른 사람을 마주칠 일이 없지요. 백작을 제외한 사람들은 출입 금지니까요.”
“…….”
“백작의 전용 도서관을 만드는 건 예전부터 계획되어 있던 일입니다. 백작을 데리러 가는 시기가 앞당겨져서 일정을 맞추느라 엄청 힘들긴 했지만.”
“…….”
“백작이 책을 좋아한다고 해서 폐하께서 특별히 지시하신 일인데.”
잠시 말을 멈춘 제럴드가 내 얼굴을 살피더니 작게 헛기침을 했다.
“……아무래도 듣지 못한 것 같군요.”
그 뒤로도 제럴드가 뭐라고 하는 것 같았으나 잘 들리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지난날의 기억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젠, 아니, 레오나드를 아멜리오 백작가로 데려오던 첫날. 마차 안에서 그와 했던 대화가.
‘그럼 뭘 좋아하는데?’
‘음……, 책?’
그리고 그걸 노트에 받아 적던 레오나드의 모습까지.
……미치겠네. 설마 그때 한 말 때문에 이런 사태가 벌어진 건가.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불안감이 더 증폭되었다.
레오나드 노트에 또 어떤 게 적혀 있었더라?
* * *
일단 나는 나에게 준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다.
생각보다 큰 도서관의 규모에 압도당할 뻔하긴 했지만, 마음을 잘 다독여서 어찌어찌 넘겼다.
……그래, 레오나드는 남자 주인공이다. 게다가 무려 카일룸 제국의 황제인데 그럴 수도 있지.
황궁 도서관보다 내 전용 도서관이 더 크다는 말을 들었지만 내 나름 인정할 수 있는 범위 내였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식사를 끝내고 난 뒤 레오나드가 내민 디저트 하나로 시작되었다.
“이, 이게 뭐예요?”
“뭐긴 뭐야. 디저트지.”
레오나드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웃었다.
내 앞으로 내민 기다랗고 큰 접시에서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너무 맛있어 보여서 후광이 비쳤다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로.
……이게 디저트라고? 제국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보물 몇 호 같은 게 아니라?
“어때?”
“예, 예뻐요.”
“그치? 어서 먹어.”
작게 손짓하는 레오나드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홀린 듯, 한 스푼을 떠서 입에 넣었다.
입안에서 부드러운 식감과 바삭한 식감이 한데 어우러졌다.
맨 밑에 깔린 부분은 시폰 케이크인 것 같았다. 그 위에는 아이스크림이었는데 바나나 맛이 살짝 났고. 바나나를 튀긴 건가?
안에 들어간 재료를 분석하던 것은 디저트를 먹다 보니 점점 잊혔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것이, 왜 레오나드가 저렇게 자신만만해하는지 알 것 같았으니까.
“너무 맛있어요. 어디서 난 거예요?”
“황궁 주방장 특제 디저트야. 내가 특별히 부탁했지.”
내가 먹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던 레오나드가 그제야 디저트를 먹기 위해 손을 들었다.
“고마워요. 제가 여태까지 먹은 디저트 중에 제일 맛있어요.”
“히르첸 왕국 것보다 더?”
은근슬쩍 묻는 목소리에 나는 먹느라 빠르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레오나드가 여유롭게 웃으며 나를 보는 것이 보였다.
……이게 목적이었군. 어쩐지 갑자기 이상하다 했다.
속이 빤히 보이는 질문이었지만 그때 에녹이 준 것보다 맛있었던 건 사실이었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나저나 진짜 맛있네.
“혹시 하나 더 먹을 수 있어요?”
“물론이지.”
레오나드가 아까보다 훨씬 뿌듯해진 얼굴로 웃으며 옆에 서 있던 주방장을 향해 작게 손짓했다.
잠시 뒤 내 앞으로 두 번째 접시가 배달되었다. 아, 설렌다.
“그나저나 이 위에 반짝거리는 건 뭐예요? 설탕 가루 같은 건가?”
“금가루야.”
“아하. 금가루구나. 어쩐지 엄청나게 반짝거린다 싶었…….”
아무렇지 않게 말을 잇다가 잠시 멈칫했다.
……응? 지금 뭔가 들리지 말아야 할 것이 들린 것 같은데?
“……방금 뭐라고 했어요?”
“금가루라고. 그 위에 뿌려진 거.”
“금이요? 장신구 만들 때도 쓰이는 그 금?”
“응. 왜 그래? 혹시 금가루가 몸에 안 받는 체질이야?”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럼 맛없어?”
레오나드의 말에 옆에서 눈치를 보던 주방장이 냉큼 달려왔다.
“맛없으시다면 다시 해 오겠습니다. 더 맛있는 것을 해 드리고 싶어도 이만한 디저트가 없거든요. 식용 금가루를 더 곱게 갈아서 뿌려 놓은 겁니다. 순도 100%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주방장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달랬다.
주방장의 입에서 얼핏 들어본 갖가지 비싼 식자재들의 이름이 쏟아져 나왔다.
그 모습에 나는 점차 웃음을 잃어 갔다.
달칵.
갑작스러운 충격에 손에서 숟가락이 떨어졌다.
‘……아까 보니까 내용물이 정확히 뭔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많이 뿌려져 있던데.’
깔끔하게 빈 첫 번째 접시를 바라보는데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잠깐 사이에 내 뱃속으로 얼마어치가 사라진 거지?
내가 한 달 동안 먹은 디저트 값을 합해도 이거 하나 값도 안 나올 것 같은데.
혹시 디저트로 국고를 거덜 내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사이 레오나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접시 위에 떨어뜨린 숟가락을 주웠다.
“어쨌든 디저트가 맛없는 건 아니라는 거지?”
“……당연하죠.”
오히려 너무 맛있어서 문제지. 잠깐만…….
……나중에 이 맛을 못 잊어서 이 디저트 또 달라고 하면 어떡하지? 진짜 국고 거덜 대는 거 아니야?
“로레이나.”
아까보다 한층 짙어진 미소를 지은 레오나드가 숟가락을 다시금 내 손에 꼭 쥐여 주며 물었다.
“나한테는 뭐 해 줄 거 없어?”
“네? 뭘요?”
“이 디저트가 더 맛있다며.”
조용히 덧붙인 말에 4년 전 일을 떠올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녹에게 이름을 부르는 것을 허락했던 날 말이다.
젠장. 이러려고 나한테 이거 준 거지!
‘그러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줄 줄 알고?’
어차피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무시하면 그만이다. 이런 디저트 정도야 얼마든지 무시할 수…….
“응? 로레이나.”
……없다. 망할. 저걸 어떻게 무시해.
“뭘 원하는데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자 바라던 것을 얻었다는 양 레오나드가 방긋 웃었다.
“나중에 내 소원 하나 더 들어줘.”
그날 레오나드는 소원을 하나 더 적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