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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33화 (33/144)

#33화

“아, 다 끝났다.”

기지개를 켜며 보기만 해도 잠이 쏟아질 것 같이 두꺼운 책을 덮었다.

혹시라도 잊어버릴까 봐 며칠 동안 눈이 빠지도록 본 책이었다.

도대체 이 수도 안에 귀족들이 왜 그리도 많은지.

지방에 있는 귀족들까지 다 보아야 했더라면 큰일 날 뻔했네.

‘내 기억력이 기가 막히게 좋아서 망정이지. 아니었더라면…….’

그럼 눈그늘이 턱까지 내려왔을……. 아니야. 그만 상상하자. 너무 끔찍하잖아.

잠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래도 이제 조금 쉴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회의에 참석하는 귀족들 얼굴 까먹지는 않겠지.’

그나저나 이걸 회의 중에 레오나드에게 어떻게 알려주지? 도대체 그 많은 사람을 피해서 알려줄 방법이 뭐가 있냐는 말이다.

‘역시 종이에 써 주는 것밖에 답이 없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데 목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고개를 살짝 내리니 목 부분에서 묶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모자의 끈이 느슨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으으, 어쩐지 춥더라.’

제대로 쓰기 위해 살짝 모자를 벗는데,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어왔다.

그와 동시에 내 손에 간당간당하게 들려있던 모자가 하늘 위로 붕 떠올랐다.

“아…….”

어찌나 빨리 날아가는지, 미처 잡을 새도 없었다.

꽤 멀리 날아가는 모자를 멍하니 보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모자를 잡기 위해 뛰었다.

‘내가 이래서 겨울이 싫어!’

다른 모자 같으면 그냥 내버려 두었겠으나 저건 메리가 만들어 준 거여서 그럴 수가 없었다.

옆에서 만드는 과정을 다 지켜봤는데 저걸 어떻게 그냥 버려.

‘예전에 찻잔 깨뜨렸을 때도 엄청 뭐라고 했는데 이번에 잃어버리면 진짜 큰일 난다고.’

그렇게 모자가 날아간 방향을 따라 걷다 보니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다.

저번에 제럴드한테 이쪽은 황궁 도서관 가는 길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코너를 돌자마자 황궁 도서관 앞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도서관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손에는 내 모자가 들려 있었다.

‘누구지?’

꽤 멀리 있었던 탓에 잘 보이지 않아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가까워지는 내 발소리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에 나는 피할 새도 없이 남자와 눈을 마주하게 되었다.

잠시 놀라는 기색이던 맑은 녹색 눈이 나를 담자마자 부드럽게 휘어졌다.

“로레이나.”

“에녹?”

“예, 접니다.”

내 부름에 잠시 푸스스 웃던 에녹이 이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 모습에 며칠 전 에녹이 내게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럼 나중에 제가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그때는 저한테도 와 줄 겁니까?’

어딘지 모르게 애끓는 것 같았던 음성도 함께.

아직 그때 일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기 어려운데. 심지어 레오나드 때문에 제대로 대답도 못 했잖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말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면 더 어색해질 테니까. 일단 뭐라도 말을 꺼내는 게 낫지.

“여기는 무슨 일로…….”

하지만 애써 꺼낸 말은 얼마 안 가서 바로 가로막혀 버리고 말았다.

“잠시…….”

살짝 말끝을 흐린 에녹이 모자를 든 채로 훅 다가왔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놀라 가만히 있으려니 곧 내 머리 위에 모자가 씌워졌다.

허리를 살짝 굽혀 목 부분의 리본을 잡은 에녹이 눈꺼풀을 살짝 내리깐 채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매우 집중하고 있는 모양새라 그 후에도 좀처럼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다 되었어요.”

에녹은 목 부분의 리본을 완벽하게 묶어 준 뒤에야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모자를 쓴 내 모습을 살피는 것이, 매우 뿌듯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전에 꽤 슬퍼 보였던 모습은 전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에녹의 뒤로 보이는 황궁의 광경이 그와 너무 잘 어울려 보여서.

그리고 이제는 그의 것이 아닌 것들에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이런 나를 눈치챈 것처럼 에녹이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얼굴인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아무렇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사실, 이미 짐작하고 있었거든요.”

“…….”

“언젠가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심호흡하듯 잠시 말을 끊은 에녹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제가 예전에 해 주었던 이야기 기억합니까?”

“나라를 구한 용사 이야기 말씀하시는 거죠?”

“네, 맞아요.”

에녹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당신이 제게 해 준 말이 있었죠.”

왜 지금 에녹이 이 말을 꺼내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어쩐지 그때 표정이 심상치 않다 싶더라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딱 느낌이 왔습니다. 제가 지금껏 잘못된 인생을 살았다는 걸.”

“…….”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을 왜 그리 들리는 대로만 믿고 살았을까요.”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나도 모르게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를 후회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결론은 같았으니까.

‘애초에 누가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겠냐고.’

나야 원작의 내용을 다 알고 있으니까 그런 거지. 그러니 에녹이 그랬던 거야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에녹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내 말을 듣자마자 다시 눈꼬리가 슬프게 늘어졌던 것을 보면.

“당신이라면 그렇게 말해 줄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토록…….”

거기까지 말하던 에녹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조차도 매우 자조적인 웃음이라 문제였지만.

“저는 괜찮으니 그냥 옛날처럼 대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한때 황태자였다가 밀려난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

“아멜리오 백작가 영지에 반년 동안 놀다가 간, 평범한 사람 에녹 데프론으로.”

“……평범하다고 하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지 않나요? 거울은 보고 사시는 거죠?”

겨우 던진 우스갯소리에 그제야 에녹이 꽤 밝은 웃음을 띠었다.

그래, 당신은 그런 얼굴이 어울려.

나 때문에 보기만 해도 슬퍼지는 미소를 짓는 것보다는.

“그런데 여기는 왜 오셨어요? 황궁 도서관에 볼일이 있으셨나요?”

“원래는 그랬어요. 300년 전 데프론 공작가에 대한 정보가 필요한데 공작가에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서.”

‘300년 전?’

‘300’이라는 숫자가 매우 거슬리기는 했지만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에녹의 입에서는 내가 생각했던 질문이 흘러나왔다.

“……로레이나, 혹시 저번에 제가 했던 말 기억합니까?”

……물론이다. 안 그래도 만나자마자 그 이야기 물을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고.

‘아직 뭐라고 답하면 좋을지 생각하지 못했는데.’

솔직히 말해 에녹이 왜 그렇게 나에게 큰 애정을 갖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내게 확신을 주기에 너무 부족했다.

조건 없는 마음은 너무 버겁고 두려우니까.

그런 실체 없는 감정은 언제 어디로 사라질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서 절로 뒷걸음치게끔 했다.

그러니 애초에 받지 않는 편이 편했다.

물론 내가 그걸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못난 인간이었다는 게 더 문제겠지만.

“저, 에녹…….”

“알고 있습니다.”

“…….”

“제가 당신에게 확신을 주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생각을 읽힌 기분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에녹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웃었다.

“당장 답을 달라는 것이 아니에요.”

얼굴에 띤 웃음기를 유지한 채로 에녹이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윽고 그의 오른손에 들려있었던 것은 웬 잎사귀였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에녹을 처음 만난 날도 보았던 그 초록빛.

내 손을 조심스럽게 들어 그것을 쥐여 준 에녹이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웃었다.

“그날 당신이 제게 알려준 이 뜻이.”

“…….”

“제 마음과 같다는 것만 알아 달라는 겁니다.”

이 이상 내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도록.

* * *

레오나드는 로레이나의 손을 잡는 에녹의 얼굴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대화를 하길래 저렇게 좋아 죽겠다는 감정이 흘러넘치는 걸까.

무슨 대화를 하는지 궁금했으나, 그것까지는 레오나드가 서 있는 곳까지 들리지 않았다.

흔히 볼 수 없는 머리카락 색과 제법 반가워하는 로레이나의 얼굴에 상대가 에녹이라는 사실만 알 수 있었을 뿐.

로레이나가 도서관으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 온 것이었는데 설마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거슬려.’

사실, 4년 전부터 에녹 데프론은 마음에 안 드는 것투성이였다.

로레이나의 입술이 잘못될 뻔했던 것부터 며칠 전 데프론 공작가에서 목숨을 위협받았던 것까지 전부 에녹과 관련이 있지 않았는가.

로레이나와 같이 보냈던 기사에게 내용을 전해 들었을 때는 그대로 공작가로 날아갈 뻔했다.

“감히 누구한테…….”

역시 그냥 그때 없애버릴 걸 그랬나.

아이작과 처음 마주했던 날을 떠올리며 중얼거리던 레오나드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이작 데프론을 처리하는 건 확실한 증거를 잡고 난 후에 해도 늦지 않다. 그렇게 하는 편이 좋았다.

지금도 계속 공작가를 주시하고 있고, 아이작이 그 성격에 가만히 있을 리 없으니 곧 뭔가를 준비하겠지.

그때가 되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눈앞에서 치워버릴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럼 좀 편해지겠군.’

에녹의 모습에서 잠시 데프론 공작의 모습을 찾던 레오나드의 시선이 로레이나에게로 옮겨 갔다.

로레이나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살짝 웃어 주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레오나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며칠 전에 그런 일을 당하고도 뭐가 좋다고 웃어 주는 걸까.

저 미소가 나만을 향했으면 좋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한 레오나드가 놀라 흠칫 몸을 떨었다.

‘……지금 무슨…….’

큰일이었다. 저 푸른 눈이 오로지 자신만 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안 된다고 마음을 다잡는 와중에도 그러한 욕망은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났다.

아무리 밟히고 뽑혀도 끝도 없이 자라나는 잡초처럼.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늘 자신을 꼭 안아 주었으면. 떠나지 말고 자신의 옆에 언제나 함께 있어 주었으면.

온통 로레이나에 대한 것으로 채워져 있는 자신의 머릿속처럼 로레이나 또한 그러했으면.

처음에는 그저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려고 했는데, 바라는 것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정말 고백이라도 하게 될지도 모르지.’

당장이라도 저 사이를 가르고 로레이나에게 말하고 싶었다.

세상 누구보다 많이 아끼고 좋아하고 있노라고.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것은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언젠가 로레이나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섣불리 고백했다가 로레이나가 떠나기라도 한다면…….

레오나드는 숨이 막혀 오는 기분에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자꾸만 소원에 집착하는 것도 그래서였다. 그런 것으로라도 나중에 로레이나를 붙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저주를 풀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상냥한 로레이나는 자신의 옆에 있어 줄 텐데.

다시금 로레이나가 있는 쪽을 힐끗 본 레오나드는 에녹이 자리를 떠나는 모습에 천천히 자리를 옮겼다.

레오나드의 마음속에서 3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품어 왔던 소망이 흔들리고 있었다.

저주를 풀고 싶다는, 단 하나의 바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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