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나는 레오나드의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 뜸을 들이는 모습에 뭔가 불안해졌다.
‘괜히 알겠다고 그랬나?’
며칠 동안 계속 머리 아프게 고민하던 것이 해결되어 기쁜 마음에 허락한 것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조금 걱정이 되었다. 진짜 말도 안 되는 거 요구하면 어떻게 하지?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해 주겠다는 조건을 달아두기는 했지만.’
그것도 내 기준과 레오나드의 기준이 다르면 말짱 도루묵이잖아.
나는 어쩐지 긴장되는 마음에 레오나드의 입만 빤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던 레오나드가 입가에 미소를 띠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일단 보류.”
“네?”
“지금은 말고 나중에 내가 원하는 거 한 가지 들어줘. 소원 하나 더 적립하는 거야.”
“……나중에 언제요?”
뭐지? 지금 당장 원하는 게 있는 것처럼 굴더니.
“그건 모르겠어.”
“…….”
“단, 지금은 조금 빠른 거 같아서 말이야.”
말을 마친 레오나드가 다시 한번 웃었다. 내 허리를 잡은 채로 부드럽게 웃는 모습이 눈에 새겨졌다.
나를 바라보는 두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아멜리오 백작가에서 다시 만났던 그 날처럼.
그 시선에 나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뭐가 지금은 빠른데요?”
“알고 싶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뻔했던 나는 순간 든 생각에 얼른 고개를 멈추었다.
왠지 물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강력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레오나드가 입꼬리를 올리며 살짝 미소 지었다.
그 웃음에 깃든 애정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지금 레오나드의 행동은 뭐랄까…….
‘꼭 나를 좋아하는 것 같잖아.’
물로 레오나드가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쯤이야 이미 알고 있었다.
저주에 걸린 레오나드에게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선명하게 보이는 이는 나뿐일 테니까.
‘그러니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는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대우를 받다 보면 정말 착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레오나드가 다른 의미로 나를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세상에. 나, 미쳤나 봐.
‘남자 주인공이 뭐가 부족해서 나를?’
에녹한테 고백받고 나니 아무래도 쓸데없는 자신감이 생긴 모양이었다.
‘정신 차리자.’
쓸데없는 생각 말고 어떻게 하면 데드 엔딩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나 생각해.
‘어차피 내가 하프 엘프가 아니었더라면 그냥 스치듯 지나쳤을 사람이야.’
그리고 레오나드한테는 이미 정해진 짝이 있잖아? 그것도 레오나드한테 꼭 맞춘 것처럼 어울리는 여자 주인공이.
셀리아가 아니면 저주도 풀지 못할 테니 레오나드는 꼭 셀리아랑 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마음을 다독이고 나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레오나드와 나는 굳이 말하면 친한 직장 동료 같은 사이지.
“그럼 다시 가 볼까?”
다시 나를 업어주려는 듯 레오나드가 내게 등을 보이고 앉았다. 눈앞에 넓고 듬직한 등이 보였다.
아까는 아무런 생각 없이 잘만 업혔던 등이었는데…….
‘왜 이제 와 쑥스러운 거지?’
이상한 기분에 그냥 걸어갈까 잠시 생각했지만 나는 결국 중심을 못 잡고 레오나드의 등에 철퍼덕 엎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나를 업은 레오나드가 다시 걸음을 옮기는 것이 느껴졌다.
나를 배려하는 듯 아까보다 훨씬 느려진 발걸음에 어쩐지 심장이 간질거렸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생소한 느낌에 괜히 투덜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중에라도 이상한 거는 안 들어줄 거예요. 뭐든 간에 제가 허락하지 않은 일은 하면 안 돼요.”
“그 말은 허락만 하면 괜찮다는 뜻이지?”
“……그렇죠?”
“그럼 열심히 허락하도록 만들어야겠네.”
나를 업은 자세를 잠시 고치던 레오나드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불안함이 가득 느껴지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으려던 찰나, 앞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레오나드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레오나드가 누군지 파악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보였다.
‘그냥 내가 말해 주는 게 낫겠네.’
시간이 지체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고개를 든 순간, 그 생각은 곧 사라졌다.
레오나드를 부른 이는 나에게도 어느 정도 익숙한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헨티슨 영애!”
업혀 있는 것이 나인 줄 몰랐던 것인지 다이아나의 두 눈이 커졌다.
“……아멜리오 영애?”
꽤 먼 거리에 있던 다이아나가 나를 보고는 한걸음에 달려왔다.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가득했다.
다이아나가 반가웠던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마주 웃어 주었다.
안 그래도 언제쯤 다이아나의 칵테일을 먹을 수 있냐고 제럴드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너무 오랜만이네요, 헨티슨 영애. 잘 지냈어요?”
“저야 잘 지냈죠. 아멜리오 영애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요즘 아주 떠들썩하던데요?”
“하하……. 어쩌다 보니.”
요즘 일이 많기는 했지. 황태자비가 될 뻔했던 사건부터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데프론 공작저로 끌려가다시피 하기까지.
그리고 지금은 레오나드의 비서관이 되기까지 했고. 짧은 새에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마침 잘 되었어요. 저 아멜리오 영애를 만나러 온 참이었거든요.”
“저를요?”
“네, 영애가 황궁에서 지내게 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죠. 파티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다이아나가 손에 든 짐꾸러미를 흔들었다. 그 안에서 유리병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용물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한 소리가.
“혹시…….”
기대감에 가득 찬 내 시선에 다이아나가 싱긋 웃었다.
“파티에는 모름지기 술이죠.”
* * *
“예? 정말요?”
나는 다이아나가 만들어준 칵테일을 홀짝이며 눈을 크게 떴다.
칵테일에서는 상큼한 과일 향이 났다. 맛도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하긴. 누가 만든 건데 맛이 없을 리가 있나. 게다가 이번에는 논 알코올도 아니었다. 아 역시 이 맛이야.
“네, 뭐, 아직 초짜지만 일단은 그렇게 되었어요.”
내가 칵테일의 맛에 감탄하는 사이 다이아나가 부끄러운 듯 볼을 붉히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별것 아니라고 했지만 내 눈에는 엄청 대단해 보이는데.
“그래도 어쨌든 황실 기사가 된 거잖아요! 아무나 못 되는 건데. 언제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사실 기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지는 꽤 되었어요. 어릴 적부터 꿈이었거든요.”
“그런데 왜…….”
“아무래도 가문 사정상 눈에 띄는 일은 못 하게 하시더라고요. 여기사가 그리 흔하지는 않잖아요.”
하긴, 레오나드의 존재를 숨겨야 했을 테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다이아나에게 허락된 것이라고는 고작 파티에서 칵테일을 만드는 것 정도였겠지.’
이제는 레오나드가 황제가 되었으니 더는 숨을 필요가 없어 도전한 것이겠고.
‘그래도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는 않았을 텐데.’
이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각이 어떤지를 떠올리면 실로 대단한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래도 시대적 배경 상 여자가 기사를 한다는 건 다이아나의 말 따라 흔치 않은 일이니까.
그런 걸 생각하면 다이아나는 정말이지…….
“너무 멋있어요, 헨티슨 영애.”
“아니에요. 아버지는 그렇게 늦은 나이에 시작하면 남들한테 뒤처질 텐데 어쩌냐고 뭐라 하셨는걸요.”
“그래서 더 멋있는 거예요.”
다이아나는 나랑 비슷한 나이였다. 뭔가를 새로 시작하기에는 이 세계에서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은 나이였단 말이다.
그런데도 다이아나는 과감하게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했다.
내가 두려움에 저택 안으로 꼭꼭 숨는 동안.
“에이, 저는 오히려 아멜리오 영애가 더 멋있는걸요. 저는 말주변이 없어서 화나면 손부터 나가는데, 영애는 그렇지 않잖아요. 제가 4년 전에 파티장에서 보고 얼마나 놀랐는데요. 너무 멋있었다고요.”
“그, 그래요?”
“네, 게다가 아멜리오 영애는 늘 예상을 깨는 매력까지 있다니까요? 아까 폐하의 등에 업혔을 때 얼마나 귀여웠는지 아세요?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어요.”
계속되는 칭찬에 불이라도 난 듯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귀엽다니. 저 그런 말 처음 들어요.”
“에이, 설마요! 그렇게 귀여우…….”
“처음 아닌데.”
꽤 낮은 목소리가 호들갑을 떠는 다이아나의 말을 가르고 흘러나왔다. 그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레오나드가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이쪽을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뭐가 처음이 아닌데요?”
다이아나가 칵테일을 손에 든 채로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호칭 정리 좀 똑바로 해, 다이아나. 아멜리오 영애가 아니라 아멜리오 백작이야.”
“아, 그렇지. 하지만 뭔가 아멜리오 백작은 조금 정이 없어 보이는데요. 저 혹시 로레이나라고 불러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다이아나!”
살짝 올라오는 술기운에 몽롱해지는 것을 느끼며 활짝 웃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던 레오나드가 옆에서 뭐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잘 들리지는 않았다.
“……이게 아닌데.”
“네? 뭐라고요?”
“하아……. 아무것도 아니야.”
뭔가 답답한 듯 레오나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아까부터 너무 다이아나랑만 이야기를 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실수했다. 레오나드도 챙겨줬어야 하는 건데.
‘너무 오랜만에 마시는 거라 신나서 연거푸 마시다 보니…….’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이제 막 성인이 된 탓에 이 세계에서는 마실 기회가 없었단 말이다.
‘내가 다이아나의 칵테일을 또 언제 마셔보겠냐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레오나드의 옆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왜 그래요?”
“그냥 그런 게 있어. 지금 다이아나랑 정신없이 이야기하고 있는 누구는 모르겠지만.”
“다이아나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다이아나 너무 멋있지 않나요? 남들 눈 신경 안 쓰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 정말 대단한 거 같아요.”
칵테일을 한 번에 쭉 들이키는 다이아나를 보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그에 레오나드가 내뱉는 한숨이 더 커졌다.
“한 가지만 말해둘게.”
“뭔데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자 레오나드가 몸을 숙이더니 내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었다.
“내가 먼저야.”
……뭐래. 대뜸 저렇게 말하면 내가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지금 정신이 몽롱해서 잘 못 알아듣는 걸지도.
“한 번만 다시 말해 줄래요? 제가 잘 이해를 못 해서.”
“그러니까 내 말은…….”
잠시 뜸을 들이던 레오나드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귀엽다는 말 내가 먼저 했다는 소리야.”
“…….”
“생각만 한 것까지 합하면 그보다도 훨씬 오래되었어.”
할 말을 마친 레오나드가 서둘러 내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고개를 돌려 정면을 응시하는 레오나드의 귀 끝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번에는 분명히 들었다. 레오나드가 뭐라고 했는지 아주 확실하게.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오나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줄 수가 없었다.
‘아닌데.’
그 생각은 내가 먼저 했는데.
어쩐지 의기양양해 보이는 레오나드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이래서 술이 무섭다고 했던가. 평소라면 진절머리 쳤을 말을 제법 당당하게 했던 것을 보면.
“제가 먼저 했는데요.”
“뭐?”
못 알아들은 것 같은 레오나드의 얼굴에 그의 어깨를 내 쪽으로 끌었다.
그에 레오나드가 자연스럽게 내게로 몸을 기울였다.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며 레오나드의 귓가에 속삭였다.
“귀엽다는 생각, 내가 먼저 했다고요.”
“…….”
“젠이 귀엽다는 생각 엄청 많이 했는데.”
그에 레오나드가 다급히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타오를 듯 붉어진 귀까지는 차마 가릴 생각을 못 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