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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37화 (37/144)

#37화

“너 무슨…… 그렇게 갑자기…….”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하던 레오나드가 팔을 내리더니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너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아?”

“물론이죠. 저를 바보로 알아요?”

“아니야. 그랬을 리가 없어. 그랬으면 이렇게 태연할 수가 없다고.”

이제는 거의 혼잣말이 되어버린 레오나드의 목소리는 앞쪽에서 불쑥 들려온 말에 그대로 묻혔다.

“어? 이게 마지막 병이네요.”

다이아나가 칵테일을 만들다가 말고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미완성으로 남길 수는 없으니까 가서 새 병 가지고 올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네, 다녀오세요!”

살짝 손을 흔들자 다이아나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나는 다시금 테이블 위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랑 다른 맛으로 마셔봐야지.’

뭘 마시면 좋을까. 이번에는 붉은색 칵테일을 먹어볼까? 아니야. 저쪽에 있는 황금색도 맛있어 보이는데…….

“로레이나.”

“네?”

이번에는 무슨 맛을 마셔볼까 고민하며 이리저리 방황하던 손이 단숨에 잡혔다.

손을 감싸는 따스한 온기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레오나드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 그만 마셔.”

“왜요?”

“너 취했잖아.”

“……아닌데요?”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웃음에 방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에 레오나드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인데. 왜 못 믿어주는 걸까. 그냥 기분이 날아갈 듯이 좋은 것뿐인데.

“그냥 마시게 해 주세요. 오늘은 좀 더 마시고 싶단 말이에요.”

“다른 날 마시면 되잖아. 지금도 충분히 많이 마셨어.”

“다른 날은 안 돼요. 꼭 오늘이어야 한다고요.”

“왜 오늘이어야 하는데? 누가 보면 오늘 무슨 일 있는 줄 알겠어.”

“어? 오늘 무슨 일 있었는데 몰랐어요?”

발음이 약간 꼬이기 시작한 내 모습에 레오나드가 내 손을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되겠다. 지금 많이 취했어. 빨리 방으로 가자.”

레오나드가 나를 일으키기 위해 내 어깨를 감싸려던 찰나. 나는 서둘러 레오나드의 손을 붙잡았다.

가긴 어딜 가. 오늘 얼마나 역사적인 날인데.

‘며칠 동안 고민하던 문제가 해결된 날이라고.’

예상치 못한 행동에 한층 커진 붉은 눈이 나를 향했다.

그 눈을 보며 나는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띤 채로 손가락을 들었다.

그리고는 레오나드의 손을 펼친 채 손가락으로 글자를 써 내려갔다.

‘레…… 오.’

아까 그랬던 것처럼 레오나드의 손바닥에 글자를 써보려고 했다.

그런데 글자를 너무 크게 쓴 탓일까. 레오나드의 이름이 손바닥 안에 다 들어가지 않았다.

어쩌지. 뒤에 두 글자를 더 적어야 하는데. 큰일이네.

“……레오밖에 없네.”

“…….”

“왜 레오밖에 없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위를 올려다보니 금방 레오나드와 눈이 마주쳤다.

내 시선을 느낀 레오나드가 흠칫 몸을 떨었다. 레오나드의 얼굴은 터질 듯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까 내가 귓속말을 했을 때보다 훨씬 더.

“솔직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뭐가요?”

무슨 말이냐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자 레오나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내 손을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 상태 그대로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레오나드가 내 손 위에 이마를 대었다.

손바닥에 닿은 이마는 보이는 것만큼이나 뜨거웠다.

“……네 행동이 어떻게 보일지 다 알고 행동하는 거 아니냐고.”

“혹시 제가 손바닥에 글씨 써서 화났어요?”

내 말에 레오나드의 한숨이 더 짙어졌다. 지금 나한테는 레오나드의 정수리 부분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상당히 답답해하고 있다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니, 그 반대야.”

레오나드가 내 손을 더 꽉 쥐며 말했다. 그에 나는 레오나드의 생각을 더 종잡을 수가 없어졌다.

‘……진짜 술에 취하긴 한 모양이네.’

그것도 아니면 이전 세계에서 내가 그럴듯한 인간관계 하나 만들지 못했었기 때문일까.

‘그래도 돈 벌기 위해 별의별 사람들 다 상대해보면서 사람 대하는 방법은 어느 정도 익혔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그중에 마음을 나눈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 어쩌면 그래서 사람 대하는 기술이 부족한 걸지도.

나는 내게 레오나드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빠르게 인정했다.

난감한 상황에 내가 택한 방법은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잖아. 혼자서는 알아낼 방도가 없는걸.

“레오나드.”

“왜, 또 무슨 소리를 해서 심장 철렁하게 만들려고.”

볼멘소리에 나는 레오나드의 부드러운 검은색 머리카락을 응시하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혹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바로 말해 주세요.”

“……뭐?”

내 말에 레오나드가 손에서 이마를 떼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에 나는 살짝 옆으로 시선을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레오나드를 똑바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야 제가 고칠 수 있어요.”

“…….”

“물론 저는 눈치가 빠른 편이라 알아서 하겠지만. 가끔 모르고 그냥 넘어가는 것도 있을 테니까요. 이렇게 해 줬으면 좋겠다 하는 것도 미리 말해 줘도 괜찮아요. 그럼 그것도 제가…….”

“로레이나.”

레오나드가 내 손을 두 손으로 감싸며 나와 시선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마치 내가 왜 피하려고 하는지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누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아니, 그런 사람은 없었다.

“그냥 저 혼자 신경 쓰여서 그러는 거예요.”

“…….”

“아멜리오 백작가를 떠나던 날, 제가 물어본 말 기억해요?”

눈물범벅이 되어서 물었었지. 당신에게 내가 필요하냐고.

“그때 나한테 당연한 거 묻지 말라고 했었죠.”

말을 하던 중에 나는 시선을 피하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내가 돌아보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금방 레오나드와 눈이 마주쳤다.

“저 그런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살면서 평생.”

“…….”

“레오나드가 처음이었어요.”

레오나드는 내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불안한 마음 같은 건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묘하게 후련한 기분이랄까.

평소에는 늘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생각만 하던 말들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누가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술술 잘 나왔다.

“그렇게 말해 준 게 너무 고마워서……. 뭐든지 잘해 내고 싶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며칠간 도서관에 살다시피 하며 그 많던 귀족들 얼굴과 이름을 보았고, 밤잠을 설치며 어떻게 하면 레오나드에게 귀족들 이름을 알려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저는 당신한테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당신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그래야 살기 위해 레오나드를 이용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덜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무의식중에도 이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알았는지 이것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언제든 제가 필요 없다고 느껴질 때는 말해 주세요.”

하고 싶었던 말을 어느 정도 쏟아냈기 때문일까. 어쩐지 눈꺼풀이 조금씩 무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럼 제가 고치도록 노력…….”

아, 아직 할 말이 남았는데.

하지만 밀려오는 졸음을 참을 수는 없었다. 나는 몸이 나른해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힘이 빠진 몸이 뒤로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넘어가면 앉아 있는 소파 모서리에 머리를 박을 것이 분명했지만 이상하게도 불안하지는 않았다.

너무 졸려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아직까지도 내 손을 잡고 있는 온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곧바로 내 등을 받치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나는 의식을 끈을 놓아버렸다.

그 뒤는 암전이었다.

어쩐지 오늘은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

로레이나는 말을 하던 중에 뒤로 넘어가더니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하마터면 로레이나를 놓칠 뻔했던 레오나드는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로레이나를 일으켜 세웠다.

평소 같으면 눈 감고도 받아냈겠지만. 방금은 조금 위험할 정도로 넋이 나가 있었으니까.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로레이나는 정말 진지하게 고민을 털어놓은 것 같았지만 사실 레오나드는 듣는 내내 웃겨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 정정하겠다. 너무 좋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저런 말을 어떻게 제정신으로 들을 수가 있겠는가.

‘저는 당신한테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로레이나가 술기운으로 인해 볼에 열이 오른 채 또박또박 말했던 순간이 머릿속이 또렷하게 남았다.

언제나 예쁘다고 생각했던 푸른 눈에서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말을 듣는 내내 혹시 꿈은 아닐까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처럼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할 수 있을까.

‘쓸모가 없어질까 덜덜 떨던 건 오히려 이쪽이었는데.’

레오나드가 로레이나의 다리 뒤로 팔을 넣어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예상치 못한 파티 덕에 오늘 밤, 로레이나의 일기장으로써의 임무는 흐지부지되어버렸지만. 뭐, 상관없었다.

‘오늘은 그보다 더한 말을 들었으니까.’

레오나드는 자신의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자는 로레이나를 내려다보았다.

‘아쉽네.’

이 작은 머릿속에 무슨 걱정이 그리 많은지. 한번 들여다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레오나드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로레이나가 하고 있는 고민이 사실 전혀 걱정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것을 어떻게 깨닫게 하면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레오나드는 혹시라도 로레이나가 깰세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문 쪽에서 잊고 있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렇게 쭉 갔을 것이었다.

“폐하.”

다이아나의 목소리에 레오나드가 고개를 돌렸다.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레오나드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 그래. 다이아나가 있었지.’

원래 여자끼리는 통하는 것이 더 많다고 들었다.

아까 보니 로레이나와 잘 맞는 것 같던데. 다이아나라면 로레이나의 이야기를 잘 들어줄 것이 분명했다.

“다이아나, 혹시…….”

“폐하, 로레이나 좋아하시죠?”

삐끗.

예상치 못한 말에 레오나드가 살짝 중심을 잃었다.

하마터면 로레이나를 떨어뜨릴 뻔했던 상황에 레오나드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다이아나는 웃었다.

‘흐음, 대답은 안 들어도 알겠네.’

레오나드를 빤히 보던 다이아나가 새로 들고 온 칵테일을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특유의 분위기 탓에 자유로워 보이지만, 사실 다이아나는 레오나드 때문에 포기하고 산 부분들이 많았다.

정말 하고 싶었던 일도 전 황제, 그러니까 데프론 공작의 눈에 띄면 안 된다는 아버지의 말에 번번이 가로막히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레오나드를 원망한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은 레오나드의 탓이 아니었고 다이아나는 그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리고 가장 힘들었던 것도 레오나드였을 테니까.

‘하지만…….’

순식간에 새로운 칵테일을 만든 다이아나는 손에 쥔 잔을 빙 돌렸다.

안에 든 푸른빛의 액체가 찰랑- 하는 소리를 내며 작은 회오리를 일으켰다.

‘조금쯤은 괴롭혀도 되지 않겠어?’

아주 살짝만 말이다. 다이아나는 애써 장난스러운 얼굴을 지우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어쩌죠, 폐하?”

방금 꺼낸 말만으로도 동공이 잘게 떨리고 있는 레오나드에게.

“저도 폐하와 같은 마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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