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무슨…….”
레오나드가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다이아나를 바라보며 헛기침을 했다.
살짝 삐끗한 탓에 다시금 중심을 잃기도 했다.
레오나드는 그 잠깐의 흔들림에 혹시라도 로레이나가 깨기라도 했을까 봐 조심스레 살폈다.
다행히도 로레이나는 미동도 없이 그의 품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깰 뻔했잖아. 놀랄 만한 말 좀 하지 마.”
아까와는 달리 목소리도 한층 작아졌다. 전혀 레오나드답지 않은 모습에 다이아나는 혀를 내둘렀다.
짝짝짝.
다이아나가 내는 소리답게 경쾌한 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와, 지금 그게 더 중요하신 거예요? 저한테 로레이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들켰다는 것보다?”
민망해하라고 한 소리였는데 레오나드는 뭐가 문제냐는 듯한 얼굴을 했다.
자신이 그렇게 했다는 사실이 뿌듯하기까지 한 모양인지 고개를 치켜드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당연하지. 일부러 티 낸 건데 알아차렸다니. 완벽하게 성공했군.”
하지만 다이아나는 보고 말았다. 당황한 기색을 미처 숨기지 못한 레오나드의 흔들리는 두 눈을.
역시, 장난이 제대로 먹혀들어 간 모양이었다.
“아닌데요. 완전히 실패한 거 아닌가요?”
“…….”
“제가 알아차리면 뭐 해요. 정작 당사자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가감 없이 말하는 다이아나의 모습에 레오나드의 눈썹이 축 늘어졌다.
세상 떠나가라는 듯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는데 뭐랄까.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이렇게 제대로 대화를 한 게 도대체 얼마 만이지?’
잠시 과거를 되짚어보던 다이아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얼마 만이냐는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레오나드와 이렇게까지 제대로 대화를 해 본 것은 태어나 처음이었으니까.
레오나드를 직접 옆에서 도왔던 제럴드나 그의 아버지라면 모를까.
게다가 다이아나는 어릴 적 레오나드와 그다지 교류가 많지 않았다.
그 때문에 레오나드는 다이아나의 이름을 외우기까지 한참이나 걸렸다.
‘그러니까…… 네 이름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말을 더듬던 레오나드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서 레오나드는 결국 다이아나의 이름을 외우게 되었지만.
이렇게 평범한 사람처럼 이야기하는 레오나드라니. 조금 놀려볼까 생각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조금이 아니라 실컷 놀려야지.’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오겠냐고. 어차피 머지않아 둘이 잘 될 것 같으니 그전까지 재미 좀 보자.
“폐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말인데. 곧 있을 무도회 이야기 좀 다시 해야 할 것 같아요.”
“무도회?”
“……설마 잊어버리신 건 아니죠? 곧 폐하의 즉위를 기념하는 무도회가 열리잖아요. 오빠가 서면으로 보고드렸다고 말했었는데.”
“아아.”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은 느낌에 레오나드가 조심스레 로레이나를 소파에 내려놓았다.
추운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들은 터라 겉옷을 벗어서 덮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거웠던 겉옷의 무게만큼 따뜻했던 모양인지 로레이나가 잠결에 미소를 지었다.
그것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레오나드가 다시 다이아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주 정성이네.’
똥 씹은 얼굴로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다이아나는 레오나드와 시선이 마주치자 급하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하지만 그 선명했던 감정은 완전히 지워지지 못한 채 레오나드에게 읽히고 말았다.
둘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크흠.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데?”
“……아무래도 파트너를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원래 제가 폐하의 파트너였던 건 아시죠?”
다이아나가 들고 있던 잔의 칵테일을 말끔히 비우며 말을 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폐하와 제가 파트너를 계속하는 게 무리라는 것도요.”
“하지만…….”
레오나드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던 다이아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살짝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폐하의 짝이 되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는 아버지께는 잘 말씀드릴게요. 애초에 그렇게 욕심이 많으신 분이 아니니 이해해 주실 거예요.”
걱정하고 있던 부분을 콕 집어주는 말에 레오나드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덕분에 손쉽게 로레이나에게 파트너 요청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제 다이아나의 파트너만 구해 주면 되는데…….
“그러면 폐하는 파트너를 누구로 하실 거예요?”
“……뭐?”
“아, 모레트 영애도 이번에 참석한다던데. 이참에 복수해 주시는 건 어떠세요? 아마 그때 그 꼬마였다는 사실만 알려주어도 까무러칠걸요?”
상상만으로도 즐거운지 다이아나가 키득거렸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그에 맞춰서 같이 웃을 수가 없었다.
‘방금 그건 내가 해야 하는 질문 아닌가?’
왜 파트너를 누구로 할 거냐고 묻는 거지?
“다이아나, 네 파트너는…….”
불안한 마음이 들어 물은 말에 다이아나는 왜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말투로 대답했다.
“당연히 로레이나죠.”
“…….”
“저 황실 기사잖아요. 이제 폐하의 파트너도 아니겠다, 기사복을 입고 무도회에 참석하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고요.”
“…….”
“황실 기사는 레이디를 에스코트할 수 있잖아요. 맞죠?”
다이아나의 폭탄선언에 레오나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지금쯤 머릿속에 다이아나와 로레이나가 무도회장 한가운데서 춤추는 광경이 그려지고 있을 터였다.
그 모습에 다이아나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느라 혼이 났다.
‘아,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는데.’
내일은 또 어떻게 놀려주면 좋을까.
* * *
“……로레이나.”
“네.”
“로레이나…….”
“왜 불러요.”
“로레이나.”
“아, 왜요!”
술에 취해 뻗어버렸던 다음 날.
나는 레오나드 옆에서 평화롭게 회의에 참석하는 귀족 명단을 훑어보는 중이었다.
일기장이라는 특수한 역할 때문에 본의 아니게 레오나드와 집무실을 같이 쓰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외운 것이었으니 주의 깊게 볼 필요는 없고 빠뜨린 사람이 없는지 확인만 하면 되는 거였는데…….
“아까부터 왜 그러는 거예요? 집중을 못 하겠잖아요.”
뭔가 용건이 있어서 부른 거면 대답이라도 하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레오나드는 아까부터 서류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그다음에는 내 이름을 부르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무언가를 말하려는가 싶다가도 나를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다시 고개를 서류 무더기에 파묻었다.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더는 못 참아.
“레오나드.”
나직이 이름을 한번 불렀을 뿐인데 멍하니 앉아 있던 레오나드가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가 내려다보았던 짙은 검은 머리카락이 어느새 내 위에 있었다.
“로레이나.”
레오나드가 내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했다. 방금 내가 그랬던 것처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무게를 잡는 거지?
“다이아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뭘 물어보려고 저렇게 질질 끄나 했더니. 별로 고민할 것도 없는 질문이잖아?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라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아주 멋있죠. 저 오늘 아침에 다이아나가 훈련하는 것도 보고 왔거든요? 와, 검 휘두르는 모습이 그렇게 멋있는지 처음 알았잖아요.”
“…….”
“무도회에 기사복 입고 온다던데 그건 또 얼마나 멋있을지.”
레오나드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또 왜 저러나 싶어서 답답한 마음에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 레오나드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렇게 기대가 돼?”
“네? 물론이죠. 기사복 입는다는데 기대가 안 되겠어요?”
“기사복을 좋아하는 거야?”
“기사복도 좋고 그냥 제복도 좋아요.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멋있겠어요?”
“그렇단 말이지…….”
손을 들어 턱을 집던 레오나드가 뭔가를 고민하는 듯 작게 신음을 흘렸다.
보아하니 뭔가를 또 준비하는 것 같기는 한데…….
‘그냥 내버려 두자.’
하도 엄청난 오해를 하다 보니 이제는 어떤 오해를 할까 기대가 되는 지경이었다.
‘어차피 무도회 전까지는 별다른 일도 없어서 심심했는데 잘 되었지, 뭐.’
대신 나는 잠시 다이아나가 기사복을 입은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디자인이 어떤지는 이미 다른 기사들을 통해 보았으니 그 모습을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와, 진짜 멋있을 거 같은데? 지금까지 제대로 상상해 본 적은 없었는데.
“기사복이나 제복 말고는 또 좋아하는 거 없어?”
레오나드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예전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아멜리오 백작가에 젠이 처음 오던 날의 기억이.
“푸흣…….”
“갑자기 왜 웃어?”
“아, 예전 생각이 나서요.”
“예전 생각?”
“네, 전에 마차에서도 이랬던 적 있잖아요. 그때도 또 좋아하는 거 없냐고 물어봤었죠.”
물론 지금은 노트를 들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그게 다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레오나드 역시 그때를 떠올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그 노트 덕분에 뭘 좋아하는지 알고 디저트도 줄 수 있었…….”
“버리세요.”
“…….”
“그 노트 안에 적힌 거 다 잊어버리라고요.”
단호한 말에 레오나드가 눈썹을 늘어뜨렸다.
“다 네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들인데.”
“제가 뭘 말했든 다 거짓말이에요.”
혹시라도 뭔가 이상한 말을 할까 싶어서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책을 좋아한다고 하니까 도서관을 선물로 준 사람이다.
디저트를 좋아한다고 하니까 금가루를 잔뜩 뿌린, 감히 쳐다보기도 힘든 무언가를 내밀었지.
다음에는 또 어떤 엄청난 게 올지 모르니 미리 차단해 주는 편이 좋았다.
‘어쩌면 그때 돈 싫어한다고 못 박아두었던 게 다행일지도 몰라.’
그러지 않았다면…….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절로 몸이 떨려왔다. 이거 완전 재앙 수준이잖아? 진짜 천만다행이다.
과거의 나에게 잘했다며 칭찬을 하는 사이 레오나드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언가 또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이었다.
“다 거짓말이라고?”
“네, 그냥 다 잊어주세요.”
일일이 골라내기 힘드니 그냥 다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이 나았다.
레오나드의 노트에 정확히 어떤 것들이 적혀 있는지 잘 모르기도 하고.
“……정말?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그렇다니까요.”
레오나드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래, 충격적이겠지. 충분히 이해한다.
열심히 기록해놓은 것들이 알고 보니 별 쓸모없는 휴짓조각이었다는데 허탈하지 않을 수가 있겠나.
하지만 예상과 달리 레오나드가 기분이 나쁜 이유는 다른 쪽이었던 모양이었다.
뭐가 그리 급한지 내 손을 잡아채 자신의 앞으로 가져갔던 것을 보면.
“그럼 이것도 거짓말이었어?”
“네? 뭐가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자 레오나드가 내 손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이윽고 내 손가락이 닿은 곳은 레오나드의 눈가 부분이었다.
이전에 내가 예쁘다고 했던 적안이 나를 또렷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게 예쁘다고 했었던 것도.”
“…….”
“그것도 다 거짓말이었냐고 묻는 거야.”
여전히 내 손을 그러쥔 채로 레오나드가 물었다. 어쩐지 애끓는 듯한 음성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