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저기, 그러니까…….”
“…….”
“그게…….”
레오나드의 말에 나는 좀처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설마 그 이야기를 지금 꺼낼 줄이야.
‘아니, 그보다 그 말까지 노트에 적어놨었단 말이야?’
당황스러운 마음에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레오나드는 별다른 말 없이 나를 기다렸다.
잡힌 손가락에 눈꺼풀이 닿아서일까. 간지러운 감각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레오나드가 뺨을 치료해 준 날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 느낌이 어쩐지 생소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잡힌 손을 확 잡아빼었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레오나드의 눈이 가라앉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아, 그러니까 이게 말이죠…….”
하지만 내가 말을 마무리하는 것보다 레오나드가 몸을 뒤로 물리는 것이 먼저였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어.”
……아니요. 전혀 모르는 것 같은데요.
“그래, 그때는 내가 어린아이인 줄 알았을 테니까. 달래주려고 그렇게 말한 거겠지. 이해해.”
전혀 이해 못 했다는 얼굴로 그런 말 하지 말아줄래? 더 신경 쓰이잖아.
“그래, 이해…….”
애써 미소 짓던 레오나드가 결국은 가면을 벗어던지고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곧이어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여는 수밖에 없었다.
레오나드의 눈이 예뻤던 것은 사실이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으니까.
그래, 그거 말해 주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조금 부끄러워서 그런 것뿐이니까…….
“저기 레오나드…….”
“아, 괜찮아. 굳이 위로해 주지 않아도 돼.”
……하지만 당사자가 되었다는데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 그냥 말하지 말자.
‘젠이었을 때는 몰라도 지금 말하는 건 뭔가 부끄러우니까.’
어쩐지 열이 오른 것 같은 볼을 식히는 사이 연거푸 한숨을 내쉬던 레오나드가 뭔가 굳은 결심이라도 한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왜 그래. 또 불안하게. 아니나 다를까 레오나드는 곧 기함할 만한 말을 뇌까렸다.
“내가 그 거짓말, 다 사실로 만들 테니까.”
* * *
“백작님, 괜찮으세요?”
“……어?”
“아까부터 멍하니 계시길래요.”
며칠 동안 호칭 문제로 고생하던 메리가 드디어 성공했다는 얼굴로 조용히 속삭였다.
나를 제대로 부른 것이 뿌듯한 모양인지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뭐 좀 생각하느라.”
“이런 일은 처음이라 걱정이 되어서 그러시는 거죠?”
“그렇지, 뭐.”
메리의 말에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꽤 조용해진 황궁 안에는 이미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상태였다. 이 말은 레오나드의 일과가 끝났다는 뜻임과 동시에-.
본격적인 내 일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황제의 일기장으로써의 역할 말이다.
‘여기가 레오나드의 침실…….’
보기만 해도 으리으리한 문을 바라보며 나는 긴장되는 마음에 괜히 손을 말아쥐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메리가 한 마디 덧붙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냥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하면 어떨…….”
“신의 축복이 필요한 일이라 백작님 말고는 아무도 못 하는 거라면서요?”
메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래, 메리한테 그렇게 말해두었었지. 레오나드의 저주에 대해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일기장 역할을 나밖에 못 하는 것은 사실이니 아예 거짓말도 아니고.’
할 말이 없어진 내가 조용히 입을 다물자 메리가 방긋 웃으며 뒤를 돌았다.
“백작님, 그럼 저는 잠시 후에 모시러 올게요.”
가벼워 보이는 발걸음에 나는 차마 메리를 잡지 못하고 허공에 들린 팔을 내렸다.
머릿속에서는 오늘 낮에 레오나드가 했던 말이 반복되고 있었다.
‘내가 그 거짓말, 다 사실로 만들 테니까.’
뭔가를 결심한 듯 불타오르던 붉은 눈동자 또한 함께.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도대체 뭘 어쩔 생각이길래 그런 말을 한 거지?’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몸을 휘감았다.
이 문을 열면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것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하다못해 밖에 기사라도 한 명 있었더라면.’
아무리 레오나드의 저주가 기밀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황제의 침실 앞에 아무도 없는 건 좀 심하지 않아?
‘예전처럼 암살 시도가 있을지도 모르…….’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지. 그런 시도를 하러 올 멍청이가 어디 있어.’
한낱 인간이 드래곤을 잡으러 온다고? 전 황제인 데프론 공작도 속수무책으로 꼬리를 내리고 물러난 판이다.
‘이런 상황에 그런 미친 짓을 할 사람이 있으려고.’
그리고 아무리 신의 축복 핑계를 댄다고 한들 이 오밤중에 황제의 침실로 가는 내 모습을 다른 이에게 보여서 좋을 게 없었다.
이상한 구설에 오르는 건 나도 사양이니까.
‘그냥 들어가자.’
지금 이 문이 데드 엔딩으로 향하는 길이라면 모를까. 그것도 아닌데 뭘 그리 겁을 먹고 있었는지.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작게 심호흡을 하고는 문을 밀었다. 내가 미는 힘에 따라 천천히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나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레오나드를 마주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그의 얼굴을.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왔어?”
침대에 앉아 이불로 몸을 감싼 채 얼굴만 내밀고 있던 레오나드가 살짝 웃으며 물었다.
그 어색한 미소에 나는 차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레오나드 역시 이를 눈치챘던 것인지 이쪽을 보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잠시 그 상태를 유지하던 레오나드가 나직이 읊조렸다.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주면 안 될까.”
“…….”
“잠깐이면 되는데.”
자기가 말하고도 민망한지 레오나드가 작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 모습에 방에 들어오기 전까지 몸을 감싸던 긴장감이 단숨에 녹는 느낌이었다.
뭐야, 아무런 일도 없잖아. 괜히 긴장했네.
“옷 입는 중이었던 거예요?”
“아니, 다 입기는 했는데 마무리가…….”
“그럼 그냥 제가 도와줄게요.”
등 뒤의 리본 정도 못 묶었나 보지. 어차피 혼자서 못 할 거 그냥 내가 도와주는 편이 나았다.
내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레오나드가 뭔가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해. 어차피 망한 거 같으니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레오나드가 제 몸을 감싸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었다.
그리고 내가 침대 쪽으로 걸어오다 말고 굳어버렸던 것도 그 순간이었다.
“……뭐예요?”
너무 놀란 나머지 더듬거리자 레오나드가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뒷덜미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이게…….
“왜 침실에서 제복을 입고 있어요?”
심지어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기까지 했다.
레오나드가 입은 제복은 하얀색 바탕에 군데군데 금색 장식이 달린 형식이었다.
그 밖에도 갖가지 보석들이 박혀있었는데 그 종류가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헤아릴 수도 없었다.
레오나드의 차림새는 당장 무도회에 나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느낌이었다.
물론 얼굴이 받쳐 주니 그마저도 잘 어울리기는 하는데.
‘도대체 이런 옷을 왜 침실에서 입고 있는 거지?’
심지어 제대로 입지도 못했잖아. 왜 옷을 입다 말고 있는 거냐고.
“어디 놀러 나가려고 했어요?”
“아니면 근처에서 무도회라도 열려요?”
정말 궁금해서 물은 것이었는데 레오나드의 얼굴이 화르르 불타올랐다.
이러다가 진짜 불이라도 나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럼 저도 같이 가요. 저 살면서 파티라고는 예전에 다이아나의 칵테일파티에 간 게 전부거든요. 가는 김에 저도…….”
“아니, 내가 이러고 있었던 건 파티 같은 게 아니라…….”
레오나드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고 탄식했다.
꽤 길어질 것 같은 침묵에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시야에 노트 하나가 들어왔다.
노트는 침대 옆 협탁에 펼쳐진 채로 올려져 있었기에 별다른 노력 없이도 훤히 보였다.
그게 레오나드가 쓴 것이라는 것도 한눈에 알 수 있었고.
기사복이나 제복을 좋아한다. 황실 기사복 입은 모습이 멋있겠다고 한 것을 보면 그중에서도 흰색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잠깐. 보지 마!”
다음 구절을 읽기 전 레오나드가 노트를 황급히 덮었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해.
이미 중요한 부분은 다 읽었는걸.
그것을 레오나드 역시 알았던지 방 안에는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참기 힘든 고요함에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였다.
“제가 기사복이나 제복이 좋다고 해서 입으려고 했던 거예요?”
“…….”
“이 밤중에?”
그에 레오나드가 땅이 꺼질 정도로 한숨을 내쉬며 이불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들어오기 전까지 제대로 갖춰 입고 있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입는 게 복잡……. 젠장.”
입술을 짓씹던 레오나드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꽤 큰 움직임에 제대로 잠기지 않았던 셔츠 윗부분이 살짝 벌어졌다.
밤하늘을 닮은 머리카락이 상기된 볼과 기묘하게 어우러졌다. 그 잔뜩 흐트러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부끄러운 듯 살짝 눈을 내리깐 레오나드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하아. 왜 이렇게 되는 게 없지.”
……아니, 되는 일이 없지는 않은 것 같은데.
왠지 침을 삼키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재빨리 뒤를 돌았다.
“……뒤돌아 있을 테니까 빨리 갈아입어요. 그러고 잘 수는 없잖아요. 벗는 건 그리 어렵지 않죠?”
“그래…….”
계획대로 되지 않은 것이 마음에 상당히 안 드는 듯 레오나드가 말끝을 흐렸다.
곧 등 뒤에서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로 인해 절로 연상되는 뒤쪽의 상황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아, 나 왜 뒤돌아서 있겠다고 했지?’
그냥 나가 있겠다고 할걸. 어떻게 이렇게 바보 같을 수가.
하지만 이제 와 나가 있겠다고 하기에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나는 최대한 뒤에서 나는 소리에 집중하지 않으려 애쓰며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이렇게 옷 갈아입는 데 오래 걸리는 거야.’
……진짜 환장하겠네. 긴장감에 발을 한 100번쯤 굴렸을 무렵 드디어 레오나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됐어.”
만세. 드디어 살았다! 조금만 더 길었으면 실내용 슬리퍼 밑창 다 닳을 뻔했다고.
그렇게 나는 안심하며 뒤를 돌았다.
그것이 내 인생을 통틀어 손에 꼽을 수 있는 크나큰 실수라는 것도 알지 못한 채로.
“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재빨리 손으로 눈을 가렸다.
하지만 이미 본 모습의 잔상은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뭐가?”
레오나드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정말로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에 더 난감해진 것은 바로 나였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그, 그 옷이…….”
“옷이?”
내 말에 레오나드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그 가슴팍이 훤히 드러난 옷 말이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던 레오나드가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듯 눈을 빛냈다.
붉은 입술이 짙은 호선을 그렸다.
“아, 이런 쪽을 좋아하는 거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