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레오나드의 모습에 다시금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이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선 이는 제럴드였다. 제럴드를 보자 머릿속을 탁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아, 혹시 따로 정해진 상대가 있었던 건가?’
물론 레오나드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야 이제 알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파트너를 결정하기에는…….
‘신경 써야 할 것이 많겠지. 레오나드는 황제니까.’
잘은 모르지만 어떠한 정치적 관계가 얽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긴. 아무리 헨티슨 가문이 레오나드에게 호의적이라고 해도 아무런 대가 없이 그를 도와주지는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다이아나가 파트너가 되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
어쩌면 아까 나한테 물었던 건 그냥 자기가 잘났다는 걸 인정받고 싶어서 그랬던 걸지도.
뭐, 앞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것도 완전히 들어맞는 것은 아니었으나 레오나드가 이상한 짓을 한 게 어디 한두 번인가.
“혹시 파트너가 이미 정해져 있는 거면 저는 다른 사람이랑 해도 괜찮아요.”
어차피 내 목표는 레오나드의 파트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레오나드의 옆에 있는 거니까.
“헨티슨 공작님만 괜찮으시다면 저는 공작님과 파트너를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공작님은 어떠세요?”
마침 잘 되었다 싶어서, 서류 뭉치를 들고 들어오던 제럴드를 보며 물었다.
제럴드가 다이아나와 같은 갈색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저는 상관없…….”
“제럴드.”
레오나드가 제럴드의 말을 끊으며 그를 나직이 불렀다.
그에 서류 뭉치에 파묻혀 있던 제럴드가 다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예, 폐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나가.”
“……예?”
잘못 들었던 줄 알았던지 제럴드가 눈을 깜빡이며 다시금 물었다.
하지만 그 애처로운 눈빛에도 레오나드는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당장 나가.”
“저 방금 들어왔……. 알겠습니다.”
명백한 축객령에 제럴드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밖으로 나갔다.
보니까 서류 뭉치도 못 내려놓고 나갔던데.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가 싶어 멍하니 있으려니 뒤에서 작게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자마자 레오나드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나 파트너 할 사람 없어.”
“네?”
반장 선거라도 하는 듯 꽤 당당한 선언이었다. 저걸 지금 자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건가.
“그럼 나랑 파트너 해 주는 거야?”
“……그렇죠?”
나는 얼떨결에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허락에 레오나드는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혹시 몰라 말하지만, 내 짝으로 무도회에 참석하는 이상 눈에 많이 띌 거야. 알고 있지?”
“네, 알죠.”
“나랑 춤을 춰야 하는 것도?”
“당연히 알죠. 제가 그것도 모를까 봐요?”
계속되는 물음에 조금 퉁명스럽게 대답했는데, 레오나드가 활짝 웃었다.
투덜거리는 말투는 신경 쓰이지도 않는 모양인지 적안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는 듯 휘어졌다.
“그래, 당연히 알겠지.”
재빨리 대답한 레오나드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손을 들어 가린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해 창문으로 들어오는 노을이 레오나드와 기가 막히게 어우러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간절히 비는 수밖에 없었다.
부디 이 노을이 붉어진 내 얼굴을 가려주기를.
‘내가 진짜 미쳤구나.’
왜 이러는 거야 갑자기? 지금까지 이런 마음 든 적 한 번도 없었잖아.
레오나드 마음을 알고 나니까 갑작스레 마음이 바뀌기라도…….
‘……아니지.’
이제는 솔직해지자, 사실 알고 있었잖아. 레오나드가 아멜리오 백작가로 찾아왔던 순간부터.
‘너를 만나러 왔어, 로레이나.’
내 이름을 부르며 눈을 부드럽게 휘던 레오나드의 얼굴이 지금 눈앞에 있는 모습과 겹쳐졌다.
레오나드가 다른 이를 대할 때와 나를 볼 때의 차이가 극명했다는 것도 떠올랐다.
이리도 선명한데 어쩜 그렇게 부정했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의외로 답은 금방 나왔다.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나중에라도 레오나드를 좋아하게 된다고 한들 나는 그의 마음을 받아 줄 수가 없을 터였다. 이건 레오나드의 잘못이 아니라 순전히 내 문제였다.
에녹의 마음을 받아 줄 수 없는 이유와 마찬가지였다. 내 그릇이 너무 작았기 때문에.
‘그리고 종국에 레오나드를 구원해 줄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그때가 되면 레오나드는 셀리아를 선택할 테고. 그게 당연한 일이잖아.
‘……그래도 아직은 괜찮아.’
아직은 단순히 내게 잘해 주는 사람에 대한 호감 정도일 뿐이다. 이 정도는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어.
그렇게 스스로 타이르며 다시 심호흡했다.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드니 레오나드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말이 없는 것이 걱정되었던 것인지 레오나드가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레오나드는 어젯밤 모습 그대로였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던 그 모습 그대로.
“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 잠 못 잤어?”
레오나드가 내 얼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에 나는 뒤를 돌아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다.
어제 내 손에 닿아 있던 온기가 얼마나 따뜻했는지 알아서.
그래서 내가 나중에는 그 온기에 욕심을 부리게 될까 봐.
“진짜인가. 아니면 어제 너무 많이 마셔서 그래?”
그렇게 다정하게 대해 주지 마.
“아니면 내가 너무 파트너 문제로 고집 피워서 그런가.”
그렇게 예쁘게 웃어 주지도 마.
“뭐라고 말 좀 해 봐. 나 때문에 그런 거면 무도회 파트너로 가지 않아도 돼. 아니, 아예 취소할 수도 있어.”
“…….”
“너 사람 많은 곳 가는 거 싫어하잖아.”
……그렇게 나를 걱정해 주지도 마, 제발.
하지만 이런 내 바람이 무색하게도 레오나드는 매우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살폈다.
그에 나는 터져 나올 뻔했던 울음을 삼키며 웃었다.
“……즉위 후 무도회가 얼마나 중요한 건데요. 농담이죠?”
“농담 아닌데. 회의도 아니고 무도회쯤이야 얼마든지 취소할 수 있어.”
“이미 일정 다 발표했잖아요. 다들 그날 입을 옷도 다 준비했을 텐데, 그러다 욕먹으면 어쩌려고요?”
“욕하라고 해. 어차피 그 파티의 주인공은 나야. 주인공이 안 하겠다는데 뭘 어쩌겠어.”
괜찮아 보이려는 내 노력이 통했던 것인지 레오나드가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나를 살피던 손 역시 거두어졌다.
“그리고 나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보다는 네가 훨씬 신경 쓰이니까.”
“…….”
“저번에 말했지. 너는 네 몸을 좀 챙길 필요가 있다고. 이제 다른 사람 좀 그만 신경 써.”
다른 사람 좀 그만 신경 쓰라니.
‘나만큼 이기적인 사람이 또 있을까.’
하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웃었다. 그 또한 내가 이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난 어느 정도 원작이 틀어질 것을 알면서도 살기 위해 레오나드의 옆에 있는 거니까.
레오나드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그의 행복을 위해 애를 쓰겠다는 또 다른 목표 뒤에 비겁하게 숨어서 말이다.
나는 나를 보며 웃는 레오나드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이미 정해져 있는 당신의 인생을 멋대로 비틀어버렸다는 것을 알면-.
과연 그 모든 것을 알게 되어도 당신은 지금처럼 웃어 줄까?
* * *
“……여기도 없네.”
수도 구석진 곳에 있는 도서관에서 책장을 훑던 에녹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몇 번째 도서관인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하긴, 황궁 도서관에도 없는 자료인데 쉽게 찾을 수 있을 리가.’
에녹의 입에서 다시 한번 옅은 한숨이 터졌다.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돌아다닌 탓에 언제나 뽀얗게 빛나던 피부 역시 많이 상해있는 상태였다.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가자.’
도서관 문을 열고 나온 에녹이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꽤 체력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더니 걷는 속도가 매우 더뎠다.
‘집에 안 들어간 지도 이제 거의 일주일인가.’
에녹 역시 이렇게 고생하면서 돌아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지금은 로레이나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이었으니까.
황궁에서 다시 만난 그날, 로레이나에게 맹세하지 않았던가. 변치 않는 마음으로 기다리겠노라고.
로레이나가 확신을 가지고 자신에게 다가올 마음을 먹을 수 있을 때까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하지만 에녹은 이대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얼마 전, 공작저를 돌아다니다 들은 아이작의 의문스러운 혼잣말 때문이었다.
‘분명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고 하셨지.’
그것이 데프론 공작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귀한 보물이라는 이야기 역시 똑똑히 들었다.
마법과 연관이 있어 보였으니 적어도 300년 전 물건임이 분명했다.
지금껏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 찾는 것만 보아도 그 물건이 어떤 용도로 쓰일 것인지는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뭐든 간에 안 좋은 일에 쓰시려는 거겠지.’
물론 그 물건이 에녹에게 쓰이지는 않을 것이었다.
제 아버지가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오로지 로레이나 아멜리오, 딱 한 사람을 위해.
아이작이 로레이나를 증오한다는 것쯤이야 바보가 아니고서야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아이작이 벌일 안 좋은 일에 로레이나가 휘말릴 것 역시 자명한 일이었고.
어떻게든 빨리 알아내야 하는데 아는 정보가 하나도 없으니…….
‘마법이 존재했을 당시의 기록을 다 뒤져보는 수밖에.’
공작저 사람들은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다 아이작의 사람들일 테니 힘들지만 혼자 움직이는 편이 좋았다.
“찾을 수 있을까…….”
탄식 섞인 한숨을 내뱉은 에녹이 하도 비벼서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를 매만지며 걸음을 옮겼다.
다음 도서관이 여기서 얼마만큼 떨어져 있…….
“……뭐지?”
주위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에녹이 서둘러 걸음을 멈추었다. 심지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이 정도 기척이면 적어도 넷은 되는 것 같은데.’
누가 보낸 자들이지?
에녹이 그런 생각에 눈을 가늘게 뜨고 있을 때쯤 벽 뒤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곧이어 모습을 드러낸 익숙한 얼굴에 에녹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저희랑 같이 좀 가주셔야겠습니다.”
* * *
데프론 공작은 꽤 오랜만에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 미소는 더 짙어졌다.
아이작의 허락에 곧 문이 열리고 기사 넷이 에녹의 팔을 잡은 채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잘 훈련된 기사 넷이 매달렸음에도 꽤 버거운 상대였던지 얼굴에 고통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에녹.”
그 부름에 기사들에 의해 소파에 앉혀지던 에녹이 고개를 들었다. 에녹의 얼굴을 확인한 아이작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곱던 얼굴이 그동안 많이 상했던 것은 물론이고 곳곳에 상처까지 여럿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조심히 데려오라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에녹의 실력이 만만치 않았으니 힘들었을 것이라는 건 알지만 절로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구 아들인데, 감히.
“다 나가.”
“하지만 공작님…….”
“나가라고 했다.”
더 말했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은 분위기에 서로 눈치를 보던 기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문밖에서 지키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힘들게 데려온 에녹이 혹시라도 또 밖으로 나갈까 걱정이 되었던 탓이었다. 그에 아이작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기사들이 밖으로 나가고 잠시 뒤 집무실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러고 나서도 에녹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늘 살갑게 웃으며 다가왔던 아들치고는 꽤 낯선 모습이었다. 에녹의 변한 모습에 아이작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녹색 눈 안에 깃든 감정은 선명한 분노였다.
“그때 너를 모레트 후작가에서 지내게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
“네 말은 신경 쓰지 말고 아무 영애나 황태자비로 들였어야 했다.”
이어지는 말에도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는 모습에 아이작의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눈동자가 벌겋게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 계집이 다 망쳤다.”
“…….”
“그 반쪽짜리 계집이 너를 망쳐놨어!”
로레이나를 언급하는 것이 분명한 말에 몸을 움찔 떨던 에녹이 집무실에 들어선 이래로 처음 입을 열었다.
“아니요.”
덜덜 떨리는 몸과는 달리,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한 목소리로.
“저를 망친 건 아버지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