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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43화 (43/144)

#43화

“……뭐?”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아이작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지만 에녹은 애써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에녹의 몸 곳곳에는 기사들에게 끌려오면서 생긴 여러 상처가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마음속의 상처에 비할 것은 아니었다.

잠시 깊은 한숨을 내쉬던 에녹이 오래 묵혀둔 이야기를 꺼냈다.

“……저한테 예전에 들려주신 이야기 기억하세요? 카일룸 제국의 아이들을 위해 아버지께서 직접 만든 이야기라고 하셨잖아요.”

“괴물을 물리친 용사 이야기 말이냐? 그래, 내가 만든 거였지.”

“분명 그때 가문 선조분들의 이야기를 따서 만들었다고 하셨죠.”

“……나는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모르겠구나.”

아이작이 아까보다는 누그러진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에녹이 꺼낸 이야기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아이작이 열심히 들려주었던 이야기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선조의 이야기를 각색해 만들어 놓은 동화.

황제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은 데프론 공작가의 선조가 맞았으나 실제로 칼리드를 처리한 건 이사벨이었으니까.

‘왜 이제 와 저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에녹이 조금 더 고개를 들어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반짝였던 녹색 눈에 잿빛이 가득했다.

“제가…… 그런 용사의 후손이라 자랑스럽다고 말했던 것도 기억하십니까.”

“물론이지. 그래서 밤마다 달려와 이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지 않았느냐.”

아이작의 말에 에녹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어릴 적 밤마다 이 이야기에 반짝반짝 눈을 빛냈었다.

나는 용감한 용사의 후손이야.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람이야.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 같았다. 이 이야기가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도 모르고.

“예, 그랬었죠. 정말 바보 같게도.”

처음에는 자신이 누린 모든 것들이 용사의 후손이라서 그런 줄 알았다.

왜 있지 않은가. 주인공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는 그런 흔한 결말.

그래서 그 주인공의 후손인 자신도 이렇게 밝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늘 황궁이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있던 에녹은 로레이나를 만난 이후 이곳저곳 세상을 돌아다니며 깨달았다.

빛이 있으려면 그림자 역시 있어야 한다는 걸. 그리고 이 이야기는 동화가 아니었다는 것도.

“그 이야기에서 괴물이 잘못한 건 도대체 무엇입니까?”

“……뭐?”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 아니면 왕국에 살고 있었다는 것?”

말끝에 미처 참지 못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 웃음이 결코 즐거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아이작과 에녹 모두 알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만드신 이야기가 아닙니까. 뭐라고 대답을 좀 해 보세요.”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아이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굳게 다물려 있던 입이 열렸던 것은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지금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겠구나. 그냥 우리 가문이 옮은 일을 했다는 것만…….”

“아니요.”

에녹이 재빨리 아이작의 말을 끊었다.

이제는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람도 아니었고 정의로운 일을 하고 해피 엔딩을 맞은 주인공의 후손도 아니었다.

“데프론 공작가는 옳은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서 괴물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에녹.”

“아마 실제로도 그랬겠죠. 데프론 공작가는 용사의 후예가 아닙니다.”

“그만하거라.”

아이작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그것이 마지막 경고라는 것을 알았으나 에녹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저 한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간 살인귀의 후손일 뿐이죠. 지금의 황제 폐하께서 드래곤이 아니셨다면 진즉에 목숨을 잃으셨을 테니.”

“에녹!”

화를 참지 못한 아이작이 손을 휘둘렀다. 곧 강렬한 마찰음이 집무실 안을 울렸다.

아이작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에녹의 고개가 돌아가 있는 상태였다.

가뜩이나 상처가 잔뜩 난 볼 위로 자신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는 것이 보였다.

터진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것도.

“에, 에녹…… 그러니까 이건…….”

아이작이 덜덜 떨며 에녹을 향해 다시금 손을 뻗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한 번도, 단 한 번도 매를 든 적이 없었다. 에녹은 그럴 필요가 없는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에녹은 아이작과 달리 아무런 동요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조금 홀가분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설명해 주실 필요는 없어요, 아버지. 차라리 이게 나으니까요.”

“아니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아무런 말도 하지 마세요.”

“…….”

“제가 얻고 누리고 산 그 모든 것들이 누군가의 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때보다는 이게 훨씬 낫습니다.”

에녹이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차라리 우는 것이 나았을 정도로 서글픈 웃음이었다.

“저를 때리신 그 손으로 도대체 몇 명을 죽이셨습니까?”

“…….”

“아니, 정정하겠습니다.”

에녹이 입안에 고인 피를 뱉었다. 바닥에 깔린 카펫 구석이 에녹의 입에서 나온 피로 물들었다.

그 모습을 보자 얼마 전 일이 떠올랐다.

로레이나가 데프론 공작저를 방문한 날, 집무실에 갈기갈기 찢긴 채 떨어져 있던, 차에 물든 손수건이.

“앞으로 몇 명을 더 죽이실 생각이세요?”

“아아, 에녹.”

작게 탄식하던 아이작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뻗어 에녹을 끌어안았다.

뿌리칠 것이라는 생각과 다르게 에녹은 얌전히 품에 안겼다.

“미안하다, 내가 미안해…….”

“…….”

“정말 미안하다, 에녹.”

아이작이 손을 들어 자신의 것과 똑 닮은 은색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이토록 소중한 아들에게 손을 댔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다. 내가 약속하마.”

“……아버지.”

“그러니 너도 그만하거라.”

아이작이 에녹을 자신의 몸에서 천천히 떼었다. 아이작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그에 에녹은 조금 안심했다. 그가 다음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도서관을 전전하는 일은 그만두거라, 에녹.”

“…….”

“네가 찾는 것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야. 지금 세상에 마법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다 옛날이야기다.”

아이작이 에녹의 뺨을 걱정스럽게 살피며 물었다.

“알겠느냐, 에녹?”

그 물음에 에녹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각했다.

‘아니요, 아버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절대 그냥 옛날이야기일 리가 없었다.

정말 그랬다면 아이작이 그 물건을 찾아야 한다며 난리를 쳤을 리 없을 테니까.

자신에게 찾는 것을 그만두라고 말할 일도.

‘역시 그 물건을 이용해 뭔가를 하실 생각이야.’

그리고 그 대상은 아마도 로레이나와 레오나드일 것이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왜 나한테 하시는지.’

아이작은 자신이 죽인 수많은 이들에게 관심도 없었다.

아마 그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에녹은 아까 자신이 했던 말을 정정하기로 했다. 현재의 데프론 공작가는 살인귀의 후손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피를 먹고 사는 살인귀 그 자체였지.

그리고 그것은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설령 그것을 자신이 몰랐다고 하더라도.

‘몰랐다고 해서 이미 누린 것들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야.’

지금껏 에녹이 누린 모든 것들은 전부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만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다.

‘……대신 앞으로 벌어질 일을 막으면 돼.’

이미 레오나드는 안정적으로 즉위했다.

아이작이 레오나드를 끌어내릴 명분은 없었으니 그 물건만 없다면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 그러면 되는 거야.’

에녹은 여전히 자신의 뺨을 살피고 있는 아이작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그의 말에 안심이라도 한 것처럼.

녹색 눈동자 안에 아까와는 다른 결연한 빛이 맴돌았다.

* * *

“이거 어때?”

“무슨 소리야. 며칠 전에 이미 저 목걸이로 하기로 정했잖아.”

“그건 그런데 지금 보니까 이게 더 화려하고 예쁜 거 같아서…….”

“……그런가?”

벌써 한 시간째 반복되는 상황에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저 말만 몇 번째야.

이대로는 도저히 결정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재빨리 눈앞에 있는 루비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이러다가 무도회 끝나고 나서야 나가겠네.

“그냥 이걸로 할게, 됐지?”

“앗, 백작님! 그래도 조금 더 고민해 보시는 게…….”

“그러다 늦겠어. 어차피 다른 장식도 붉은색이니 목걸이도 같은 계열로 하는 게 좋잖아.”

“그건 그렇지만…….”

치장을 도와주던 시녀가 시무룩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왜 저런 얼굴을 하는지는 알았다.

오늘은 모두가 목 빠질 만큼 기다리던 황실 무도회가 열리는 날이었으니까.

‘황실 무도회이니만큼 더 예쁘게 꾸며주고 싶었겠지.’

게다가 내 파트너는 다른 사람도 아닌 레오나드였다. 이 나라, 카일룸 제국의 황제.

눈에 안 띄려야 안 띌 수가 없는 자리지. 그러니 지금 상황을 이해는 한다만…….

‘……지금만으로도 이미 충분한걸.’

잘난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오늘 내 모습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연분홍빛 머리는 길게 늘어뜨린 뒤 보석이 달린 꽃장식으로 마무리했고 어깨를 드러낸 진녹색 벨벳 느낌의 드레스는 별이라도 박힌 듯 반짝반짝 빛이 났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레오나드의 눈동자 색에 맞춘 장신구들이었다.

완전히 옷을 맞추는 건 뭔가 조금 부끄러워서 생각해 본 방법이었는데 나름 괜찮은 거 같았다.

원래부터 로레이나가 예쁘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확실히 전문가의 손길을 받으니 다르구나.’

시한부 인생만 아니었다면 이 외모 자랑하려고 동네방네 뛰어다녔을 텐데. 아쉽게 되었네.

‘어쩔 수 없지.’

옆에서 메리와 다른 시녀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는 것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자.

“폐하께서는 지금 뭐 하고 계셔?”

“준비는 끝나셨고 잠깐 집무실에 가셨다고 들었어요. 급하게 마무리할 서류가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

그럼 내가 집무실로 가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 어차피 가는 길이기도 하고 이편이 시간도 절약이 되니까.

“다 끝난 거지? 그럼 나 집무실로 갈게.”

“……백작님께서 집무실로 가신다고요? 폐하께서 에스코트하러 올 테니 기다리시라고 하셨는데…….”

메리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조용히 속삭였다.

발까지 동동 구르는 것을 보아하니 내가 얌전히 기다리기를 어지간히 바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레오나드가 올 때까지 방에서 기다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는 일도 없이 가만히 있으면 자꾸만 안 좋은 생각이 난단 말이야.

가령 내가 레오나드를 따라 황궁에 온 것이 과연 잘한 선택이었을까 같은…….

‘그만, 제발 그만 생각하자.’

내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

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남자 주인공인 레오나드의 옆이라는 건 확실하니까.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젓고는 뺨을 살짝 내리쳤다. 그에 시녀들이 기겁하며 재빨리 다가와 머리와 화장을 다시금 손을 봤다.

이제야 정신이 조금 드는 느낌이었다.

“그냥 내가 갈게. 꼭 남자가 에스코트하라는 법은 없잖아?”

“……네? 물론 그런 법이 있는 건 아니지만 보통…….”

“그럼, 됐어. 아무 문제 없네.”

이미 에녹을 에스코트했었던 전적도 있는데 이제 와 새삼스럽게 무슨.

물론 그때는 정식으로 한 것이 아니긴 했지만.

나는 살짝 심호흡한 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할 일이 많았다.

레오나드의 파트너 역할을 잘 해내야 한다는 것도 중요했지만 오늘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귀족들의 실물을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지.’

어떻게 보면 며칠 뒤 있을 회의를 예행 연습하는 셈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설마 초상화랑 실물이 심하게 다르지는 않겠지?’

그럼 큰일인데.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나는 어느새 레오나드의 집무실 앞에 도착해있었다.

어쩐지 긴장이 되는 마음에 작게 심호흡을 한 뒤 문을 두드렸다. 나라는 것을 알리자마자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천천히 문을 열자 레오나드가 허둥지둥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여기까지 왜 왔어. 내가 곧 가려고 했…….”

“에스코트하러 왔어요, 레오나드.”

기분이 가라앉아 있다는 것을 티 내지 않기 위해 손을 내밀며 일부러 더 활짝 웃었다.

정말 기쁘다는 듯이 눈꼬리를 휘면서.

감정을 숨기는 일은 내가 제일 잘하는 것 중 하나였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내 얼굴을 마주한 레오나드가 멍한 얼굴로 말끝을 흐린 순간, 나도 모르게 긴장하게 되었던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눈치를 챘을까.’

떨리는 마음에 두 손을 말아쥐었을 때 레오나드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소 얼빠진 중얼거림과 함께.

“……그냥 무도회 취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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