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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44화 (44/144)

#44화

“……네?”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서 기억을 되짚어보았지만 그래도 들리는 말은 같았다.

지금 무도회를 취소하겠다고 말한 거 맞지?

……그것도 이제 한 시간 정도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

“레오나드.”

“응?”

“혹시 미쳤어요?”

그에 내 손을 잡기 위해 달려오던 레오나드가 발걸음을 멈춘 채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했고 꽤 처량해 보이기도 했지만…….

……어림도 없지.

“갑자기 또 왜 그러는 거예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있지. 아주 심각한 문제가.”

레오나드가 제법 진지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와 내가 내밀고 있던 손에 제 손가락을 얽었다.

곧 따스한 온기가 닿았지만 그걸 느끼고 있을 새는 없었다.

‘심각한 문제라고?’

뭐지? 또 데프론 공작이 뭘 하기라도 한 건가.

하긴,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저번에 내가 데프론 공작저를 한바탕 뒤엎고 온 것을 생각하면 이제 슬슬 반응이 올 때도 되었으니까.

아니, 그 성격을 생각하면 오히려 늦은 감이 없지 않지.

“무슨 일이에요? 혹시 제가 데프론 공작가에서 벌이고 온 일 때문에 그래요?”

“아니.”

레오나드가 설핏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 웃음이 나오나.

“레오나드.”

나직이 이름을 부르자 레오나드가 그제야 입가에 퍼져 있던 웃음을 거뒀다.

꽤 진지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메리와 시녀들을 서둘러 내보냈다.

등 뒤로 문이 완전히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상황에서 큰일이라고는 아이작 데프론과 관련된 일밖에 없는 거 같은데 왜 아니라는 거지.

‘혹시 저번에 내가 잘못한 거 책임져달라고 한 것 때문에 그러나?’

설마 하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지만, 곧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그래, 레오나드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제가 저번에 마차 안에서 노후까지 책임져달라고 한 거 농담인 거 알죠?”

물론 아예 농담은 아니긴 했지만 되도록 확실히 말해 주는 게 좋겠지.

이렇게 무슨 일이 생겼는데도 나한테 숨기라고 그런 말을 했던 건 아니란 말이야.

“그 부분은 제 잘못이니까 혹시 일이 잘못되면 제가 수습할게요.”

“어떻게 하려고?”

“그야 제가 직접 공작을 만나서 이야기를…….”

“아니.”

혹시 몰라 문밖의 인기척을 확인할 때쯤이었다.

아까와 같지만 명백히 다른, 다소 낮아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선명한 온도 차에 그제야 나는 내 손을 감싸던 온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내 손가락 사이마다 얽혀 있는 레오나드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나는 네가 그날 공작을 때리고 공작가에서 난동을 부렸다고 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테니까.”

“…….”

“그러니 네가 혼자서 공작을 대면하는 일은 없을 거야, 로레이나.”

내 손끝에 닿아있던 손가락이 살짝 미끄러져 내려가더니 손바닥을 느리게 훑었다.

손바닥을 치료해 주던 날 밤과 겹치는 모습에 간지러운 감각이 되살아났다.

“절대로.”

그 말을 끝으로 집무실 안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작은 한숨 소리조차도 함부로 낼 수 없는 상황에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붉은 눈동자 안에 깃든 애정에 잠식되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언제까지 저 감정을 모르는 척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어?”

레오나드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리자 집무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편지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매우 눈에 익숙한 녹색 편지 봉투가.

“……에녹?”

내 입에서 나온 이름에 집무실 책상 쪽으로 고개를 돌린 레오나드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 행동만으로도 내 생각이 맞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언제 온 거예요? 제 앞으로 온 거죠?”

“……그래.”

이 분위기를 깨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에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집무실 책상 쪽으로 향했다.

그에 맞잡고 있던 손이 떨어졌지만,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뒤를 돌아 눈이라도 마주치면 애써 숨긴 감정이 다 드러나 버릴 것 같아서.

다행히도 레오나드는 내가 편지를 집어 들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확인해보니 정말로 에녹이 보낸 것이 맞았다.

애초에 녹색 편지지를 쓰는 사람이 그리 흔하지 않았으니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거의 없었지만.

‘무슨 일이지? 편지를 다 보내고.’

만나지 못했던 4년 동안에는 연락 수단이 그것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지 않은가.

‘만나려면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있으니 굳이 쓸 필요 없었을 텐데.’

지금 열어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무도회 시작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일단 걸음을 옮겼다.

메리에게 방에 갖다 놔달라고 해야지.

“갈까요?”

아무런 일도 없었던 척 레오나드에게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연거푸 한숨을 내쉬던 레오나드가 내 손 위에 손을 얹었다.

“좋아.”

그에 빙그레 웃으려던 찰나 레오나드가 잡은 손을 그대로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마음에 안 드는 기색이 다분한 목소리로.

“단, 에스코트는 내가 할래.”

그 뾰로통한 음성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며 레오나드에게 손을 얹었다.

본격적인 무도회의 시작이었다.

* * *

“떨려?”

레오나드가 무도회장 입구에 서서 크게 한숨을 내쉬는 나를 보며 물었다.

당연하지. 그럼 안 떨리겠어?

‘지금 이 안에 사람이 얼마나 많을 텐데.’

레오나드의 등장이 맨 마지막이기 때문에 지금쯤 우리가 들어갈 문으로 시선이 집중되어있을 것이 분명했다.

즉위식도 생략한다고 했으니 이번 무도회는 귀족들에게 나름 큰 행사이고 놓칠 수 없는 기회일 테니까.

문을 열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쪽을 보고 있을……. 아, 아니야. 생각하지 말자. 더 긴장되잖아.

“레오나드, 저 지금 괜찮아요? 드레스 안 어울리지는 않아요?”

레오나드의 팔에 손을 얹은 채로 숨을 다시 크게 들이쉬었다.

분명 아까까지는 자신감이 넘쳤는데 왜 들어갈 상황이 되니 이것저것 신경 쓰이는 게 많은 거지.

“괜찮아. 잘 어울려.”

“정말요? 그냥 예의상 하는 말 아니죠?”

“정말이라니까. 그렇게 신경 쓰여?”

“당연하죠.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 서는 건 처음이란 말이에요.”

“다이아나의 파티에서는 그렇게 잘 나섰으면서.”

“그때랑은 느낌이 아예 다르잖아요. 그리고 그때도 엄청 떨었거든요?”

작게 투덜거리자 낮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레오나드가 내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흡사 비밀 이야기라도 해 주려는 모양새였다.

“내가 그 긴장감, 한 번에 날려줄 수 있는데.”

“어떻게요?”

“아까 왜 무도회 취소하려고 했는지 못 들었잖아. 그거 들으면 좀 괜찮아질걸.”

아, 맞다. 그랬었지.

중간에 다른 이야기로 새는 바람에 미처 대답을 듣지 못했었다. 꽤 중요한 이야기 같았는데.

“살짝 이쪽으로 와봐.”

그에 옆으로 몸을 기울이자 그대로 레오나드가 내 귓가에 입술을 내렸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레오나드가 나직이 속삭였다.

“그거, 오늘 네가 너무 예뻐서 그런 거야.”

“…….”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 주기 싫었거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금 고개를 든 레오나드가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대로 차려입으니 새삼 레오나드가 그림 속에서 톡 하고 튀어나온 것처럼 비현실적인 외모라는 게 다시금 눈에 들어왔다.

“이제 긴장 풀렸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레오나드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를 이끌었다.

“이제 들어가자.”

레오나드의 팔에 손을 얹은 채였기에 나는 여전히 멍한 상태에서도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곧이어 레오나드와 나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귀를 찢을 정도로 큰 박수 소리도 들렸고 예상대로 이쪽을 향하는 수백 명의 시선도 보였다.

커다란 샹들리에가 그 화려함을 증명이라도 하듯 눈이 부시게 반짝였다. 무도회장 곳곳에 박힌 보석이나 장식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내 눈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다.

“갑작스러운 자리였을 텐데 이렇게 많이 참석해 줘서 고맙군.”

살짝 웃어 보인 레오나드가 귀족들을 향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그때까지 정신을 못 차리지 못했다.

레오나드의 팔에 얹은 내 손에 땀이 나지는 않는지, 빨라진 심장 박동이 레오나드에게 들리지는 않을지.

자꾸 그런 것들만 신경 쓰여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런 미친.’

긴장 풀어준다더니 다른 것으로 긴장하게 만들어버리면 어떻게 해!

소리 없는 외침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아, 망했어. 아직은 늦지 않았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이 불과 며칠 전인데.

‘저런 말까지 하면 계속 모르는 척을 하는 것도 힘들잖아.’

괜히 원망스러운 마음에 레오나드를 살짝 흘겨보자 그가 불쑥 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비서관인 아멜리오 백작이다. 누군지는 다들 알 거야.”

아, 벌써 내 차례인가. 조용히 심호흡하며 내 소개를 하려던 순간이었다.

갑작스럽게 레오나드가 내가 얹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이상이다. 다들 파티를 즐기도록.”

……어? 지금 뭐라고?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멍하니 있던 나는 레오나드가 몸을 돌리고 나서야 급하게 발을 움직였다.

‘이렇게 갑자기 움직이면 어떡해.’

아니, 그것보다 이대로 끝내도 되는 거야?

다른 데 정신을 팔고 있었던 나도 짧다는 것이 단번에 느껴질 정도인데?

혹시 몰라서 슬쩍 뒤를 돌아 무도회장을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나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듯 이쪽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는 얼굴들이 보였다.

“……레오나드, 레오나드!”

레오나드를 따라가며 다급히 그를 불렀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는 않을 정도의 크기로.

꽤 시끄러운 무도회장 속 매우 작게 속삭인 소리였는데도 레오나드는 금방 뒤를 돌았다.

“왜?”

애초에 나만 보고 있었던 것처럼 레오나드가 눈웃음치며 웃었다.

안 그래도 화려한 얼굴이 무도회장 샹들리에와 기가 막히게 어우러졌다.

으으, 아무리 생각해도 저 얼굴은 너무 심장에 해로웠다.

“그냥 이렇게 가도 되는 거예요?”

“응, 필요한 건 다 말했잖아.”

“그래도 즉위식 대신이고, 처음 참여하는 공식 행사인데 조금 더 모습을 보여 주는 편이 낫지……. 앗.”

말을 하던 도중 미처 앞을 살피지 못한 탓에 지나가던 사람과 부딪혀 중심을 잃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귀족들 앞에서 볼썽사납게 자빠지지는 않았다.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답게 레오나드가 나를 멋들어지게 받아냈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레오나드의 긴 팔이 내 허리를 감고 있었다.

“괜찮아?”

걱정스럽게 묻는 레오나드를 뒤로 한 채 나는 귀족들을 향해 싱긋 웃어 주었다.

물론 속은 말이 아니었지만.

‘맙소사. 첫 등장부터 넘어질 뻔하다니.’

일제히 이쪽으로 향한 시선 때문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넘어가면 뭣도 아니게 돼.’

그럼 ‘로레이나 아멜리오’의 첫인상은 그냥 ‘소문대로 예쁜 하프 엘프 아가씨’ 정도로만 남겠지.

나는 그런 결말을 원하지 않았다. 그거야말로 최악이잖아.

레오나드의 곁에 있기로 한 이상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어정쩡한 자기소개는 사양이었다.

‘보여 줄 수 있는 건 다 보여 줘야 해.’

잠시 고민하던 나는 여유로운 미소를 유지한 채 내 허리를 감싼 레오나드의 손 위에 손을 얹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레오나드의 몸이 움찔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대로 스텝 밟아요. 뒤로 천천히.”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잠시 당황하던 레오나드가 그대로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았다.

그에 나도 발을 맞추자 제법 그럴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춤을 추던 중, 거리가 가까워지자 잠시 눈치를 살피던 레오나드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마저도 매우 작은 목소리였다.

“엄청 자연스러운데? 춤은 언제 연습했어?”

“……실제로 춰보는 건 처음이에요. 자연스럽다니 다행이네요.”

“그런 것치고는 순서도 다 알고 있는데?”

“무도회를 연다고 하길래 급히 외운 거예요.”

이것도 내가 하프 엘프가 아니었더라면…….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아찔해져서 그만두었다. 눈대중으로 익힌 것치고 결과가 좋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다행히도 다른 사람들 눈에도 그렇게 보였던지 귀족들이 감탄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격양된 감정들을 쭉 살피다가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어때요? 제 첫 등장 성공적인 거 같아요?”

“뭐?”

“자기소개해 봤는데 괜찮았냐는 말이에요.”

그에 잠시 멍한 얼굴을 하던 레오나드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뒤 또다시 가까워진 거리로 인해 레오나드의 입술이 내 귓가에 가까이 다가왔다.

그 거리에서 레오나드가 다정히 속삭였다.

“원래부터 성공적이었고 괜찮았어. 남들한테 보여 주고 싶지 않을 만큼.”

“…….”

“우리가 처음 만난 날도.”

그 말이 끝나고 다시금 거리가 멀어졌다.

나는 레오나드의 손을 잡고 한 바퀴를 돌며 며칠을 매달려도 끝나지 않는 생각에 잠겼다.

볼에 열이 오르고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며 뛰었다.

더 부정하기도 어려울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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