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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45화 (45/144)

#45화

무도회는 제법 성공적이었다.

다행히도 귀족들의 얼굴은 그럭저럭 알아볼 수 있는 정도여서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귀족들도 레오나드를 처음 본 날이라 그런지 적대감이 있더라도 특별히 드러내지 않았다.

‘어쩌면 그냥 레오나드가 두려워서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명목상 평화롭게 황위 교체가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레오나드의 반란 당시 성문부터 황제의 궁까지 길이 한 번에 뚫렸다는 건 알음알음 퍼져 있는 사실이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지는 않겠지.

‘황궁을 지키던 황실 기사들이 실력 없는 자들도 아니고.’

그러니 당분간은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부디 이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면 좋을 텐데.

‘그래도 아무런 일없이 마무리되는 것 같아서 다행…….’

그 순간이었다. 살짝 고개를 들자마자 시야에 익숙한 은발이 들어왔던 것은.

그것의 주인이 오늘 내게 편지를 보낸 이였더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제국의 큰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아이작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반짝거리는 은발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쏟아져 내렸다.

그 예의 바른 몸짓에 주변 사람들의 입에서 미처 막지 못한 탄성이 터졌다.

‘……당연한 일이지.’

아직까지 그들의 머릿속에서 아이작 데프론은 황제 그 자체였을 테니.

그건 레오나드를 황제로 인정하고 말고와는 별개인 문제였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제일 높은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저렇게 고개를 숙이는데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겠어.

물론 공작의 실체를 아는 나로서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둘만 있을 때는 나를 손수건의 얼룩 취급하더니.’

사람들이 빨리 저 실체를 알아야 할 텐데. 덕분에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하여간 곱게 보려야 볼 수가 없는 인간이야.’

조용히 혀를 차며 잠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줄곧 레오나드를 향했던 고개가 잠시 나를 향해 돌려졌다.

에녹과 닮은 얼굴이 나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녹색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크게 휘어졌다.

티끌 하나도 묻지 않은 깨끗한 웃음.

그 미소에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어쩐지 토할 것 같았다.

“우욱…….”

밀려오는 역겨움에 더 참을 수가 없어서, 다급히 레오나드를 불렀다.

“……폐하.”

레오나드는 저 짧은 부름이 끝나기도 전에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원래부터 나한테만 신경을 두고 있었던 것처럼.

“괜찮아?”

“저 잠깐만 좀 쉬고 올게요…….”

빈말이라도 괜찮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재빨리 대답했다.

다행히도 레오나드는 더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아멜리오 백작을 잘 호위하도록.”

기사들에게 명령한 레오나드가 내 어깨를 감싸 기사들 쪽으로 이끌었다.

레오나드의 측근인 모양인지 전부 다 눈에 익은 사람들이었다.

금세 기사들에게 둘러싸이는 나를 힐끗 보는가 싶던 아이작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레오나드를 향해 웃었다.

나는 그 옆으로 제럴드가 끼어드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자리를 벗어났다.

‘제럴드가 있으니 내가 없어도 아무 문제 없겠지.’

어디든 간에 저 공작 얼굴만 보이지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딱히 갈 곳도 없는데 다이아나한테나 가 볼까.

‘그러고 보니 무도회 시작하고 나서 보지 못한 것 같네.’

단기간에 파트너를 구하는 것이 힘들어서 결국 제럴드와 같이 왔다고 들었는데.

다이아나를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익숙한 갈색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다이아…….”

나는 큰소리로 다이아나를 부르려다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칵테일로 이름을 날렸다는 사람답게 다이아나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냥 지나가자.’

이 인파를 어떻게 뚫고 들어가겠어. 그러다가 괜히 몸 상태만 나빠질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인적 드문 곳에 가서 좀 쉬고 오는 게 훨씬 낫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뒤따르던 기사들에게 물었다.

“여기에 바람을 쐴 수 있을 만한 곳이 있을까요? 안전한 곳으로요.”

“테라스로 가시는 건 어떠십니까?”

“으음…….”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테라스가 혼자 있기에는 좋지만, 너무 외부와 단절되는 것도 위험하다.

게다가 기사들과 테라스 안에 들어가서 커튼 치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랬다가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테라스 안에 같이 못 들어가면 기사들의 호위를 안 받는 거나 다를 게 없고.’

“테라스보다 좀 더 탁 트인 곳은 없을까요? 제가 답답한 것을 싫어해서요.”

“흐음. 마침 딱 좋은 장소가 있긴 합니다. 안내해드릴까요?”

“네, 감사해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기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내 바람대로 제법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그러면서도 무도회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라 위험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사람들 눈에 띌 수 있어 보였다.

“사람이 없어서 다행…….”

안도하며 중얼거리던 순간, 수풀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사람이 있었나?

“거기 누구 있나요?”

고개를 내밀고 물었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상하다. 분명 누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는데.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천천히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앞을 조금만 더 잘 보고 갔더라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있다면 그냥 나오……. 으앗.”

……설마 발밑에 저렇게 큰 나무뿌리가 있을 줄이야. 아니, 물론 잘 살피지 못한 내 잘못이기는 하지만.

‘넘어지면 꽤 아프겠네.’

오늘만 벌써 두 번째 넘어지는 내 모습에 곁에 있던 기사들이 놀란 얼굴로 황급히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괜히 뛰지 마세요. 어차피 그 거리에서는 못 받을 텐데.

다치는 건 상관없으니 비싼 드레스만 안 더러워졌으면 좋겠다는 허황된 꿈을 꿀 때쯤. 가만히 있던 수풀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급히 나온 누군가가 안정적으로 나를 받아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몸조심해요, 제발.”

매우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그 부드러운 미성에 나는 곧바로 내 밑에 깔린 사람이 누구인지 눈치를 챘다.

“……에녹? 에녹이에요?”

“지금 그게 중요해요? 크게 다칠 뻔했는데.”

……아니, 그럼 누군지가 중요하지, 안 중요해?

에녹이 아니라면 나는 지금 생판 처음 보는 사람 품에 안겨있다는 건데.

하지만 그 말은 내가 다치지 않았나 살피는 손길에 그만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나오면 내가 할 말이 없잖아.

“에녹, 저 이제 괜찮아요. 그러니까 그만 살펴봐도 돼요.”

“그래도 저랑 부딪혔을 텐데.”

“……이런 상황은 보통 부딪혔다고 안 하거든요? 잘 받아줬다고 하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예상대로 이제 나에게는 제법 익숙한 녹색 눈동자가 보였다.

아이작의 것과 달리 언제나 맑은 색채에 숨통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잘생긴 얼굴도 그대로…….

……아니, 잠시만. 이게 뭐야?

“……에녹.”

“예?”

“얼굴이…….”

그 말에 나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내려보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아…….”

내 어깨를 붙잡던 손이 다급히 올라가더니 금세 얼굴을 가렸다. 작은 얼굴이 큼지막한 손에 의해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해. 이미 다 봤는데.

“뭐예요? 어디서 다친 거예요? 누구한테 맞았어요?”

“아니, 그게…….”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딱 봐도 넘어져서 생긴 상처는 아닌데. 누구예요?”

어떻게 얼굴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어. 심지어 뺨에는 피딱지까지 제대로 앉았네.

작게 중얼거리며 살피자 손가락 사이로 눈만 내놓은 채 나를 보던 에녹이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뭐예요, 갑자기 왜 웃어요?”

“아, 별것 아니에요.”

눈을 가늘게 뜨는 내 모습에 한참을 키득거리던 에녹이 그제야 손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얼굴에 가득한 웃음기는 여전히 지우지 않은 채였다.

“그냥 이렇게 다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끔찍한 소리 하고 있네, 이 사람이? 지금 자기 얼굴이 어떤지는 알고 있는 거야?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보자 그에 또 에녹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물론 찢어진 입가 때문에 바로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다물었지만.

“지금 웃음이 나와요? 그만 웃어요. 그러다 상처 벌어진다고요.”

“알겠어요. 화내지 말아요.”

설핏 웃은 에녹이 내 몸을 일으켜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도 내 드레스는 딱히 손상된 곳이 없었다. 그에 비해 에녹의 옷은…….

“……아, 다시 무도회장으로 돌아가는 건 무리겠네요.”

내 시선을 이해한 에녹이 옷에 덕지덕지 묻은 흙을 털더니 다시금 웃었다.

아, 진짜. 웃지 말라니까 그러네.

“그런데 왜 수풀에 숨어 있었던 거예요? 꼭 뭐라도 잘못한 사람처럼.”

“원래 숨을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목소리를 듣고 로레이나라는 것을 알아버렸거든요.”

나라는 걸 알아서 그런 거라고? 그러면 오히려 더 안 숨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역시 저한테 뭐 잘못한 거 있죠?”

“아니, 그게 아니라…….”

말끝을 흐리며 망설이던 에녹이 곧 뒷덜미를 긁더니 나직이 대답했다.

“보기 흉하잖아요. 몸이야 옷으로 가릴 수 있지만, 얼굴은 가리지도 못하는데.”

“아니, 그 좋은 걸 왜 가리…….”

“예?”

이번에는 내가 말을 삼키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맞잖아. 저 좋은 얼굴을 왜 가리냐고.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에녹이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여전히 부끄러운 모양인지 좀처럼 얼굴에서 손을 멀리하지 못하면서.

잠시 그 자세를 유지하던 에녹의 입에서 결국 작은 한숨이 터졌다.

“좋은 모습만 보여줘도 모자란 상황인데 일이 이렇게 되네요.”

“…….”

“무도회 온다고 나름 신경을 쓴 건데 상처 때문에 별로 효과도 없고요.”

……아니, 틀렸다. 상처 따위는 저 잘생긴 얼굴에 하나도 영향을 주지 못한단 말이다.

역시 이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잘생겼는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당신한테는 진짜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그것보다는 에녹이 무도회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게 더 문제죠.”

“무도회를 즐길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으니 그 부분은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마저 몸을 일으키던 에녹이 작게 신음을 흘렸다. 보아하니 몸도 얼굴만큼이나 성치 못한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에녹을 향해 손을 뻗자 내 도움을 받은 에녹이 몸을 일으키더니 근처 벤치에 앉았다.

이대로 에녹을 혼자 두고 갈 수 없었던 나 역시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어차피 아이작이 레오나드와 떨어지기 전까지 무도회장으로 못 돌아가니까.

“주변 사람들이 그냥 쉬라고 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다쳤는데?”

“다들 그렇게 말했는데. 제가 오겠다고 고집을 좀 부렸습니다.”

“왜요? 그래 봤자 그냥 무도회인데 뭐 그리 볼 게 있다고…….”

“볼 거 있잖아요.”

이어지는 말을 끊은 에녹이 나를 향해 눈을 접으며 웃었다.

볼을 붉게 물들이며 입술을 달싹이는 모습이 시야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지금도 계속 보고 있는데.”

……미쳤다, 미쳤어!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지?’

레오나드나 에녹이나 둘 다 평소에 부끄러움도 많이 타면서 이상하게 가끔 낯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니까.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아니야, 이러면 분위기 더 이상해져.

‘뭐라도 말을 해야…….’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키며 에녹을 바라보았다. 뭐 없을까. 적당히 이 상황을 넘길 만한 화제가…….

그 순간, 무도회장에 오기 전에 봤던 편지가 머릿속을 스쳤다.

나이스! 아직 신이 나를 버린 건 아니구나!

“아, 맞다. 오늘 편지 받았어요. 아직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황궁으로 편지를 보내는 건 처음이라 어떨지 걱정했는데, 잘 도착했다니 다행이네요.”

자연스러운 대화에 나는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오려던 것을 꾹 참았다.

일단 어떻게든 넘겨서 다행이긴 한데.

“편지는 왜 보낸 거예요? 이제 만나려면 만날 수 있으니 굳이 편지를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의아한 마음에 일부러 장난스레 물었다. 마찬가지로 장난스럽게 받아칠 것이라는 내 예상과 달리 에녹은 잠시 말이 없었다.

아까까지는 그래도 수줍은 기색이던 에녹의 눈이 제법 진중한 빛을 띠었다.

“저번에 말했었잖아요.”

“…….”

“황궁 도서관 앞에서 만났던 날.”

그리 길지도 않은 말. 그 말에 담긴 전혀 얕지 않은 감정.

그 어울리면서도 부자연스러운 느낌에 나는 그만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에녹이 그날 나에게 건넸던 그 잎사귀가 너무나 크게 다가와서.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있겠다고.”

그리고 그것을 에녹이 입 밖으로 내뱉은 순간, 잎사귀는 걷잡을 수도 없이 자라나 시야를 뒤덮어 버렸다.

“그 약속을 지키려 한 것뿐입니다.”

더는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없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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