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46화 (46/144)

#46화

“아…….”

나는 에녹을 가만히 바라보며 조용히 신음을 삼켰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행동이었다.

에녹 역시 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던지 곧바로 다음 말을 꺼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미 뱉은 말이 없던 것이 되지는 않았고-.

그렇기에 분위기가 묘하게 바뀐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제가 보낸 편지, 아직 안 읽었다고 했죠?”

“……아, 네. 편지를 받은 게 무도회 준비를 할 때쯤이라.”

“그럼 그냥 지금 말할게요. 사실 급하게 물어볼 것이 있어서 편지를 보낸 거였거든요.”

“급하게 물어볼 거라고요?”

의아함에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자 에녹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물론 아까 한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아니에요. 제 마음 전하려고 했던 것도 사실…….”

“아, 알아요! 당연히 알죠!”

손을 내저으며 하는 말에 잠시 웃던 에녹이 곧 얼굴을 굳혔다.

아까와는 표정이 사뭇 달라진 것이,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예전에 아멜리오 백작가에서 지냈을 때 저택 서재에서 셋이 놀았던 적이 있었잖아요.”

“그랬죠.”

주로 밖에서 놀았지만, 가끔 서재에서 다 같이 책을 읽거나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기도 했으니까.

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에녹이 곧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서재에 오래된 책들이나 자료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맞나요?”

“네, 맞아요. 백…… 어머니가 꽤 오래 살았던 엘프였으니까요. 애초에 어머니 소유였던 곳이라 예전 책들이 많거든요.”

중간에 말이 꼬일 뻔했던 것에 놀란 나는 에녹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백작 부인이라고 할 뻔했어.’

다른 사람에게 아멜리오 백작 부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라 그런지 그녀를 어머니라고 칭하는 것이 꽤 어색했다.

아멜리오 백작가에 있을 때도 좀처럼 백작 부부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니까.

‘이참에 백작 부부에 대해 조금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그동안은 워낙 일이 많아서 그 부분까지 신경을 쓰지 못했다.

최근에는 레오나드랑 에녹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고 그전에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방법을 찾느라 바빴으니까.

‘백작 부부가 죽은 게 로레이나가 12살일 때였지.’

내가 빙의했을 때 백작 부부의 장례식이 진행 중이었으니 이건 확실했다.

‘12살이면 부모님에 대해 꽤 알고 있을 나이야.’

부모님 이야기를 꺼린다는 식으로 대화를 피해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지 않은가. 그런 말이 소용없는 순간이 올 수도 있는 거니까.

안 되겠다. 무도회 끝나면 메리한테 어린 시절 이야기 좀 해달라고 해야겠어.

자연스럽게 물어보면 괜찮겠지.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혹시 몰라 다시 한번 에녹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다행히도 에녹은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이런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 보였다.

“……아, 혹시 300년 전 책도 있을까 해서요.”

“300년 전 책이요?”

“책이 아니어도 좋아요. 그냥 뭐든 간에 300년 전, 아니, 그러니까…….”

잠시 망설이던 에녹이 나와 눈을 맞추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마법이 존재하던 때의 물건이 필요해요.”

에녹의 말에 나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생각하지도 못한 단어에 눈이 크게 뜨였다.

‘……마법이라고?’

그러고 보니 저번에 황궁 도서관 앞에서 만났을 때도 에녹은 300년 전 자료를 찾으러 왔다고 했었지.

그때는 에녹이 갑작스레 고백하는 바람에 어물쩍 넘어갔지만…….

“황궁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지 못하셨나 봐요?”

이제는 그럴 수 없는 일이다. 에녹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의 주변 사람은 다르니까.

‘내가 말해 준 정보가 어떤 식으로 이용될 줄 알고 그냥 말해 줘.’

에녹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가 한 말이 아이작에게 넘어갈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었다.

“예, 마법이 있던 시대의 자료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더군요. 워낙 오래전이라 그런지.”

“다른 곳은요? 찾아보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이미 찾아봤습니다. 수도 내에 자료가 있을 만한 곳은 다 돌아다녔는데도 없더라고요.”

에녹이 손을 들어 벌겋게 달아오른 눈가를 쓸었다.

어쩐지 다친 것 말고도 몸이 많이 상해 보이더라니.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그래서 혹시 당신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했습니다.”

나와 좀처럼 눈을 맞추지 못하던 에녹이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그에 나는 살짝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왜 굳이 나한테 부탁을 하는 거지?’

아이작에게 부탁하면 어떤 식으로든 구해다 줬을 텐데.

분명 에녹이 말 한마디만 했으면 그런 책쯤이야 금방…….

‘……아니지.’

그렇게 해결되는 거였다면 애초에 에녹이 이렇게 혼자서 돌아다녔을 리 없다.

그것도 이렇게 몸이 상할 때까지.

‘그냥 아랫사람에게 시키면 되는 일을 가지고 왜 혼자 사서 고생을 하겠어.’

그렇다면 이유는 딱 하나였다. 지금 하려는 일이 데프론 공작의 뜻에 반하는 일일 경우.

‘또 아이작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건가.’

생각을 멈추고 잠시 에녹을 살폈다. 녹색 눈동자를 가린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사실 나를 찾아오는 것은 에녹에게 가장 쉬운 방법이었을 터였다.

에녹의 말대로 아멜리오 백작가에는 오래된 자료가 많았고, 황궁 도서관에도 없는 자료가 다른 곳에 있을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그러지 않았지.’

나한테 폐를 끼칠까 봐. 에녹은 그런 사람이니까.

고백도 제대로 거절 못 하는 비겁한 사람에게 변함없이 기다릴 테니 언제든 오라며 웃어 주는 사람.

‘왜 사람이 이렇게 착해빠져서.’

나는 에녹을 보며 조용히 신음을 삼키며 절망했다.

이런 생각을 한들, 괜한 위험을 감수하기 싫은 나는 어차피 거짓을 말할 것이고. 종국에는 그를 기만하게 될 테니까.

“……책은 못 가지고 왔어요. 급하게 나오느라 정신이 없었거든요.”

눈앞에 지금 내 방 책꽂이에 꽂혀 있을 노트 한 권이 아른거렸다.

에녹이 말한 조건과 딱 맞아떨어지는-.

“일단 길버트에게 편지를 보내보고 있다고 하면 알려 드릴게요.”

백작 부인이 남긴, 그녀의 일기장이.

* * *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 아멜리오 백작 부인. 엘레노아 아멜리오.

로레이나의 어머니인 엘레노아를 부르는 호칭은 많았으나 그중 가장 유명했던 것은 ‘마지막 순혈 엘프’였다.

내가 메리나 길버트에게 들은 것도 딱 여기까지만이었고.

‘……엘레노아가 원작에 나오지 않은 인물이라 딱히 알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명백한 오판이었다. 만약 정말로 아이작이 300년 전의 무언가를 찾고 있는 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니까.

‘일기장에는 어떤 내용이 있는 거지?’

그 일기장은 엘레노아가 살아 있을 적에 길버트에게 부탁한 것이라고 했다.

혹시라도 내가 아멜리오 백작가 영지를 떠나게 되는 일이 생길 경우 넘겨주라고.

처음에 들었을 때는 그냥 독립하는 딸에게 어머니로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거구나, 싶었는데.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그건 아닌 것 같단 말이야.

‘원래 보통 딸한테 자기 일기장을 넘겨주나? 편지 같은 걸 남기는 게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고아였던 터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런 경우가 흔한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역시 일기장을 한번 열어볼 필요가 있을…….

“로레이나!”

갑작스레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하던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다이아나가 손을 휘저으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빠르게 내가 있는 곳까지 도착한 다이아나가 힐끔 고개를 돌려 에녹을 보더니 다시 나를 보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요, 다이아나. 무슨 일 있어요?”

“헉…… 헉……, 폐하께서 찾고 계세요. 어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무슨 일인데요?”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급한 일이신 거 같던데.”

급한 일이라고? 혹시 누가 레오나드의 저주에 대해 눈치챈 건가?

혼란스러운 마음에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아, 맞다. 에녹이 있었지. 이렇게 다친 사람을 혼자 두기는 좀 그런데 이를 어쩐다.

‘나 때문에 옷도 망가져서 무도회장에도 못 돌아가잖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자 이런 나를 눈치챈 것인지 에녹이 살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저는 괜찮으니 빨리 가요. 폐하께서 찾으신다잖아요. 엄청 급한 일인 거 같은데.”

“그럼 공작가 사람이라도 부르고 갈…….”

“그건 제가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빨리 가요.”

다이아나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에 나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아나가 그렇게 해 준다면야 나야 안심이지.

“그럼 저 갈게요. 에녹, 다음에 봐요.”

에녹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나는 바로 뒤를 돌아 기사들과 함께 무도회장으로 달려갔다.

뒤에서 에녹이 어떤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 채로.

* * *

다이아나는 로레이나가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벤치에 앉아 있는 에녹이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말을 걸려던 다이아나는 에녹의 얼굴을 보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로레이나가 간 방향을 보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애달파서.

‘이건 상상도 못 한 상황인데.’

사실, 급한 일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로레이나가 에녹과 같이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놀라서 뛰어온 것이었지.

4년 전에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전해 듣지 못한 다이아나에게 에녹은 전 황태자이자 데프론 공작의 아들,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레오나드의 이름을 빌려 거짓말을 한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건 알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로레이나를 이런 위험한 사람과 둘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 분명 그러했는데…….

‘설마 데프론 공자가 로레이나를 좋아할 줄이야.’

뭔가 복잡해진 상황에 다이아나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던 순간, 에녹이 고개를 들었다.

생각보다 많이 다친 얼굴에 흠칫 놀란 다이아나를 보며 에녹이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가셔도 됩니다.”

“네?”

“저와 로레이나가 같이 있는 것이 불안해서 온 거 아닌가요?”

정곡을 찔린 다이아나가 뭐라 변명하려던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알고 계셨군요?”

“모를 수가 없죠.”

에녹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기분 좋은 느낌의 웃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또 나쁜 의도가 느껴지는 웃음도 아니었다.

“그 정도로 급한 일인데 폐하께서 기사 한 명만 보내실 리는 없으니까요.”

“…….”

“아무리 실력 좋은 기사라고 해도 말입니다.”

기사라고?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한 말에 다이아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에녹의 옆에 앉았다.

“죄송해요. 아무래도 제가 오해를 한 것 같네요. 직접 만나 보지도 않고 멋대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건데.”

에녹 데프론은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을 기사라고 해 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이아나는 자신보다 에녹과 4년간 알아 온 로레이나를 믿었다.

급한 일이 있다고 한 상황에서도 로레이나가 그 정도로 신경을 썼다면 분명 좋은 사람이겠지.

“아니요, 제대로 판단하신 것이 맞습니다.”

에녹이 다이아나의 상념을 가르고 나직이 말을 뱉었다.

“저는 그렇게 경계를 한 번에 푸실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생각보다 욕심이 많은 사람인지라.”

“욕심이요? 그 단어랑 거리가 제일 먼 분 같은데요.”

장난기 없는 진지한 말투에 작게 웃은 에녹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살짝 불어온 바람에 은색 머리칼이 이리저리 나부꼈다.

“저는 욕심쟁이가 맞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놓지 못하고 둘 다 가지고 싶어서 고민하고 있거든요.”

“그냥 둘 다 가지면 안 되는 건가요? 그런 사람들 많잖아요.”

“……그 둘이 함께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요?”

함께할 수 없는 것 두 가지라.

어떻게 하면 좋게 말할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다이아나가 앞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입을 뗐다.

역시 이런 식의 고민은 자신과 맞지 않았다. 그냥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말지.

“그럼 어쩔 수 없이 하나를 선택하셔야겠네요. 이대로면 둘 다 놓치실 거예요.”

에녹은 잠시 말이 없었다. 너무 직설적으로 말했나 싶어 그를 살피려던 찰나, 대답이 들려왔다.

“……그렇네요.”

그리고 다이아나는 보았다. 뭔가를 결심한 듯 아까와는 달리 흔들림이 없는 얼굴을.

“덕분에 제가 뭘 선택해야 할지 잘 알았습니다.”

말을 마친 에녹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다이아나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뭘 선택하기로 하셨는데요?”

다이아나를 보던 에녹이 말없이 웃었다.

바람이 불면 그대로 부서져 사라질 것 같은 희미하고 힘없는 웃음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