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다이아나의 말과는 달리 레오나드에게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기사들과 서둘러 돌아갔다가 어리둥절한 시선만 받았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다이아나가 뭔가를 착각했던 모양이네.’
레오나드가 즉위하고 처음 열린 무도회라 조금 정신이 없긴 했으니까.
그때가 마침 아이작이 물러나려던 순간이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이제 그 얼굴만 봐도 진저리가 난다고. 회의 때 그 얼굴을 또 봐야 한다는 게 끔찍…….
‘……아니,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사실, 아까부터 에녹이 했던 말 때문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냐고.
‘난데없이 마법이 있었던 시대의 물건이라니.’
마법과 관련된 모든 건 300년 전에 다 사라진 거 아니었어?
그래서 레오나드가 셀리아를 만나기 전까지 저주를 풀지 못하고 있는 거였잖아.
‘원작에 나오지 않는 숨겨진 이야기라도 있는 건가?’
참담한 상황에 나도 모르게 욕이 나올 뻔했다. 백번 양보해서 원작에 숨겨진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고 치자.
<크루시아>는 레오나드가 주인공인 1인칭 시점 소설이니까. 레오나드가 모르는 일이라면 언급이 안 될 수도 있지.
그것까지는 다 이해한다 이거야. 내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건…….
‘왜 하필 그런 중요한 물건의 단서를 데프론 공작이 가지고 있는 거냐고!’
물론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에녹이었지만 나는 그 물건이 에녹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잖아.’
에녹이 직접 쓰려고 찾는 것이었다면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 리 없을 테니까.
세상에 자기가 찾는 물건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이작이 하려는 짓을 막으려고 그러는 거면 모를까.
‘보아하니 아이작도 아직 그 물건을 찾지 못한 것 같기는 한데.’
그러니 에녹이 저렇게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는 거겠지.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약 아이작이 그 물건을 찾았더라면…….’
끔찍한 상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이작이 찾으려는 게 뭔지는 몰라도 그게 안 좋은 것이라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그 무언가로 하려는 건 뻔하지. 날 없애던가 레오나드를 없애던가 둘 중 하나일 테니까.
‘……아니면 둘 다던가.’
도대체 아이작이 찾으려는 물건이 뭘까. 도대체 뭐길래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에녹에게도 말해 주지 않은 거지?
난데없이 등장한 마법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데드 엔딩만 피하면 될 줄 알았더니 이제는 이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하는 거야?
세상에. 다른 것도 아니고 마법이라니…….
‘이 세계에서는 절대 생각할 일 없을 줄 알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마법을 쓸 줄 아는 사람은 셀리아뿐이잖아. 셀리아가 레오나드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아직 30년이나 남았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테니 아예 논외지.’
하아. 설마 레오나드의 저주를 푸는 일 말고 다른 일로 마법에 대해 고민하게 될 줄…….
아니, 잠깐만.
‘이거 혹시 레오나드의 저주와 관련 있는 거 아니야?’
순간, 소름이 돋아서 손을 들어 팔을 쓸어내렸다. 왜 진즉에 생각하지 못했지?
‘생각하니까 레오나드의 저주는 원작에서 마법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사건이잖아.’
하지만 원작에서 아이작이 이런 일을 벌였다는 내용은 없었는데?
아직 원작 시작 전이고 어차피 실패한 사건이니 아예 언급도 되지 않은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로레이나.”
머리 위로 불쑥 내려앉은 나직한 목소리에 나는 잠시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조금 더 위로 올리자 레오나드가 이쪽을 빤히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레오나드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모습을 눈에 담는 와중에도 내 머릿속에서는 아까까지 하던 생각이 이어지고 있었다.
‘혹시 원작에는 없던 사건이 일어난 건가?’
내가 죽지 않으려고 해서? 한낱 엑스트라가 남자 주인공 옆에 있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가정이었지만 충분히 가능성은 있었다.
아니, 확실히 이건 나 때문이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잖아.’
아예 없었던 존재가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는데 내용이 바뀌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아멜리오 백작가를 떠나는 레오나드를 붙잡았을 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왜 이렇게 손이 떨리고 심장이 거세게 뛰는 걸까.
“로레이나.”
“…….”
“무슨 고민 있어?”
말없이 가만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내가 이상했던지 레오나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에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진정하자. 아직 무슨 일인지 정확히 모르는 거잖아. 벌써 불안해할 거 없어.
“그런 건 왜 물어요?”
“아까부터 엄청 심각한 표정 짓고 있길래. 무슨 일 있나 해서.”
“아, 그게…….”
에녹이 했던 말과 함께 백작 부인 일기장 이야기를 하려던 순간, 잠시 멈칫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머릿속을 스친 탓이었다.
‘레오나드에게 일기장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일기장 안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답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이었지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별것 아니에요. 며칠 뒤에 귀족 회의가 있잖아요. 그것 때문에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요.”
일단 말하지 말자.
레오나드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는 죄책감보다는 일기장 안에 든 내용에 대한 불안감이 더 컸다.
‘일기장 안에 알고 보니 레오나드와 내가 원수지간이었다는 내용이라도 들어 있으면 어떻게 해?’
그런 불상사가 생기기 전에 내가 먼저 일기장 내용을 훑어보는 편이 훨씬 낫지.
그 후에 레오나드에게 일기장에 대해 말해도 늦지 않았다.
‘그리고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사실 이 모든 건 에녹의 말을 듣고 한 내 추측에 불과했다. 뭐 하나 확실한 게 없지 않은가.
괜히 지금 말했다가 나중에 별일 아닌 것으로 밝혀지면 도움은커녕 완전 폐 끼치는 거잖아.
물론 레오나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그건 내가 견딜 수 없었다.
‘먼저 알아보고 판단하자. 걱정도 그 뒤에 하고.’
그렇게 마음을 먹으며 레오나드를 올려다보았다.
다행히도 레오나드는 그냥 둘러댄 말에 아무런 의심 없이 넘어가 주었다.
“무슨 생각하는데? 뭔가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어?”
“당연하죠. 즉위하고 나서 첫 회의잖아요. 그런 중요한 자리에 비서관으로 참석하는데 신경이 안 쓰이겠어요?”
내 말에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가 싶던 레오나드가 살짝 웃었다.
‘또 뭔 소리를 하려고 저렇게 웃지.’
아까와는 다른 느낌의 불안감이 슬쩍 올라왔다.
아니나 다를까 곧 레오나드의 입에서 말도 안 되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그냥…….”
“취소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말아요.”
이 사람이 진짜. 이러다가 황제로 즉위한 것도 취소한다고 그러겠어.
단호하게 말을 뱉자 그에 잠시 주춤하던 레오나드가 뭔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럼…….”
“서면으로 하는 것도 안 돼요. 누가 회의를 서면으로 해요? 참석하는 귀족들이 몇인데.”
이번에는 레오나드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무슨 생각하는지 다 보인다고.
“할 말 없죠?”
작게 속삭이며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말도 안 되는 말을 누가 들었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막 즉위한 황제가 회의를 서면으로 받을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누가 알아봤자 좋을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다행히도 무도회 음악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자리를 좀 옮기는 게 좋겠어.’
레오나드에게 슬며시 손짓한 뒤 먼저 걸음을 옮겼다.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음에도 레오나드는 곧바로 나를 따라왔다.
이 정도면 되었다 싶은 생각에 다시 고개를 돌리자 레오나드가 아까와는 달리 기분 좋은 듯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뭐가 좋다고 저렇게 웃는 거지? 그사이에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왜 웃어요?”
“신기해서.”
레오나드가 다시 실없이 웃었다. 이번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러는 거지.
“뭐가 신기한데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네가 다 알고 있잖아.”
“…….”
“그게 너무 신기해서.”
아무런 말이 없는 나를 보던 레오나드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아무나 못 하는 거잖아, 그거.”
“……그렇죠.”
그래, 레오나드의 말이 맞았다.
이 정도로 상대의 생각을 눈치채는 건 그만큼 상대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못 하는 일이지.
‘……그런데 나는 언제 그런 사람이 되었더라?’
멍하니 하던 생각은 이어지는 레오나드의 질문에 잠시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어떻게 알았어? 나름 표정 잘 숨긴다고 생각하는데.”
“……척하면 척이죠. 레오나드가 어떤 말을 할지 정도는 대충 예상이 간다고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동안 했던 삽질들이 워낙 화려하셔서 말이지.
이제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고.
“대단한데.”
“이제 알았어요? 원래부터 폐하의 비서관은 대단한 사람이었답니다.”
장난스레 웃으며 대꾸하자 그에 맞춰 레오나드가 활짝 웃었다.
꽤 날카롭게 생긴 눈이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지는 것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오늘따라 유난히 화려하고 눈이 부신 그 얼굴을 보는데, 새삼 기분이 묘했다.
‘이 사람이 4년 전 다이아나의 파티에서 만났던 꼬마와 같은 사람이라니.’
누구라도 다가오면 찌를 것처럼 묘하게 날이 서 있던 가시들이 다 어디로 갔나 싶어서.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오나드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그럼 지금도 맞출 수 있어?”
“뭘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을 마친 레오나드가 나를 향해 살짝 허리를 숙였다. 맞춰보라는 듯 내민 얼굴에 나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이 사람이, 진짜. 아까 내가 한 말을 뭐로 들은 거야?
“당연하죠. 눈만 보면 바로…….”
“응.”
“바로…….”
“바로 뭐?”
고개를 살짝 갸우뚱한 레오나드가 내 끝말을 반복하며 재촉하듯 물었다.
하지만 나는 그 행동에도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레오나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지.
“아…….”
레오나드의 얼굴 곳곳에는 누가 보더라도 눈치챌 수 있을 만큼 따스하고 간질간질한 감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 감정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도 아주 잘 알았다.
“그게 그러니까…… 바로…….”
“됐어.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나는 곧장 깨달았다. 그건 레오나드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걸.
“나도 네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으니까.”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보던 적안이 다시 한번 짙은 호선을 그렸다.
“맞아. 지금 네가 생각하고 있는 거.”
뒷말을 예상할 수 있는 상황에 나도 모르게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
누군가가 머릿속에서 다급히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저 말을 듣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어떻게든 도망쳐야 한다고.
‘……여길 벗어나야 해.’
하지만 애써 넓힌 거리가 레오나드에 의해 금세 다시 좁혀진 순간, 그 목소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조금 더 허리를 숙인 레오나드가 내 손등을 들어 입을 맞추었다.
화려한 무도회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 고요 속에서 레오나드가 말했다.
“사랑스럽다고 생각했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