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네?”
믿을 수 없는 말에 눈이 크게 뜨였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지금 뭐라고…….”
“다시 말해 줘? 사랑…….”
“아, 아니요! 말하지 말아요!”
당황스러운 마음에 손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물론 한쪽 손이 레오나드에게 잡혀 있었던 탓에 별 소용은 없었지만.
꽤 우스운 꼴을 지켜보던 레오나드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와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내며 뛰었다.
‘……사랑스럽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지? 상당히 당황스러웠지만 ‘이런 말은 셀리아한테 해야지’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직도 믿기 어렵지만 레오나드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다. 그 마음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저주가 통하지 않는 유일한 상대. 그런 이에게 사랑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니까.
물론 그 마음이 셀리아를 만난 후에도 변하지 않을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뻔뻔하게 굴 것까지야.’
말한 사람이 저렇게 태연하다 보니 오히려 난리를 치고 있는 내가 이상한 사람 같이 느껴졌다.
‘직설적으로 고백을 하지 않은 걸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덕분에 어떤 식으로 대답을 하면 좋을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저렇게 나온다면야 나도 똑같이 해 주면 되겠지.
“저도 레오나드 볼 때 했던 생각이 있었어요.”
“뭔데?”
레오나드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그에 잠시 태연한 척하던 얼굴이 흐트러졌지만, 꾹 참고 이겨내었다.
참아야 한다. 여기서 내가 이러면 분위기 더 이상해져.
애써 마음을 다독였지만, 생각보다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손이라도 놓고 말하면 그나마 나을 텐데.’
이제 와 놓으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
결국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살짝 발뒤꿈치를 들어 레오나드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도저히 얼굴 보고는 못 말하겠다고. 나는 레오나드처럼 철면피가 아니란 말이다.
“귀엽다고 생각했어요.”
창피한 마음에 비명을 지를 뻔했던 것을 참으며 죽을힘을 다해 나직이 속삭였다.
이렇게 하면 이런 식의 말이 일상인 것처럼 보이겠지?
그러면 자연스레 레오나드의 말도 별것 아닌 것처럼 만들 수 있었다.
레오나드가 젠이었을 적을 떠올리며 말하니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요.”
레오나드가 했던 말을 생각하며 빠르게 덧붙이자 그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와 동시에 내 손을 감싸던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너…….”
내게서 살짝 몸을 떨어뜨린 레오나드가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며 뭐라 소리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뭐지? 저 반응은?
“왜 그래요?”
“너 다 기억하고 있는 거야?”
“뭘 기억해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자 레오나드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입을 막던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럼 그렇지.”
그 짧은 행동에도 답답한 마음이 가득 묻어났다. 그에 오히려 더 답답해진 것은 나였다.
“뭐예요? 제가 뭐 기억 못 하는 거라도 있어요?”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 쓸 거 없어.”
“이미 이야기 꺼내놓고 아무것도 아니긴요. 빨리 말 안 해요?”
입을 삐죽이며 쏘아보자 레오나드가 잔뜩 곤란한 얼굴을 하며 눈썹을 늘어뜨렸다.
“알아봤자 좋을 거 없을 텐데.”
“제가 예전에도 말했을 텐데요. 몰라서 답답해하는 것보다는 알고 창피해하는 게 낫다고.”
화난 척 팔짱을 끼자 잠시 망설이는가 싶던 레오나드가 뒷덜미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드디어 말해 주는구나. 근데 볼은 왜 빨개지는 거지?
“다이아나가 칵테일 만들어줬던 날 기억해?”
“당연하죠.”
그게 뭐 얼마나 오래된 일이라고 기억을 못 하겠어.
게다가 나는 신체 특성상 잊어버리고 싶어도 잊어버릴 수가 없다는 말이야.
제정신일 때 본 건 다 기억……. 어라, 잠시만.
“설마…… 그날?”
혹시 다이아나가 만들어준 칵테일을 연거푸 마시고 술에 취해 뻗어버렸던 때를 말하려는 건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에 보였던지 레오나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바로 그날 있었던 일이야.”
하긴. 내가 기억 못 할 만한 일이라면 그날 일밖에 없긴 하지.
예전부터 궁금하기는 했다. 도대체 뭐라고 했길래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거라고 그러는 걸까?
“그때 제가 뭐라고 했는데요?”
“…….”
“레오나드?”
바로 말해 줄 줄 알았던 레오나드가 별안간 입을 다물더니 주위를 살폈다.
그 모습에 나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뭐야, 뭐길래 아까 사랑스럽다는 말은 자신 있게 한 사람이 저렇게 눈치를 봐?
“잠깐 이쪽으로 와봐.”
레오나드의 손짓에 나는 그의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내가 가까이 가자 레오나드가 귓속말을 하려는 듯 허리를 숙였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그 짧은 순간에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예상대로 적중했다. 레오나드가 말을 끝낸 순간, 너무 놀라서 펄쩍 뛰었으니까.
“제가 그랬다고요? 거짓말!”
“거짓말 아닌데.”
내 반응에 머쓱한 표정을 짓던 레오나드가 대답했다.
그럼 방금 들은 게 다 내가 한 짓거리들이란 말이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제가…… 귀엽다는 말 먼저 했다고 고집부리고 은근슬쩍 애칭을 부르는…… 그런 되지도 않는 애교를 부렸다고요?”
내 말에 레오나드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뭐야, 또 무슨 일이 있…….
“되지도 않지는 않았어.”
……지 않구나. 그 뒤로도 레오나드가 정말이라며 작게 읊조리는 것이 들렸으나 무시했다.
사람 부끄럽게 만들려고 작정했나, 진짜.
‘그나저나 내가 정말 저런 말을 했다니.’
아무래도 술에 단단히 취했던 모양이었다. 맙소사, 내가 이런 실수를.
차라리 몰라서 답답해하는 편이 훨씬 낫지. 왜 괜히 알겠다고 설쳐서 일을 이렇게 만드냐.
민망함에 머리를 쥐어뜯으려다가 여기가 아직 무도회장임을 기억하고는 정신을 차렸다.
아니었더라면 이불이라도 펑펑 걷어찼을 텐데.
“레오나드.”
“응?”
내 상태가 이상해 보였던지, 제법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살피던 레오나드가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 진지하게 살피는 표정이라 어쩐지 더 민망해졌다.
“그날 일 좀 잊어주면 안 돼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알았다. 이미 본 걸 어떻게 잊어버릴 수가 있겠어.
잊어버리는 게 마음을 먹는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하지만 레오나드가 말이라도 그렇게 해 준다면야 마음이 한결 편해질 것 같았다.
빈말이라도 그러겠다고 해 주면 오늘 밤에 이불 몇 번 차는 것으로 마무리할 텐데.
내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여전히 나를 살피고 있던 레오나드가 긍정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래. 레오나드라면 역시 그럴 줄 알았…….
“그건 좀 어렵겠는데.”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 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애써 부정해보았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레오나드가 이를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확인 사살을 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
“……허.”
“이번에도 못 들었으면 다시 말해 줄까.”
허리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춘 레오나드가 싱긋 웃었다. 너무 기가 막혀서 꿀밤이라도 한 대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기가 무도회장만 아니었더라면 진짜로 그랬을지도 몰랐다.
만약 여기서 그러면 갓 즉위한 레오나드의 평판이 바닥에 떨어질 테니…… 내가 참는다, 참아.
“사람 놀리니까 재미있어요?”
“놀린다고? 내가?”
“그럼 여기에 레오나드 말고 누가 있어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혀를 작게 찼다. 저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하지만 이런 내 말에 레오나드는 억울하다는 듯 눈썹을 늘어뜨렸다.
“나는 진심인데.”
그 말에 뭐라고 하려던 찰나, 레오나드가 다시금 조심스레 내 손을 감쌌다.
혹시라도 누가 볼 수도 있으니 당장 손을 떼라고 해야 하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레오나드가 너무나도 절박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
“그러니 그중 하나라도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
내 손이 구원이라도 되는 양 꼭 쥐고 있던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맞닿은 부분을 통해 느껴지는 떨림에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레오나드가 조금 더 편하게 손을 쥘 수 있게 몸에 힘을 풀었다.
그것이 그를 자극한 모양인지 이어지는 목소리가 살짝 갈라져 나왔다.
“잊어버리는 일은 이제 진절머리가 나.”
짓씹듯이 말을 뱉은 레오나드가 나와 눈을 맞춰왔다. 이윽고 마주한 진득한 시선에 나는 잠시 멈칫하다가 레오나드가 안심할 수 있도록 살짝 미소 지었다.
그가 왜 이러는지 모르지 않았으니.
“이제 그럴 일 없을 거잖아요. 괜찮아요.”
원작 시작 전까지 나는 레오나드 옆에 있을 테고 그 뒤에는…….
‘……원작대로 셀리아가 나타나겠지.’
그러면 내 역할은 끝이 난다. 엑스트라는 이만 퇴장할 시간인 것이다.
애초에 내 목적은 데드 엔딩을 피하는 것이었으니 원작이 시작될 때까지 살아만 있다면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괜찮았다.
“내 옆에 있어 주는 거야? 계속?”
이어지던 상념을 가르고 레오나드가 불쑥 물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 안에 나만이 담겨 있는 것이 보였다.
레오나드는 사정을 모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내가 생각하는 바와는 달랐지만, 아니라고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살포시 웃으며 말을 돌렸다.
“왜 이렇게 초조해해요? 무슨 일 있어요?”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려 일부러 장난스레 건넸다. 물론 이어지는 레오나드의 말에 장렬하게 실패하고 말았지만.
“초조할 수밖에 없잖아.”
다시금 마주친 붉은 눈에 이채가 돌았다.
“너는 언제라도 떠날 것처럼 구니까.”
그 선명한 색채가 나를 천천히 옭아맸다. 어디도 갈 수 없도록.
어쩐지 억울한 느낌에 나는 가만히 입술을 짓씹었다.
‘그건 당신이잖아.’
셀리아가 나타나면 나는 곧바로 쓸모가 없어질 테니까.
언제라도 나를 떠날 수 있는 건 레오나드였다. 내가 그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인 것과 달리.
“……때가 되면 떠날 수도 있겠죠. 레오나드가 더는 저를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럴 일은 없어.”
레오나드가 제법 단호하게 대답했다. 자기가 미래에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갑자기 화가 났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
“뭐?”
“저주가 풀린 후에도 과연 제가 필요할까요? 애초에 저주가 아니었다면 제가 레오나드 눈에 띌 일도, 황궁까지 와서 비서관이 될 일도 없었을 텐데.”
레오나드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하는 말은 그저 그에게 화풀이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도.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레오나드가 도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뒤늦게 찾아온 자괴감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레오나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하긴, 내가 생각하기에도 어이없을 것 같았다.
기껏 좋게 말해 주고 있는 사람에게 왜 좋게 말해 주냐고 따지는 거잖아, 지금.
‘사과하자.’
여러 불안한 요소들이 겹쳐서 그런지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적당히 말하고 무도회에서 빠져야지.
이러다 진짜 크게 실수하겠어. 어차피 슬슬 정리되는 분위기니까 괜찮을 것이었다.
사과하기 위해 슬쩍 레오나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정작 입을 연 것은 레오나드가 먼저였다.
아까보다 한참은 작은 목소리로 레오나드가 읊조렸다.
“……다면?”
“네?”
잘 들리지 않았기에 곧바로 되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 레오나드가 잡고 있던 손을 확 당겼다. 조금 떨어져 있던 거리가 몸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이고 숨소리가 들릴 듯한 거리에서, 레오나드가 말했다.
“저주를 풀지 않으면 상관없는 거 아닌가.”
작게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