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미쳤어요?”
사과할 타이밍에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말을 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만큼 레오나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건 미쳤다는 말로밖에 설명이 안 되잖아.
“뭘 안 풀어요?”
“…….”
“제가 지금 잘못 들은 거죠?”
다급히 묻는 말에도 레오나드의 얼굴은 상당히 평온했다.
나는 혹시라도 누가 방금 한 말을 들었을까 봐 조마조마한데.
“제대로 들었어. 아주 정확하게.”
“정말 미친…….”
“미친 것도 아니야. 내가 지금까지 정신을 반 빼놓고 산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완전 제정신이거든.”
어떡하면 좋지? 너무 가까운 거리 탓에 당황한 표정을 숨기기가 힘이 들었다.
저주를 풀지 않겠다는 말이 레오나드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았다.
그러니 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정말 나 때문이라고?’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잖아.
“거…….”
“거짓말 아니야.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내가 피해갈 길을 미리 다 차단한 레오나드가 여전히 내 손을 쥔 채 작은 소리로 웃었다.
손가락 사이를 파고든 큼지막한 손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야.”
“…….”
“너도 이미 알고 있었잖아.”
레오나드의 말에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감정의 동요를 숨기려 거의 감다시피 했던 눈 역시 번쩍 뜨였다.
이미 알고 있었다고?
‘……언제부터? 아니, 도대체 뭘?’
혼란스러웠으나 이미 답은 알고 있었다. 알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저렇게 애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러니 손이 떨리긴 했지만,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문제는 그걸 레오나드가 알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저번에 에녹이 내 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도 놀라웠는데 이건 더 심하잖아.
내가 눈치챘다는 건 당연히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불안한 마음에 서둘러 레오나드를 올려다보았으나 레오나드는 내 손을 매만지기만 하며 좀처럼 내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거리가 꽤 가까웠던 탓에 일부러 피한 것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이 신경 쓰여 레오나드를 살피려던 순간, 그가 입을 뗐다.
“솔직히 고민 많이 했어.”
“…….”
“아니, 말을 하는 지금도 계속 고민하는 중이야.”
“……뭘요?”
알 수 없는 긴장감에 몸을 떨며 묻자 레오나드가 한숨 섞인 웃음을 뱉었다.
기분이 좋은 것도, 그렇다고 나쁜 것도 아닌 묘한 웃음이었다.
“내 머릿속에 있는 걸 다 꺼내어서 보여 주고 싶은데.”
레오나드가 잠시 심호흡을 하듯 말을 끊었다.
그 잠깐의 침묵을 감싸는 공기에 어쩐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러면 네가 도망갈까 봐.”
말끝에 진득한 한숨이 묻어났다. 어딘가 불안정한 숨소리에 나는 떨던 것을 멈추고 레오나드를 다시금 살폈다.
“레오나드?”
작게 부른 목소리에 내 손을 잡고 있던 레오나드가 흠칫 몸을 떨며 뒤로 물러났다.
내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건 그때였다.
‘떨고 있잖아?’
내 손을 붙잡고 있는 레오나드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아까는 나도 긴장하고 있었기에 미처 눈치를 채지 못했는데.
“레오나드.”
“…….”
“괜찮은 거예요? 저 좀 봐 봐요.”
여전히 내 손을 꽉 쥔 온기에 나는 반대쪽 손을 들어 레오나드의 얼굴을 조심스레 들었다.
그리고 검은 머리칼에 가려져 있던 붉은 눈동자가 제 모습을 드러낸 순간-.
“……보지 마.”
레오나드가 휙 내 손을 잡아채었다. 다급하면서도 조심스러운 기색이 다분한 손길이었다.
곧 양손이 다 잡힌 상태가 되었지만 나는 어떠한 저항도 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 놓인 광경에 머리가 새하얘졌기 때문이었다.
“……지금 우는 거예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레오나드가 흘린 눈물이 그의 턱을 타고 내려와 내 손등을 적셨다.
꽤 조심스레 건넨 말이었는데도 레오나드에게는 꽤 치명적이었던지 그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왜…….”
“그만.”
내 손을 그러쥔 채로 레오나드가 조용히 속삭였다.
“신경 쓰지 말고 내 말만 들어줘.”
……그렇게 우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불쑥 그런 말이 튀어나오려 했으나 입을 꾹 다물고 참았다.
‘지금 그 말을 하면 미친 거지.’
아직 그 정도의 이성은 가지고 있었다.
레오나드가 나보다 더 떨고 있었던 탓에 불안감이 이미 날아간 버린 뒤였기도 하고.
“내가…….”
거기까지 말한 레오나드가 잠시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래도 별 소용이 없기는 했지만.
“내가 뭘 하면 될까.”
서늘하게 식은 공기를 울리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뭘 하면 내 옆에 있어 줄래.”
그 애원하는 표정과 말투에 좀 당황스러웠다. 물론 레오나드가 내게 가진 마음이 보통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레오나드가 저주 때문에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얼마나 저주를 풀기를 염원했는지 모르지 않았으니까.
그러던 중에 불쑥 나타난 나라는 존재가 레오나드에게 얼마나 매력적이었을지도.
‘구원자 같은 느낌이었겠지.’
하지만 그랬기에 더더욱 지금 상황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레오나드의 진정한 구원자는 내가 아니었고 나는 그의 옆에 계속 있을 생각이 없으니 말이다.
어차피 나중에 떠날 거라면, 괜한 희망 고문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마요. 저는 돌려줄 수 있는 게 없어요.”
나는 나 혼자 살기에도 벅차. 그러니 나에게 무언가를 바라지 마.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뒤로 삼키며 레오나드와 눈을 맞췄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여전히 혼란스러운 나와 달리 레오나드는 자신의 선택을 분명히 했다.
“상관없어. 너만 옆에 있어 준다면.”
“…….”
“난 뭐든 할 거야.”
나조차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선명하게. 그에 나는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물었다.
아, 이토록 나를 원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날 위해 뭐든 지 해 줄 수 있다고요?”
머릿속에서 제발 그만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미 열린 입은 멈출 줄을 몰랐다.
애써 묻어두려 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정말로?”
반쯤은 짓뭉개진 발음으로 물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이 성수라도 되는 양 내 뺨에 경건하게 입을 맞춘 레오나드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러니 내게 기회를 좀 줘.”
그 절박함과 사랑스러움에 나는 어쩐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단호하게 거절해야만 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 * *
“하아…….”
도대체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르겠다. 아직 이성이 조금 남아 있기는 했는지 나는 레오나드에게 양해를 구한 뒤 도망치듯이 무도회장을 나왔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오고 나서야 참았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빠르게 달려왔기 때문일까.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서질 듯이 뛰었다.
아니, 사실은 그 이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레오나드가 저주를 풀지 않겠다고 했다. 고작 내가 옆에 남아 있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거 정말 현실이 맞아? 꿈 아니고?’
멍하니 있다가 불쑥 든 생각에, 있는 힘껏 볼을 꼬집어 보았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아픔에 곧바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꿈이 아니었다.
단순히 날 꼬드기기 위한 사탕발림 역시 아니었다. 붉은 눈동자 안에 가득 담긴 애정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으니까.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큰 감정에 불안하면서도 알 수 없는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정말 나도 사랑받을 수 있는 걸까.’
뭘 잘 해내거나 뭔가를 해 주지 않아도?
누군가 심장을 간질이는 기분에 나도 모르게 방방 뛰려다가 옆에 호위 기사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멈칫했다.
하지만 꾹 다물 입술 사이로 푸스스 하고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레오나드 옆에 오래 있다 보니 아무래도 나까지 미친 모양이다. 원작에 대한 걱정보다 이런 생각이 먼저라니.
“엇, 백작님 벌써 들어오신 거예요?”
내가 궁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에 헐레벌떡 들어온 모양인지 메리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메리를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다, 백작 부인의 일기장!
“메리! 내가 챙겨온 책들 아직도 방 책장에 있지?”
다급히 묻자 놀랐는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만히 있던 메리가 곧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아멜리오 백작가에서 가져온 거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거라면 그대로 있어요.”
“응, 맞아. 어머니 책도 있고?”
일기장이라고 하려다가 뒤에 기사들 눈치를 보며 슬쩍 말을 돌렸다.
다행히도 메리는 그것만으로도 어떤 것을 말하는지 알아들은 것 같았다.
“네, 당연하죠. 침실로 가져다드릴까요?”
“그렇게 해 줘. 고마워.”
메리가 침실 옆에 있는 서재로 들어가는 것을 본 나는 곧바로 침실로 향했다.
‘서둘러야 해.’
레오나드가 아직 무도회장에 있는 지금이 적기였다.
일기장 역할 때문에 레오나드와 종일 붙어 있어야 하니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바로 잘 준비까지 마쳤다. 들어간 지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파티용 드레스를 입고 있으면 레오나드가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욕실 밖으로 나오니 테이블 위에 다과와 책 한 권이 올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익숙한 표지에 나는 헐레벌떡 테이블 앞으로 뛰어갔다.
‘일기장이다!’
우선 일기장을 들고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혹시 누가 들어오더라도 금방 숨길 수 있게 자세까지 잡고 나니 긴장감이 더욱 커졌다.
꿀꺽, 떨리는 마음에 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진정하자. 이게 뭐라고 그렇게 긴장해?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천천히 한 페이지를 넘겼다.
일기장은 최근에 쓴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태가 좋았다.
종이가 찢어진 채 누르스름해져 있거나 퀴퀴한 냄새가 나는 건 각오하고 있었는데. 그 걱정이 다 쓸모없을 정도였다.
‘신기하네.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건가.’
백작 부인인 엘레노아는 마법 시대에도 살았으니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마법이 있던 시간을 더 많이 살았다고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일기장 초반에는 마법 이야기가 꽤 많이 나왔다.
아, 젠장. 멀미 나. 토할 것 같다. 다시는 이동 스크롤 사용 안 해. 망할!
……내 생각보다 털털한 사람이었던 것 같고.
‘엘레노아’라는 이름 때문인가. 뭔가 고상한 이미지일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그 뒤로는 별로 특별한 것 없는 내용이 이어졌다.
애초에 일기도 매일 쓴 게 아니라 석 달에 한 번 쓴 적도 있을 정도로 드문드문 적혀 있었고.
쭉 훑어보다가 내가 멈춘 것은 일기장의 중간쯤. 늘 혼자였던 엘레노아의 일상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 부분이었다.
수도에 있어야 할 분들이 갑자기 찾아왔다. 웬 꼬마 하나를 데려와서 소개할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는데. 나보고 얘 교육 좀 맡아 달란다. 젠장. 나밖에 맡아줄 사람이 없다고 사정하길래 허락하기는 했는데 진짜 귀찮아죽겠다.
절대 돈 때문에 그런 건 아니다. 절대!
엘레노아는 밝고 솔직하고 굉장히 따뜻한 사람이었다.
물론 꼬마의 이름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말도 귀찮다고 했지만, 일기장 곳곳에 저 꼬마를 향해 애정이 물씬 묻어났다.
그리고 이는 조금 뒤에 또 다른 꼬마가 등장하면서 더 잘 드러났다.
꼬맹이가 자기보다 더 작은 꼬맹이를 데리고 왔다. 세상에 꼬맹이보다 작은 녀석은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힘없고 마른 애가 있을 줄이야.
심지어 이름도 없단다. 아무래도 이름을 지어줘야 할 거 같은데, 뭐가 좋을까.
맨날 귀찮다고 하더니.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제법 재미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흐뭇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리고 그 순간, 힘이 빠져버린 손에서 떨어진 일기장이 침대 위에 나뒹굴었다.
나는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일기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전히 내가 읽던 부분이 펼쳐져 있는 그 모습을.
그래, 이사벨. 그 녀석 이름은 이사벨로 하자.
예상치 못한 상황에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이 이름이 왜 여기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