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이사벨. 셀리아가 등장하기 전 마지막 마녀이자 레오나드에게 저주를 건 장본인.
레오나드의 저주가 이야기의 메인인 탓에 원작과는 떼놓으려야 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인데.
그런 사람이 왜…….
‘왜 백작 부인의 일기장에 나오는 거지?’
물론 이사벨이라는 이름이 특이한 이름도 아니니 다른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런 식으로 넘겼다가 큰코다쳤던 적이 있으니 허투루 넘길 수가 없었다.
헨티슨 가문도 결국 원작 속 그 가문이 맞았잖아.
‘게다가 시기도 너무 적절해.’
일기장이 써진 시점은 아직 마법이 존재하던 시기였으니까.
물론 이때도 마력을 가진 이들이 얼마 남지 않은 때긴 했지만.
‘이 사람이 원작 속 그 이사벨이라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아.’
만약 둘이 동일 인물이라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조심스레 일기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생각보다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 기분에 팔이 파르르 떨렸다.
마침내 일기장을 잡는 것에 성공한 내가 다음 장을 넘기려던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방문을 알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로레이나, 자?”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는 목소리에 나는 재빨리 일기장을 베개 밑에 숨겼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었다.
“아니요! 아직 안 자요.”
“잠깐 들어가도 될까.”
잠시 고민하다가 허락하자 곧 문이 천천히 열렸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레오나드는 여전히 무도회장에 참석했던 차림 그대로였다.
“무도회는 잘 끝난 거예요?”
혹여나 레오나드가 일기장이 있는 베개 쪽에 시선을 둘까 싶어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그러자 침대에 앉아있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레오나드가 작게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응, 대충.”
“수고했어요.”
말을 하는 중간중간 나도 모르게 자꾸만 베개 쪽으로 시선이 갔다.
‘어서 빨리 마저 읽어야 하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레오나드를 내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잠자코 레오나드에게 집중했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에요?”
“아.”
레오나드가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고 뭔가를 망설이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에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자 레오나드가 곧 제 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읊조렸다.
“……아까 대화가 흐지부지 끝난 것 같아서.”
“아까 무슨……. 아.”
순간, 잠시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머릿속으로 물밀듯이 들어왔다.
……맞다, 나 고백받았었지! 세상에. 그걸 어떻게 잊고 있을 수가.
“아, 네. 그렇죠. 아까 하던 말 마무리해야지……. 하하.”
나는 누가 봐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뇌까렸다.
마무리하긴 뭘 마무리를 해! 미치겠다 진짜.
내가 스스로 판 무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이 레오나드는 기회를 잡았다는 양 눈을 빛냈다. 침대 쪽으로 조심스레 다가오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래서, 대답은?”
내 앞에 멈춰선 레오나드가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긴장감에 침이 꼴깍 목 뒤로 넘어갔다.
머릿속에서는 아까 무도회장에서 레오나드가 했던 말이 반복되고 있었다.
‘상관없어. 너만 옆에 있어 준다면.’
‘그래. 그러니 내게 기회를 좀 줘.’
듣는 것만으로 애달파지는 애끓는 음성. 그리고 볼에 내려앉은 부드러운 입맞……. 아니, 잠깐만!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신 차리자. 이런 분위기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 내 역할이 뭔지 잊어서도 안 된단 말이다.
‘내 역할은 셀리아가 등장하기 전까지 레오나드를 조금이나마 자유롭게 해 주는 거야.’
그래, 그러니 어서 거절해야만 했다. 태어나 처음 받는 감정에 설레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작게 심호흡을 하고는 천천히 입을 뗐다.
“미안해요, 레오나드. 아무래도 저는…….”
“……싫어?”
내 말을 끊고 들어온 레오나드가 불쑥 고개를 숙였다.
안 그래도 가까웠던 거리가 단숨에 좁혀지자 보지 않으려 애썼던 것이 훤히 보였다.
레오나드가 얼마나 간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그게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어, 어떡하지.’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내며 뛰었다. 이게 정말 내 심장 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레오나드와 눈을 맞추는 것도 어려워서 나는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 행동을 오해한 것인지 어둡게 가라앉은 적안으로 나를 잠시 훑던 레오나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대답하기 어려우면 굳이 하지 않아도 괜찮아.”
“…….”
“애초에 내가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면 시작도 못 했을 관계라는 거, 알고 있으니까.”
나직이 말을 잇던 레오나드가 내 손을 조심스레 쥐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살짝 고개를 들자 손가락에 작은 상처들이 여럿 보였다.
‘아까 에녹을 만나고 넘어졌을 때 생긴 건가.’
뒤늦게 깨달은 통증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을 때 레오나드가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잠시 그 상태를 유지하던 레오나드가 짓씹듯이 말을 뱉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
손가락에 닿는 입술이 열기를 한껏 머금은 양 뜨거워서 움찔 몸을 떨었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개의치 않고 연신 입을 맞췄다.
“내가 저주라는 어쭙잖은 약점으로 너를 붙잡지 않았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저, 레오나드. 자, 잠깐…….”
“네가 뭘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지금보다 훨씬 행복했겠지.”
이상한 기분에 레오나드를 밀어내려던 팔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레오나드의 목소리가 메마른 나무처럼 잔뜩 갈라져 있었다.
“넌 이토록 사랑스럽고…….”
“…….”
“항상 빛이 나니까.”
레오나드의 힘을 받은 상처들에 새살이 차올랐다. 동시에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왜 내가 해야 하는 말을 당신이 대신하고 있는 걸까.
저주라는 틀에 갇혔어도 도무지 숨길 수 없이 반짝이는 건 레오나드였다.
“그걸 아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놓아줄 수가 없어.”
“…….”
“그래서, 소원권을 하나 쓸까 해.”
마침내 내 손에서 입술을 뗀 레오나드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나를 올려보았다.
눈 밑이 그의 눈동자 색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런 나를 비난하고 원망해도 좋아.”
그리고 나는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나 역시 그럴 것이라 확신했다.
“제발 미워하지만 말아줘.”
아, 이런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소름 끼치도록 나와 닮은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울음을 삼켰다.
“……싫어요.”
“뭐?”
제법 단호한 말에 레오나드의 얼굴 위로 짙은 절망이 내려앉았다. 거기에는 내가 울먹이는 것까지 한몫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정말 싫었으니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애초에 비난하거나 원망할 생각이 없었는걸요.”
오히려 나는 레오나드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그날, 파티장에서 용기를 내 나에게 다가와 준 것에 대해.
가끔 생각하곤 했다. 내가 살기 위해 헨티슨 가문을 찾아간 날, 레오나드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레오나드의 말 따라 내가 뭘 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저택 밖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는 겁쟁이에 머물러 있었겠지.
“그러니 소원권은 다른 곳에 쓰는 게 어때요?”
눈꼬리를 접으며 생긋 웃었다. 그에 눈꼬리에 맺혀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턱밑으로 떨어졌다.
레오나드는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좀처럼 감을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상처가 사라져 말끔해진 손을 들어 레오나드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레오나드가 내 눈을 똑바로 마주하도록 그의 얼굴을 살짝 들었다.
나만큼이나 애정에 목말라하는 그가 헷갈리지 않도록, 아주 분명하게.
“날 사랑할 기회를 달라고.”
꽤 충동적으로 뱉은 말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럽게 찾아온 한 가지 생각 때문에.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땅에 뿌리 내린 식물이 물을 머금듯이, 그렇게.
‘당신이 웃는 걸 보고 싶어.’
그런 생각에 보답하듯 레오나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웃었다.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 활짝.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나는 허리를 휘감는 손길에 속절없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정말이야? 거짓말 아니지?”
나를 꼭 껴안은 채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레오나드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목에 닿는 숨 때문일까. 알 수 없는 간지러운 감각이 등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분명하게 깨달았던 것이 있었다.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이 바로 저 얼굴이었다는 것.
“네, 거짓말 아니에요.”
연신 등을 쓰다듬는 손길에 나 역시 레오나드의 어깨를 살짝 토닥여 주었다.
어쩌면 나는 레오나드의 마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린 걸지도 몰랐다.
나중에 레오나드의 곁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오면 홀로 괴로워하며 눈물지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지금까지 너무 힘들었으니까. 그러니 잠깐 기대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셀리아가 나타나기 전. 딱 그때까지만.
나중에 모든 것을 알게 된 레오나드에게 원망을 듣더라도 지금만큼은 상관없을 거 같았다.
그렇게 나는 난생처음 느끼는 넓고 따뜻한 품 안에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백작 부인의 일기장이든 원작이든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 * * 다/임/공/유/금/지
“로레이나, 폐하와 사귀어요?”
“푸흡!”
다음날 기사 훈련을 끝내고 찾아온 다이아나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마시던 차를 뿜을 뻔한 것을 애써 수습했다.
레오나드는 제럴드와 처리할 일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뭐, 뭐라고요? 누가 그래요?”
“딱히 누가 말한 건 아닌데…….”
당황한 나를 보던 다이아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내가 이렇게 놀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폐하요.”
“폐하가요?”
“얼굴에 다 쓰여 있던데요.”
다이아나가 양손 검지를 들어 입꼬리에 끼운 뒤 입꼬리를 쭉 올렸다.
그러자 꼭 웃는 광대 같은 얼굴이 되었다.
“아주아주 행복해서 곧 날아갈 거 같다고.”
“……다이아나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많나요?”
“오늘 폐하의 그 바보 같은 얼굴을 본 사람은 다 그렇게 생각할걸요. 무도회에서부터 워낙 티를 많이 냈잖아요.”
“그 얼굴을 본 사람이 몇이나 되는데요?”
나는 한껏 마음을 졸이며 다이아나의 답을 기다렸다. 긴장하지 말자. 기껏해야 제럴드 정도겠지.
하지만 곧 이런 내 기대를 박살 내는 말이 돌아왔다.
“기사단 전원이 봤을 거예요. 훈련하는 거 살피러 올 때 그러셨으니까.”
……세상에, 맙소사. 그 많은 인원 앞에서 헤벌쭉 웃고 다닌 거야?
예상보다 많은 인원에 잠시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래도 기사단원들은 입이 무거우니까 설마 얘기하고 다니지는 않겠지.’
다이아나가 돌아간 뒤에도 달아올라 있는 볼을 식히며 애써 사실을 부정했던 나는, 나를 힐끔힐끔 보는 시녀들을 보고 나서야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했다.
‘이거 기사단원들만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
이러다 황궁 밖까지 소문 퍼지는 건 금방이겠어.
데프론 공작 귀에까지 들어가서 약점이라도 잡히면 큰일이었다.
안 되겠다. 레오나드한테 조심 좀 하자고 말을 해놔야겠어.
“지금 폐하 어디에 계신가요?”
지나가던 시녀를 붙잡고 묻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웃던 시녀가 침실에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 미소 때문에 초조해서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그래서였다. 미리 노크도 하지 않고 침실 문을 벌컥 열어버린 것은.
“레오나드!”
침실에는 예상대로 레오나드가 있었다. 옷을 갈아입던 중이었는지 상의를 입고 있지 않았던 게 문제였지만.
보기 좋게 근육이 잡힌 몸을 멍하니 보던 나는 서둘러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어쩐지 시녀가 웃는 게 좀 이상하다 싶더라니!
“아, 저기 그러니까…….”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이 레오나드가 성큼 이쪽으로 다가왔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에 화났나 싶어 몸을 움츠리던 순간, 레오나드가 긴 팔을 뻗었다.
쿵.
등 뒤로 큰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졸지에 레오나드의 팔 사이에 갇혀 그의 가슴팍을 마주하게 된 나는 눈을 둘 곳이 없어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마주한 레오나드는 나처럼 당황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짙은 미소를 지은 채였다.
“로레이나.”
“…….”
“지금 이건…….”
살짝 고개를 기울인 레오나드가 이전의 비슷한 상황과는 확연히 다른 얼굴로 속삭였다.
“나한테 기회를 주는 거라고 생각해도 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