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머리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탓에 멍하니 되묻자 레오나드가 나직이 웃었다.
“나한테 기회를 주겠다고 했잖아.”
“…….”
“널 사랑할 기회.”
“그, 그랬죠.”
자꾸만 밑으로 내려가는 시선을 애써 고정하며 대답했다.
미치겠네, 진짜. 몸은 쓸데없이 좋아서!
“저, 일단 좀 떨어진 다음에 대화하면 안 될까요?”
“왜?”
레오나드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왜긴 왜야, 당신 같으면 이러고 계속 대화를 할 수 있겠냐고.
“이러려고 옷 갈아입는 중에 노크도 없이 들어온 거 아니었어?”
“아, 아니거든요! 옷 갈아입고 있는 줄도 몰랐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발 뒤로 좀 가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레오나드가 장난스레 웃었다.
“소원권.”
……이 사람이 진짜? 전생에 소원 못 이루고 죽기라도 했나.
“아, 알겠어요! 하나 줄게요.”
“…….”
“두, 두개!”
달아오르는 볼을 손으로 감싸며 외치자 그제야 레오나드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소원권 다 쓴 상황이라 후련한 마음이었는데. 이런 걸로 두 개나 얻어가다니. 치사한 자식.
“그나저나 아쉽네. 난 또 나한테 매우 급한 볼일이 있어서 온 줄 알았지.”
“……같은 의미는 아닌 것 같지만 급한 일 때문에 온 건 맞아요.”
레오나드가 어느 정도 멀어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작게 헛기침을 했다.
예전에는 내가 레오나드를 놀리는 느낌이 강했는데 언제 이렇게 역전이 되어버린 거지.
“요즘 궁 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던데 알아요?”
“분위기?”
레오나드가 침대에 털썩 앉으며 되물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하긴, 안다면 이렇게 태평하게 있을 리 없지.
“우리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냐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더라니까요?”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워 일부러 돌려서 표현한 것이었는데 레오나드가 그 말에 쐐기를 박았다.
“……네, 뭐. 비슷한 거요. 아무래도 레오나드도 알고 있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온 거예요. 이런 소문이 난 데는 당신 책임이 있기도 하니까.”
내가 부정하지 않은 것이 기껍다는 듯 눈웃음을 지으며 웃던 레오나드가 불쑥 입을 열었다.
침대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날 바라보는 것이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그럼 이제 내가 널 책임져 주면 되는 건가.”
“그러면 되……. 아니, 그게 아니잖아요!”
아, 답답해!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거야, 지금?
씩씩거리며 흘겨보자 잠시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는가 싶던 레오나드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고개를 젖히며 폭소했다.
……뭐야, 지금 저 표정은?
“설마 알고 있었어요?”
“내 집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모를 리가 없지. 네가 옆에 있으니 잊어버릴 일도 없는데.”
“와, 그럼 다 알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거예요?”
“아니,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네가 방에 들어올 때부터 너무 귀엽게 구니까.”
레오나드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쿡쿡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난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이 정도면 꿀밤 한 대 때려도 되지 않을까? 저번에 아멜리오 백작가를 떠나올 때도 후에 별말 없었잖아.
‘그래. 딱 한 대만 때리자.’
내가 여기까지 어떤 심정으로 달려왔는데.
정작 당사자는 저렇게 실실 웃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니 아니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소원권 얻어갈 생각이나 하고.’
생각할수록 괘씸하네, 진짜.
여전히 웃고 있는 레오나드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다행히도 레오나드는 정말 웃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이제 저 탐스러운 이마에 딱하고…….
“어딜.”
이마 근처까지 손을 가져다 댄 순간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혔다.
어느새 나는 팔을 잡힌 채 레오나드에게 깔려 있었다. 등 뒤로 침대의 푹신한 감촉이 닿았다.
“두 번은 안 당하지.”
“이…….”
분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거 한번 맞아주는 게 그렇게 싫냐!
어차피 내가 때리는 것 정도는 별로 아프지도 않으면서.
하지만 양팔을 잡힌 내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포기하고 깊게 한숨을 내쉬자 레오나드가 내 팔을 잡은 손을 놓더니 내 허리를 휘감았다.
그 상태로 나를 껴안은 채 옆에 누운 레오나드가 내 어깨에 턱을 괴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 말에 은근슬쩍 머리를 몇 가닥 뽑을까 하던 나는 슬쩍 손을 내렸다.
그렇게 얌전히 사과하면 할 말이 없잖아.
잠시 고민하다가 등을 마주 안자 뭐가 그리 좋은지 레오나드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더 깊게 내 목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런데 내가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어. 이건 진짜야.”
“그러시겠죠.”
대신 누구라도 알 수밖에 없게 티를 내고 다녔겠지. 다이나아의 말 따라 바보 같은 표정으로 실실 웃으면서.
잠시 레오나드에게 안긴 채로 가만히 있자 나를 안은 힘이 점점 거세졌다.
나 죽는다, 이 사람아. 자기가 드래곤이라는 거 자각 좀 해!
“레오나드, 아파요.”
그 말에 레오나드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나 힘만 살짝 풀었을 뿐 내게서 떨어지지는 않았다.
“……아직 실감이 안 나서 그래.”
“뭐가요?”
“네가 내 품에 안겨있는 것도, 내가 이 순간을 영원히 잊지 않는다는 것도…….”
담담히 말을 잇던 목소리가 멈추더니 곧 목덜미에 숨이 길게 닿았다.
이윽고 들리는 낮은 음성에는 옅은 떨림이 묻어났다.
“그냥 이 모든 게, 다.”
레오나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얼굴을 보려고 해도 나를 안은 팔에 힘을 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결코 좋은 쪽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허리에 닿은 손을 통해 느껴지는 작은 떨림에 나는 레오나드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응?”
“내가 어떻게 하면 이 모든 걸 믿을 수 있겠느냐고요.”
나직한 목소리에 레오나드가 내게 파묻던 얼굴을 들었다.
눈 밑이 불그스름한 것이, 또 울먹거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레오나드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그가 이럴 때면 묘한 쾌감을 느끼곤 했다.
레오나드가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상대는 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렇게 눈물을 뚝뚝 흘리는 황제라니. 누가 상상이냐 하겠냐고.
‘아무리 내 앞에서만 이런다고 해도 그렇지. 명색에 남자 주인공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자주 울어서야.’
나는 살짝 미소 지으며 레오나드의 눈가를 천천히 쓸었다.
“당신이 믿을 수 있게 해 줄게요.”
그러니 말해봐요, 어서. 눈을 맞추며 이마를 천천히 맞대자 레오나드가 멍한 얼굴을 했다.
나는 그 얼굴을 가만히 눈에 담다가 다시금 웃었다.
저 얼굴도 사랑스러워 보이다니 이쯤 되면 중증이었다.
“나는…….”
그렇게 나를 보던 레오나드가 마침내 입을 뗀 순간이었다.
밖에서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앗, 누가 왔나 봐요.”
이러고 있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내가 여기 왜 왔었는지를 기억해낸 나는 재빨리 레오나드의 품에서 몸을 일으켰다.
물론 레오나드가 다시금 팔을 잡아당기는 탓에 다시 풀썩 침대에 눕혀지고 말았지만.
“그냥 이대로 있어.”
“하지만…….”
“조금 있으면 갈 거야. 아무 말 안 하면 자는 줄 알겠지.”
이대로 있고 싶었던 건 나도 마찬가지라 조용히 있었다.
그러나 곧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소리는 시간이 좀 지난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폐하, 제럴드입니다.”
“…….”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뭐야. 제럴드였어?
눈짓으로 무슨 일이냐고 묻자 레오나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 무슨 일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이상하네. 잠귀도 밝으셔서 내 말을 못 들으실 리가 없는데.”
“…….”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곧 들어가겠다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레오나드를 노려보았다.
그냥 자는 줄 알 거라며! 역시 아까 그냥 대답했어야 했는데.
“레, 레오나드 옷 좀……. 아니, 그냥 내가 나갈게요!”
“문은 저거 하나인데 어디로 나가려고.”
“……창문으로?”
어색하게 웃는 나를 보던 레오나드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옷장 문을 열더니 그 안에 나를 앉혔다.
“제럴드가 갈 때까지 여기 있어.”
“……고마워요.”
레오나드의 옷장은 꽤 넓어서 내가 들어가도 공간이 많이 남았다.
이 정도라면 확실히 오래 숨어 있어도 괜찮겠네.
“이제 빨리 문 좀 닫아줘요.”
“…….”
“레오나드?”
가만히 있는 그가 이상해서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대뜸 레오나드가 옷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내 옆에 자리를 잡은 뒤 문을 닫았다.
……아니, 이게 무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나도 숨어야지. 안에 있었으면서 지금껏 대답 안 했다는 거 들키면 좀 그렇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러면 어떻게 해요!”
옷장 안에 숨어서 상의를 탈의하고 있는 레오나드. 그리고 그 옆에 얌전히 있는 나.
아무리 생각해도 묘한 상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닌가.
“대답 안 한 게 뭐 어떻다고요. 레오나드는 황제잖아요.”
“황제라고 다 허용되는 건 아니야.”
“적어도 이 상황은 허용이에요. 괜찮으니까 빨리 나가요. 여기서 들키면 더 이상해진단 말이에요.”
차마 아무것도 안 입은 상체에 손을 댈 수는 없어서 팔만 잡아당기는데 레오나드가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방해한 게 괘씸해서 얼굴 보기 싫어.”
“그게 무슨…….”
거기까지 말한 순간이었다. 밖에서 레오나드의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들리는 발소리에 나는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어? 아무도 없는데?”
“그럴 리가 없어요. 분명 침실 안으로 들어가시는 거 봤는걸요.”
어리둥절한 제럴드의 목소리 뒤로 그보다 다소 높은 음성이 들려왔다.
좀 더 자세히 들어보니 아까 나에게 레오나드가 침실에 있다고 말해 준 시녀인 것 같았다.
……역시 그 미소는 그냥 지은 게 아니었어.
“잘못 본 거 아니겠지? 분명히 이 방에 들어오신 것이 맞나?”
“네, 확실해요. 저 말고도 본 사람이 있었으니까요.”
“도대체 어딜 가신 건지…….”
제럴드가 말끝을 흐리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나가지 않고 계속 찾는 것을 보니 꽤 급한 일인 모양이었다.
‘그러게 그냥 있었으면 좋았잖아.’
원망스러운 마음에 입만 움직여 뭐라고 하자 레오나드가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입술에 올렸다.
이게 누구 때문인데! 가만히 있었으면 될 일 가지고 왜 일을 키우느냐…….
“……딸꾹.”
내 입에서 나온 게 명백한 소리에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입을 틀어막았다.
맙소사. 이런 상황에 딸꾹질이라니!
밖에 들렸으면 어쩌지? 불안한 마음에 입을 더 꽉 눌렀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간의 침묵을 가르고 제럴드가 입을 열었다.
“지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나?”
“소리요? 저는 못 들었는데…….”
시녀의 말에도 제럴드는 연신 무슨 소리를 들었다며 중얼거렸다.
아, 망했다, 진짜.
‘이건 왜 이렇게 안 멈추는 거야!’
입을 틀어막은 탓인지 아까보다 확연히 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이조차 제럴드에게 들린다면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러다 제럴드가 옷장 문이라도 연다면……. 아니야. 상상하지 말자. 생각만 해도 끔찍하니까.
‘어떡하지.’
도무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 딸꾹질에 내가 울상을 짓고 있는 와중에도 레오나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뭔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 다른 생각을 해?’
억울한 마음에 잡은 팔을 흔들자 레오나드가 고개를 들었다.
옷장 안이 어두운 탓인지 붉은 눈동자가 평소보다 짙게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았다.
“로레이나.”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쳤어? 제럴드가 들으면 어쩌려고!
하지만 내가 이러거나 말거나 레오나드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그 상태를 유지하던 그가 훅 다가왔다.
“아까 믿을 수 있게 해 준다고 했지.”
“…….”
의미 모를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이 레오나드가 내 입을 막은 양팔을 밑으로 끌어내렸다.
또다시 튀어나오려는 딸꾹질에 눈을 질끈 감았으나 그것에 놀랄 일은 없었다.
그보다 더 놀랄 만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쪽.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옷장 속을 울렸다.
손으로 막고 있던 곳을 다른 온기로 채운 레오나드가 살짝 몸을 뒤로 물렸다.
“단번에 믿을 방법이 있는데.”
“…….”
“키스해도 돼?”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 있었다. 그 음성에 어쩐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레오나드는 처음부터 허락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는 듯 다시금 성큼 다가왔다. 공기에 노출되어 있던 입술이 순식간에 맞물렸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