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첫 입맞춤은 내 예상과는 매우 달랐다.
이전 생에서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상상했던 건 이보다는 가볍고 달콤한 느낌이었는데.
‘이건 너무…….’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눈꺼풀을 떠는데 레오나드가 고개를 비틀더니 아까보다 더 깊게 들어왔다.
다른 생각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숨이 진득하고 깊게 얽혔다. 어느덧 추위가 가신, 화창한 봄날이었음에도 어쩐지 한없이 덥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레오나드를 밀어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조금만 더…….’
더 가까이 있고 싶어.
순식간에 머릿속을 지배한 욕망에 레오나드의 어깨를 밀어내려던 손에 힘이 풀렸다.
그것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레오나드가 커다란 손으로 내 목 뒤를 감쌌다.
딸꾹질은 멈춘 지 오래였고 얼핏 문이 닫히는 소리와 멀어져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것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나는 지금 눈앞의 남자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하지만 좋아.’
조금 더 입을 벌리자 그만큼 또 레오나드가 다가왔다.
이러다가 뒤로 넘어갈 것 같은 느낌에 본능적으로 레오나드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렇게 한참 있었을까, 숨 쉬는 게 어렵다는 생각이 들 때쯤 레오나드가 입술을 떼었다.
나는 이제 막 숨 쉬는 법을 배운 사람처럼 크게 숨을 내쉬었다.
가만히 숨을 고르는 내 입술 위로 몇 번인지 모를 자잘한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그 느낌이 간지러워서 옅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레오나드.”
“응.”
기다렸다는 듯 레오나드가 곧바로 눈을 맞춰왔다. 연신 웃던 나는 이윽고 마주친 눈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붉은 눈동자가 불에 데기라도 한 듯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안에 서린 진득한 감정에 숨이 막혔다. 레오나드는 지금보다 더한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것이 뭔지 알 것 같아서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 이제 다들 나간 거 같은데 우리도 이만 나가요.”
대답도 듣지 않고 옷장 문을 열었다. 뜨거웠던 옷장 안과는 달리 제법 시원한 공기가 몸을 감쌌다.
그와 동시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쳤어, 미쳤어!’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나 지금 남자 주인공과 그렇고 그런 짓을 한 거야?
‘아니야, 진정해. 고작 키스였잖아.’
애써 마음을 다독였지만, 고작 키스라 치부할 만한 일이 아니었던 건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내가 조금만 더 정신을 늦게 차렸더라면…….
‘정신 좀 차려. 미래 일도 생각을 해야지.’
레오나드 저주는 풀어야 할 거 아니야. 저대로 평생 살게 둘 셈이야?
내가 아무리 셀리아가 오기 전까지 레오나드와 잘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한들 넘을 수 없는 마지노선이라는 게 있었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선을 넘을 생각이 없었고.
그러니까 당신과 나는 딱 여기까지야. 더 진도 나가는 건 안 돼! 그렇게 다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같이 있었던 거 누가 알면 좀 그러니까 저는 이만 가볼게요. 공작님이 찾으시는 것 같으니 레오나드도 어서 가봐요.”
“…….”
“아, 그리고 저희 관계는 비밀로 했으면 좋겠어요.”
이러면 대충 알아들었겠지. 레오나드도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지 않을 테니까.
나는 한결 후련해진 마음으로 레오나드의 침실을 나섰다.
내 뒤에 덩그러니 남겨진 레오나드가 어떤 생각을 할지도 모르고.
* * *
제럴드는 한참을 찾아도 보이지 않다가 갑작스레 죽을상을 하고 나타나 앉아 있는 제 상관을 바라보았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저 흉흉한 기운 탓에 쉽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폐하, 아까부터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요.”
“…….”
“사실 이번 귀족 회의에 올라올 안건 중에…….”
거기까지 말하던 제럴드가 입을 닫고 레오나드 앞에 이리저리 손을 휘저었다.
“폐하?”
“…….”
“듣고 계시는…….”
“제럴드.”
“네, 네!”
별안간 들린 부름에 제럴드가 재빨리 손을 뒤로 물렸다.
다행히도 레오나드는 이것으로 뭐라 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뭐 좀 물어볼 게 있는데 말이야.”
“네, 말씀하세요.”
드디어 무슨 일 때문인지 말을 해 주시는구나!
한시름 덜었다는 생각에 제럴드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어서 들린 레오나드의 말에 그 웃음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연애한 적 있어?”
쿵. 거대한 돌덩이가 제럴드의 심장에 내려앉았다.
당연하게도 헨티슨 가문의 후계자였던 제럴드에게 그럴 틈 따위는 없었다.
하필 제럴드가 한창 연애할 나이가 된 시점이 레오나드가 성체가 되는 때랑 맞물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300년을 기다린 거사를 앞두고 측근이 한가롭게 연애를 하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눈물을 삼키며 한 대답에 레오나드가 한숨을 내쉬며 제럴드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제럴드는 ‘폐하 때문 아닙니까!’라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기에는 아직 좋은 날이 많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여태껏 못해 본 연애는 하고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키스한 다음에 곧바로 자리를 뜨는 건 무슨 의미지?”
훅 들어온 질문에 제럴드가 조용히 비명을 삼켰다. 설마 저런 질문일 줄이야.
‘아멜리오 백작과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야.’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한 질문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제 와 도망치기에는 레오나드가 이쪽을 빤히 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로레이나와 관련된 것이라 레오나드가 이 순간을 잊어버릴 가능성도 없었으니 제럴드 그냥 기절하고만 싶었다.
‘사실대로 말해도 될까.’
키스하고 도망간 거면 딱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머릿속에 이미 확정된 생각이 떠올랐지만, 제럴드는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려고 애쓰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그냥 자리를 뜨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요.”
말이 끝나자마자 확 어두워지는 표정에 제럴드는 애써 올린 입꼬리를 파들파들 떨며 생각했다.
아, 망했구나.
“……관계를 비밀로 하자는데.”
“흐읍!”
그야말로 확실한 답변에 제럴드는 조용히 눈물을 삼켰다. 왜 하필 이런 말을 자신이 해야 하는 건지.
그렇다고 말을 안 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제럴드는 주먹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
그래. 누군가는 말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건 다 자신의 주인을 위해서였다.
“폐하, 혹시…….”
“뭔데.”
“……처음이셔서 잘 못 하신 건 아닌지.”
그 순간 레오나드의 행동이 정지했다.
누가 시간이라도 멈춘 건 아닐까 싶어 제럴드가 두리번거릴 정도였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던 레오나드가 천천히 입을 달싹였다. 그러고 나서도 말이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나가 있어, 제럴드.”
탈출 기회를 얻은 제럴드가 이를 놓치지 않고 서둘러 인사한 뒤 밖으로 나갔다.
레오나드는 그 모습을 보지도 않고 거칠게 머리를 헤집었다.
머릿속에서 아까 있었던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당신이 믿을 수 있게 해 줄게요.’
푸른 눈동자를 부드럽게 휘며 웃는 모습이 눈에 박혔다.
언제나 만지고 싶어 견딜 수 없던 연분홍빛 머리카락은 늘 레오나드로 하여금 꽃밭 한가운데 있는 기분을 들게 했다.
그는 로레이나만큼 사랑스러운 생명체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서둘러 입을 맞췄다.
성급한 행동이었지만 로레이나도 받아들이는 것 같았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설마 이런 식의 문제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지만.
“하…….”
그 어떤 때보다 굴욕적인 기분에 레오나드가 다시 한번 머리를 헤집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 감정이 털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별로였나.”
그동안 해본 사람이 없었으니 자기 실력이 어떤지 몰랐던 레오나드가 끝도 없는 자괴감에 빠졌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면 땅끝까지 파고 들어갔을 것이었다.
“……누구야.”
갑작스레 자신의 시간을 방해받은 레오나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의 목소리를 들은 듯 노크 소리가 잠시 멎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노크 소리는 방금 일을 잊은 마냥 다시금 들려왔다.
분명 제럴드일 것이었다. 아까 무슨 할 말이 있어 보였으니까.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할 기분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요한 사안을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레오나드는 힘없이 서류에 시선을 두었다.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조심스레 문이 열렸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인 듯 문을 걸어 잠그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지도 레오나드는 별생각이 없었다.
방심하고 있던 순간, 그의 눈앞에 별안간 봄이라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는 듯 분홍색 꽃이 잔뜩 피기 전까지는.
“이야기 다 끝난 거죠?”
제럴드와 달리 높고 부드러운 음성에 레오나드가 흠칫 몸을 떨며 고개를 들었다.
로레이나가 책상에 걸터앉은 채로 레오나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왔어?”
“무슨 말이 그래요? 일기장이 주인 옆에 있지 그럼 어디에 있어요?”
멍청하게 물은 말에 로레이나가 재미난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웃었다. 그 모습에 레오나드는 깊이 안도했다.
제 실력이 형편없어도 로레이나는 자신을 변함없이 대해 주는 것 같았으니까.
물론 그만큼 레오나드는 또 다른 자괴감에 빠졌다.
잠시 고민하던 레오나드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눈 주위를 쓸던 손이 눈을 가린 채 그래도 멈췄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
“지금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하지만 일단 그렇게 생각 안 하려고 노력은 해볼게요.”
“……그것참 고맙네.”
레오나드는 잠시 목을 가다듬고 그 상태 그대로 말을 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로레이나가 갑작스레 팔을 잡아끄는 통에 끝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눈은 왜 가리는 거예요? 대화할 때는 꼭 눈 마주하기로 나랑 약속하지 않았었나.”
토끼 같은 눈매가 사르르 접혔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로레이나의 머리카락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니,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어도 로레이나는 빛났을 것이었다. 그의 눈에는 언제나 로레이나뿐이었으니까.
“아, 맞다. 당신 말 듣기 전에 할 말이 있어요. 사실 좀 신경 쓰이던 게 있었는데…….”
뭔가를 고민하는 듯 코끝을 찡긋하던 로레이나가 다리를 레오나드가 있는 쪽으로 옮기며 말을 이었다.
로레이나가 고개를 숙이자 보는 것만으로 달콤한 색채가 레오나드의 어깨에 닿았다.
“너무 놀라지 말아요.”
그 모습을 홀린 듯이 보던 레오나드는 제 입술에 무언가가 닿았을 때 정신을 차렸다.
그것이 언제나 목말라하던 그 입술이라는 건 부끄러운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로레이나를 보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해 주겠다고 한 건데 다 받기만 한 거 같아서.”
“…….”
“저는 당신처럼 잘하지 못하니까 이 정도만 할게요.”
처음 해보는 일에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 듯 한참을 다른 곳만 배회하던 푸른 눈이 레오나드에게 닿자 결국 옅은 웃음기를 띠었다.
“어때요? 이제 좀 실감이 나요? 제가 이거 때문에 문도 잠갔는데.”
응, 충분해. 레오나드가 상상치 못한 만족감에 뻐근한 심장을 누르며 울 듯이 웃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아니, 아직 부족해.”
팔을 뻗어 제 앞에 있는 가느다란 허리를 감은 레오나드가 다급히 입을 맞췄다.
아래에서 당기는 힘을 견디지 못한 로레이나가 미끄러지듯 내려와 레오나드의 다리 위에 안착했다.
숨 막힌다며 자신의 어깨를 치며 웃는 로레이나를 보면서 레오나드는 생각했다.
지금 이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