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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53화 (53/144)

#53화

행복했던 날들이 지나고 드디어 기다리던 귀족 회의가 다가왔다.

무도회에 온 귀족들 얼굴은 다 익혔으니 절대 헷갈릴 일은 없었다.

그러니 준비는 정말로 완벽했다. 딱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어째서 같이 못 들어간다는 거지.”

……이 사람 정도일까.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제럴드를 노려보던 레오나드가 불퉁하게 읊조렸다.

그에 제럴드는 몇백 년간 레오나드를 모셔온 헨티슨 가문 사람답게 능숙하게 대처했다.

“원래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니까요. 황제 폐하께서 회의장에 먼저 들어가 계시면 안 되죠.”

“그럼 로레이나도 마지막에…….”

“안 됩니다. 아멜리오 백작은 ‘백작’이니까요.”

지금 제럴드와 레오나드가 실랑이를 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내 입장 순서 때문이었다.

귀족 회의는 신분이 낮은 순서부터 먼저 입장하게 되어있었다.

그러니 백작인 내가 레오나드와 같이 들어가는 건 불가능했다.

‘내가 레오나드를 제외하고 가장 높은 신분이었다면 또 모르지만.’

제럴드는 그렇다 쳐도 데프론 공작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어림도 없지.

잠시 넷이서 같이 입장하는 그림을 상상해보았다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상상을! 으으, 끔찍해라. 이 조합이 말이 되냐고.

“아무리 비서관이어도 회의장에 황제 폐하와 함께 들어갈 수는 없어요. 그런 적은 카일룸 제국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럼 내가 최초가 되면 되겠…….”

“안 됩니다!”

제럴드가 거의 빌다시피 외치며 손을 내저었다.

이쯤 되면 레오나드도 물러설 법할 텐데 그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가 뭔지 아주 잘 알았다.

‘얼마 전에 제럴드가 한 이야기 때문이겠지.’

레오나드와 내가 옷장 안에 숨었던 날 제럴드가 가져온 소식은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이작 데프론에 관한 이야기였으니까.

‘데프론 공작이 황실 기사단 충원 문제를 회의 안건으로 냈다고 했었나.’

그래, 분명 그런 소식이었다. 그러니 제럴드가 그렇게 열심히 레오나드를 찾아다녔던 거고.

일단 아이작의 말은 그럴듯했다. 정말로 기사단 인원은 많이 부족했으니까.

레오나드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그전에 있던 황궁 사람들을 다 물갈이한 탓이었다.

이전에 아이작의 사람이었던 이들을 그대로 둘 수는 없으니.

그리고 그 물갈이에 가장 직격탄을 맞은 게 바로 황실 기사단이었다.

조만간 기사들을 더 뽑을 거라는 말을 레오나드도 지나가듯이 했었으니 충원 자체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문제는 이 안건이 통과되었을 경우 기사단 충원에 아이작이 관여하게 될 거라는 거지.’

귀족 회의에서 통과된 안건은, 보통 그런 식으로 진행이 되니까.

그 점을 생각하면 이는 아이작이 황실을 자기 사람들로 채우겠다고 선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뭔 짓을 할 거라고 대놓고 보여 주는 셈이었고.

그런 상황에 내 입장 순서가 데프론 공작 바로 앞이니 레오나드가 이 난리를 칠 만도 했다.

제럴드는 저주 때문에 레오나드와 함께 입장해야 해서 나랑 같이 들어갈 수 없었으니까.

“로레이나가 그 자식과 독대할 가능성을 아예 만들고 싶지 않아.”

레오나드가 짓씹듯이 중얼거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상당히 초조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로레이나를 죽이겠다고 대놓고 말까지 한 놈이야. 괜한 위험 감수하지 말고 그냥 같이 들어가.”

“……아멜리오 백작이 걱정되시는 건 압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도 생각해 주세요”

“…….”

“오늘은 폐하께서 참석하시는 첫 회의가 아닙니까. 괜한 논란은 만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제럴드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레오나드의 미간이 더 찌푸려졌다.

나는 제럴드가 눈치채기 전에 슬쩍 발꿈치를 들어 손가락으로 레오나드의 미간을 꾹꾹 눌러 펴주었다.

레오나드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에 나는 회의 예행 연습도 할 겸 레오나드의 손바닥에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웃어요.’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챈 레오나드가 뭐라 말을 하려다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등 뒤로 내 손을 그러쥐었다.

그렇게라도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는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레오나드가 살짝 흐트러진 내 머리를 정리해 주며 물었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저는 따로 들어가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답하자 레오나드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또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는 그 표정에도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제럴드 말 따라 흠 잡힐 일은 아예 만들지 않는 게 좋아.’

아직도 아이작 데프론이 황제였던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여럿 있었다.

가뜩이나 레오나드가 탐탁지 않을 텐데 물고 뜯을 거리를 줄 수는 없지.

‘최대한 정석대로 가는 게 좋아.’

그리고 아무리 아이작이 막 나간다고 한들 황궁 한복판에서 나를 죽일 수 있겠어?

그건 좀 아니잖아.

레오나드에게 잡힌 손을 꼼지락거리며 웃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던지 그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해.”

오, 웬일이래? 끝까지 같이 들어가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내가 좋아하는 게 표가 났는지 레오나드가 헛웃음을 지었다.

“너무 좋아하지는 마. 내 말 아직 안 끝났으니까.”

“뭔데요? 더 할 말이 있어요?”

“따로 입장하는 대신 기사들도 동행해서 가. 그거 아니면 허락 못 해.”

짐짓 단호한 표정을 한 채로 레오나드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제안이었기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나도 내 안전이 제일 중요한 사람이라고요.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그 말에도 레오나드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내 손을 잡은 손에 연신 힘을 주었다.

초조함이 가득 담긴 행동에 나 역시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무슨 일 있으면 내 이름 크게 불러.”

“뭐야. 그럼 구하러 와주기라도 할 거예요?”

농담 삼아 작게 웃으며 물은 말이었는데 레오나드가 제법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물론이지. 뭐든 하겠다고 했잖아.”

“…….”

“언제든 불러. 그게 어디든 내가 찾아갈 테니까.”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그야말로 완벽한 대답.

그 말의 깊이에 잠시 허우적거리던 나는 이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밝게 웃어 보였다.

“알겠어요. 꼭 찾아와요.”

레오나드가 이 미소에 안심할 수 있도록.

* * *

순서에 따라 회의장에 입장하자 시종이 배정받은 자리로 안내를 해 주었다.

제럴드에게 미리 들은 대로 제일 상석인 레오나드의 바로 옆자리였다.

의자를 빼고 이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자 그제야 내가 황제의 비서관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회의장이 이렇게 클 줄이야.’

그리고 인원도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무도회야 그러려니 했지만, 회의에도 참석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잠시 당황하기는 했지만 금방 마음을 가라앉혔다. 레오나드가 불안해한 것과 달리 회의장 입장까지는 아무런 일도 없었으니까.

‘너무 사서 걱정한 건가?’

하긴 나에게 협박을 하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뭔가를 보여준 적은 없지 않은가.

어쩌면 너무 화난 나머지 홧김에 뱉은 말일지도 몰랐다.

물론 지금까지 아이작이 어떤 식으로 권력을 유지해왔는지 들었으니 아예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지만, 아이작도 늘 나쁜 짓만 할 수는 없을 테니까. 가끔 이럴 때도 있는 거겠지.

문제는 오늘 그가 이야기할 안건이었다.

‘일단은 생각을 멈추고 회의에 집중하자.’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드는데 어디선가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이작 때문에 예민한 상황이라 다급히 고개를 돌리니 회의장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시선을 피하는 것이 보였다.

미처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사레라도 걸린 듯 기침을 하기까지 했다.

‘……도대체 뭐지? 이 상황은?’

뭔가 이상한 분위기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옆쪽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크흠!”

고개를 돌리자 그 방향에 서 있던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름이 테일른 남작이었던가.

“저는 테일른 남작이라고 합니다, 아멜리오 백작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네, 저도 반갑습니다.”

머뭇거리다가 한 말에 테일른 남작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내 눈치를 살피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향한 것은 덤이었다.

그에 어색하게 웃던 나는 조용히 일어나 살짝 자리를 옮겼다.

곧 있으면 내 옆자리에 레오나드가 올 텐데 이대로 이야기하고 있을 수는 없지.

가뜩이나 사람들이 몰려들 기세인데 레오나드까지 옆에 등장하면 혼란만 가중될 게 뻔하잖아.

속내를 감추며 웃자 그에 같이 웃던 테일른 남작이 물었다.

“수도에 올라오신 건 처음이시라고 들었는데 혹시 말동무가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말동무요?”

생각하지도 못한 말에 되묻자 남작이 해맑게 웃으며 초상화 한 장을 내밀었다.

“제 아들입니다.”

그걸 보는 순간 느낌이 딱 왔다. 맙소사. 여기는 부모가 대리 고백하는 게 유행이야?

어이없어서 멍하니 있는 와중에도 남작은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제 아들이 얼마나 머리가 좋으며 또 얼마나 잘생겼는지에 대해.

왜 사람들이 나를 힐끗힐끗 쳐다봤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나는 이곳 귀족들이 보기에 최고의 신붓감이었던 것이다.

내가 최근 들어 가장 관심받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다. 데프론 공작을 신경 쓰느라 이쪽은 전혀 고려하지 못했었는데.

‘귀찮게 되었네.’

내가 테일른 남작을 상대해 주는 듯 하자 멀리서 눈치만 보던 이들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젠장. 이럴 줄 알았다니까. 조금 있으면 회의가 시작되니 도망갈 수도 없고.

“백작님, 저는 헤일로 자작이라고 합니다. 저희 아이는…….”

“저는 실폰 남작입니다. 혹시 취미가 어떻게…….”

“백작님, 폐하께서는 어떤 것에 관심이 있으신지 혹시…….”

여러 사람이 동시에 말하는 통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기사들이 와서 제재해 주길 바랐지만, 또 그렇게까지 소란을 일으킨 건 아니라 좀 애매했다.

“저기, 일단 회의가 끝나면 답변을…….”

지키지도 못할 말을 내뱉으며 팔을 휘저었을 때 누군가가 불쑥 입을 열었다.

“백작님, 실례가 된다는 건 알지만 너무 궁금해서요. 혹시 생각해두신 혼처가 있으신가요?”

사람이 너무 많아 누가 꺼낸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 다 이 질문의 답을 궁금해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천천히 입을 뗐다.

‘그래. 지금 확실히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는 당신들과 가족으로 엮일 생각이 없다고.

“따로 정해진 혼처는 없어요.”

“그럼…….”

“아예 결혼할 생각이 없거든요.”

생각보다 말이 또박또박 크게 잘 나왔다. 아마 조금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들렸을 것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당분간 귀찮게 하는 사람 없겠지.’

가뜩이나 신경 쓸 것이 많은데 이런 일로 골머리를 앓는 건 사양이었다.

제대로 못 박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이었다. 내 뒤에서 물건이 우르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은.

“쿨럭.”

연이은 기침 소리에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레오나드가 뭔가에 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레오나드가 한 번 더 기침했다.

“쿨럭.”

……뭐지, 이건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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