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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54화 (54/144)

#54화

나와 눈이 마주친 레오나드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옆으로 휙 돌렸다.

그리고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양 표정을 갈무리하고 자기 자리로 걸어갔다.

입가에 꽤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아하니 당황한 것을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거 아니야, 당신 이미 들켰어.

‘갈 거면 바닥에 떨어뜨린 거라도 좀 줍고 가던가.’

레오나드가 있던 자리에는 주인을 잃어버린 서류 뭉치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숙여 회의 자료를 집어 들었다.

이렇게 바보 같은 모습을 보였다가 귀족들한테 무시라도 당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황제 폐하께서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나신 모양입니다. 저렇게 서류까지 집어 던지신 걸 보아하니.”

“그러게, 내가 조금 조용히 하자고 했잖아요. 방금 얼굴 봤어요? 어찌나 서늘하던지!”

“하프 드래곤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 떨리네요. 듣자 하니 손짓 한 번이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단번에 날려버릴 수 있다고 하던데…….”

“조용히 좀 해요. 다 들리겠어요.”

……응, 괜한 걱정이구나. 그렇게 착각해 준다면야 고맙지.

나는 무수히 쏟아지는 착각의 말을 들으며 재빨리 레오나드를 따라갔다.

확실히 지금 레오나드가 무표정인 것처럼 보이기는 했다.

혹시 화가 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물론 나한테까지 그렇게 보였다는 말은 아니었다.

‘이미 별의별 꼴 다 봤는데, 뭐.’

나에게 레오나드는-내가 에녹과 사랑의 도피를 떠났다는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한-어딘가 조금 허술한 남자였을 뿐이니까.

게다가 아까는 바보 같은 얼굴로 서류 뭉치를 와르르 떨어뜨리기까지 했으니.

‘생각해 보니 조금 귀여운 것 같…….’

불쑥 든 생각에 놀란 나는 어쩐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에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미쳤나 봐, 진짜.

“여기요.”

레오나드가 내팽개치고 간 회의 자료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아, 응.”

레오나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받아들었다. 아까와 달리 이제는 얼굴이 꽤 괜찮아 보였다.

‘남자 주인공이라 그런지 감정 조절도 잘하네.’

새삼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 조금 달라 보이는 것 같고. 확실히 레오나드가 잘생기기는 했지.

차분한 얼굴로 회의 자료를 훑는 모습이 그림 같……. 아니, 잠깐만.

“폐하.”

“…….”

“폐하!”

“어?”

내 부름에도 한참이나 대답을 하지 않던 레오나드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하지만 그는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여전히 떨리고 있는 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모습에 나는 몸을 기울여 작게 속삭였다.

“서류 거꾸로 들었어요.”

“아…….”

“글자가 거꾸로 되어 있잖아요. 몰랐어요?”

내 말에 그제야 레오나드가 작게 헛기침을 하더니 자료를 바르게 놓았다.

뭐야, 진짜? 뭐 때문에 저렇게 당황한 거지?

심지어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가 화들짝 놀란 얼굴을 하기도 했다.

꼭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첫 회의라 긴장이 되어서 그런가.’

하긴, 보는 눈이 몇인데 긴장이 안 될 수가 있나. 나는 덩달아 떨리는 기분에 잠시 심호흡을 했다.

아까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가뜩이나 신경 쓰이는 게 많은데 불편하게.’

오히려 아까보다 더 눈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아까 내 말이 그들의 묘한 경쟁심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이러다 결혼하기 전까지 계속 저런 소리 듣는 거 아니야? 나는 뭐 이렇게 쉬운 일이 하나도 없냐.

“……그냥 아무도 붙잡고 결혼해버려?”

그래, 소설들 보면 많이들 하잖아. 필요에 의한 계약 결혼 같은 거.

나한테 관심 없을 법한 사람 아무나 골라서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어차피 레오나드는 나중에 셀리아와 이루어져야 하잖아.’

나는 그 전에 레오나드의 곁을 떠나야 하고.

여태껏 아무렇지 않게 해 왔던 생각인데 이상하게도 전과 달리 가슴이 욱신거렸다.

‘갑자기 왜 이래. 이러지 마.’

이럴 거 알고 시작한 거잖아. 셀리아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옆에 있기로 한 거였으면서.

‘애초에 내 목적은 데드 엔딩을 피하는 거였잖아.’

그러니 나는 잘하고 있는 거야. 복잡한 마음에 고개를 푹 숙이는데 어디선가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귀찮다고 느꼈던 다른 이들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깊이의 것이.

‘뭐지?’

어쩐지 익숙한 느낌인지라 살짝 고개를 들었던 나는 곧바로 마주친 적안에 놀라 몸을 떨었다.

레오나드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회의장 안에 오로지 나만 존재한다는 양, 그렇게. 그 시선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로레이나.”

레오나드가 나직이 내 이름을 읊조렸다. 그리 작지는 않으나 회의장 안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크기로.

방금까지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긴장감에 손이 잘게 떨렸다.

‘나 혹시 방금 생각한 거 입 밖으로 뱉었나?’

맙소사. 어떻게 이런 실수를. 아무리 정신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

“저, 레……. 아니, 폐하.”

나는 평소와 달리 우물쭈물하며 좀처럼 입을 떼지 못했다.

레오나드는 그런 나를 아무런 말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많이 화났나?’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좋아한다고 대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사귀는 사이나 다름없잖아.

무도회 날 이후 며칠 동안 레오나드와 같이 있었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생각할수록 볼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나는 조용히 손부채질을 했다.

……이래놓고 난데없이 아무나 붙잡고 결혼할 거라고 하다니. 다시 생각해봐도 어이없었다.

“폐하, 있잖아요. 저기, 방금 한 말은 그러니까…….”

“…….”

“그러니까…….”

변명이라도 해 볼까 해서 입을 열었으나 도무지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망설이는 동안 레오나드의 얼굴은 점점 굳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당신의 짝은 미래에 당신의 저주를 풀어줄 예쁜 여자 주인공이라고. 그러니 나는 다른 사람 찾은 거라고 어떻게 말해.

‘그냥 긴장해서 헛소리한 거라고 할까.’

그게 차라리 나을 거 같았다. 괜히 들켜서 의심받느니 좀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게 낫지.

그리고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그렇게 생각을 마치고 입을 뗐을 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입이 나직이 말을 뱉었던 것은.

“로레이나.”

아무리 들리지 않는다고는 하나,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호칭에 다시금 움찔 몸이 떨렸다.

하지만 이는 뒤에 나올 엄청난 말에 비하면 놀랄 것도 아니었다.

“할 거면 나랑 해.”

“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목소리가 조금 크게 나갔다. 설마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 뜻 아니겠지?

너무 놀라서 입을 벌리자 레오나드가 작게 헛기침을 하더니 확인 사살을 했다.

아까와는 달리 귀 끝이 살짝 붉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럴 거면 나랑 하자고.”

“…….”

“결혼.”

몇 번이나 기억을 더듬어 확인했으나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남자 주인공이 나에게 프러포즈를 하고 있었다.

‘……제정신인가?’

방금 내 말을 듣고도 저런 말을 한다고?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왜, 왜요?”

“왜냐고?”

여전히 붉은 귀를 잠시 매만지던 레오나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너랑 결혼하고 싶으…….”

“자, 잠시만요!”

책상 아래로 레오나드의 손을 잡으며 다급히 외쳤다.

보는 눈이 몇인데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어떡해!

‘레오나드가 이런 성격이었나?’

잠시 고민했지만, 답은 금방 나왔다. 원작 속 레오나드는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레오나드의 성격은 굳이 말하면 차가운 쪽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원작 속 레오나드와 셀리아의 만남은 가히 충격적이었으니까.

로맨스 판타지 소설 여자 주인공답게 셀리아는 마법을 써서 황궁 창문으로 날아든다.

그리고 그때 마침 창밖을 보고 있던 레오나드와 처음으로 만난다.

‘당신을 구하러 왔어요.’

달빛 속에서 나타난, 300년이 넘도록 이어진 저주를 끝내줄 구원자.

게다가 셀리아는 레오나드에게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착한 마음씨까지 가졌지.

저주가 풀리기만을 염원해 온 레오나드가 사랑에 빠지기에 그야말로 완벽한 조건이었으나…….

‘별 미친놈을 다 보겠군. 감옥에 가둬.’

……그래, 레오나드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후에 사정을 알게 된 헨티슨 가문 사람이 셀리아를 풀어주니 큰일이 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경계심이 심한 사람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성격이 너무 달라.’

하프 엘프라 저주의 영향을 벗어난 나와 달리 셀리아는 인간이라 얼굴을 볼 수 없어서 그랬던 건가.

조금 더 고민하는 사이 시작된 회의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집중했다.

레오나드가 즉위한 후 처음 하는 회의는 아무런 문제 없이 잘 흘러갔다.

귀족들은 갑작스럽게 황제가 바뀐 이 상황에 나름 적응을 한 것처럼 보였다.

레오나드 역시 처음 회의를 이끄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잘 행동했다.

물론 반은 책상 아래로 이름을 알려주고 있는 내 덕이었지만.

“그러면 이번에 수도 북부에서 일어난 산사태는…….”

손을 들고 발언하는 남자를 보며 나는 빠르게 레오나드의 손바닥에 그의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내 말을 알아들은 레오나드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길스턴 자작, 산사태가 일어난 원인에 대한 말이 없던데. 그건 어떻게 된 거지?”

“현재 파악하는 중입니다, 폐하.”

“최대한 빠르게 알아내도록. 산사태로 피해를 받은 마을도 신경 써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폐하.”

“아멜리오 백작은 후에 정확한 피해 상황에 대해 보고해 올리도록.”

“예, 폐하.”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종이에 내가 할 일을 기록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일이 아니라 제럴드가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아직 이쪽 일을 다 배우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지.’

자신의 일거리가 늘어나는 것을 두 눈과 귀로 확인한 제럴드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이 보였다.

미안해요, 제럴드. 내가 최대한 빨리 배울게요.

나는 잠시 제럴드를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발언이 끝난 길스턴 자작이 자리에 앉는 것이 보였다. 레오나드를 빤히 보는 시선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당연히 놀랍겠지.’

한 번도 만난 본 적 없는 황제가 자기 얼굴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겠어?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살짝 웃는데 누군가가 또 손을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레오나드의 손바닥으로 향하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손을 든 사람이 매우 익숙한 이였기 때문이었다.

‘아이작 데프론.’

내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아이작이 이쪽을 보며 웃는 것이 보였다.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휘어지도록, 아주 활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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