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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55화 (55/144)

#55화

세상에나. 눈 한번 마주치는 것만으로 이렇게 기분이 바닥을 칠 수 있다니.

“왜 그래?”

내가 가만히 있는 것이 이상했던지 레오나드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그에 나는 아무런 말 없이 손바닥에 빠르게 아이작의 이름을 적었다.

이를 확인한 레오나드가 아까보다 살짝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살짝 손을 다독이면서.

“데프론 공작, 회의에 낸 안건에 대해 말하려는 건가?”

“그렇습니다.”

아이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레오나드와 아이작의 대화에 귀족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전 황제와 현 황제의 대화라니. 이보다 흥미로운 상황이 있을까.

아마 모두 내색하고 있지는 않지만…….

‘지금 속으로 어느 쪽에 붙어야 할지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있겠지.’

아직도 세력이 막강한, 그들과 같은 인간 쪽에 붙어 있어야 할지.

아니면 이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이종족 황제에게 새로 둥지를 틀어야 할지.

만약 레오나드가 평범한 이종족이었더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레오나드가 궁을 떠나 이리저리 도망을 다니는 사이 데프론 공작가는 몇 대에 걸쳐 권력을 키워왔으니까.

황제가 바뀐 지금까지도 그 영향력이 남아 있을 정도로.

‘하지만 레오나드는 칼리드의 자식이야.’

이 카일룸 제국을 건국한 데르키안 황가의 마지막 남은 핏줄.

생명의 신이 아직 이 땅을 버리지 않았다는 유일한 증거.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카일룸 제국민이라면 모르지 않을 것이었다.

생명의 신의 후손인 드래곤이 세운 나라라는 건 카일룸 제국의 자랑이자 여러 나라 사이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차별성이었으니까.

‘그랬으니까 데프론 공작가도 차마 칼리드의 흔적을 지우지 못했겠지.’

여전히 제국 내에 황제 칼리드와 마녀 이사벨의 이야기가 떠도는데도.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이라면 일단 제거하고 보는 그 성미에 맞지 않게 말이다.

‘그러니 고작 했던 일이 아이들이 읽는 동화에 그런 장난질을 해놓는 거 아니겠어?’

황궁으로 오고 나서 이곳 시녀들에게 물어보니 그 동화는 예전에 황궁에서 배부한 동화집에 실렸던 이야기라고 했다.

레오나드가 즉위하기 전, 그러니까 아이작 데프론이 아직 황제였던 시절에 말이다.

그렇다면야 뭐,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누가 그 이야기를 만들었는지는 뻔하지.

아이작은 동화를 이용해 300년 전부터 이어져 온 데프론 공작가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자기 아들인 에녹까지 속여가면서.

‘……그나저나 에녹은 잘 있으려나.’

저번에 봤을 때 몸이 많이 안 좋은 상태였던 거 같은데.

다이아나가 알아서 잘해 줬을 것이라고 믿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중에 편지라도 해야겠다.’

그렇게 다짐하는 사이 아이작은 여전히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전에 올린 안건대로 황실 기사단을 추가로 선발하였으면 합니다.”

“이유가 뭐지?”

“폐하께서 즉위하시고 나서 황실 기사단 전원이 교체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아이작의 모습에 레오나드가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더 말해 보라는 뜻이었다.

예의 바름의 표본인 아이작과 매우 상반되는 모습이었으나 누구도 그것을 헐뜯거나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외심이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지금 레오나드의 모습이 그 누구보다 황제라는 자리에 잘 어울렸으니까.

두 사람의 대치를 보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 안에 담긴 감정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괜히 남자 주인공이 아니구나.’

숨소리조차 함부로 낼 수 없는 가운데, 분위기가 조금 변했다는 사실을 눈치챈 아이작이 움찔 몸을 떨었다.

곧바로 목이 멘 것처럼 잠시 헛기침을 했으나 그것이 사실이 아님은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속이 부글부글 끓겠지.’

그가 표정 관리도 제대로 못 하는 것이 웃겨서 나도 모르게 살짝 웃었는데, 순간 이쪽으로 시선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선한 느낌을 주는 녹색 눈에 잠시 음험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혹 그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당연한 일 아닌가? 황실 기사단은 이 황궁을 지키는 이들이야.”

잠시 말을 멈춘 레오나드가 살짝 몸을 앞으로 빼며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가늘게 뜬 적안이 불에 데기라도 한 듯 활활 타올랐다.

그와 반대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기운에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이 사람 아무리 생각해도 부끄러워할 때랑 화날 때랑 차이가 너무 크다니까.

“내가 직접 보고 뽑은 이들이 아닌데 어떻게 믿지?”

전부 나를 노리는, 당신의 사람들이었을 텐데.

레오나드가 뒷말은 하지 않았지만, 꼭 그런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다른 귀족들은 몰라도 레오나드와 직접 눈을 마주하고 있는 아이작은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었다.

그 말을 정통으로 받은 아이작이 잠시 눈을 감고는 숨을 골랐다.

“……폐하, 아무리 그래도 기사단의 인원이 너무 적습니다. 폐하께서 위험한 상황에 처하시기라도 한다면…….”

아이작이 눈썹을 한껏 늘어뜨리며 호소하던 순간이었다.

걱정이 담긴 듯한 목소리를 끊고 별안간 회의장 안에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그 웃음소리의 출처는 바로 내 옆이었다.

이보다 더 웃기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듯, 레오나드가 입가를 손으로 가린 채 웃고 있었다.

진지한 분위기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나는 그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건지.’

저 말을 뱉은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이작 데프론이라니.

지나가던 제럴드가 반란을 일으킨다고 나설 만한 소리였다.

“쓸데없는 걱정이로군, 공작.”

“…….”

“감히 나한테 덤빌 간 큰 인간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레오나드가 턱을 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동시에 느껴지는 강한 압박감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레오나드의 뒤로 보이는 드래곤의 형상에 놀라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자 이를 눈치챈 듯 레오나드가 천천히 내 손을 그러쥐었다가 놓았다.

“기사가 더 필요한 일이 생기면 그때 가서 더 뽑도록 하지.”

“…….”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레오나드가 마지막 말로 쐐기를 박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설명이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레오나드에게 위협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여기서 아이작이 더 우기면 그야말로 웃기는 꼴이 되지 않겠어?

걱정하던 일이 잘 해결된 느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나와 레오나드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이 다 예견된 것들이라는 것.

“예, 맞는 말씀입니다. 그 누구도 폐하의 강함을 따라올 수 없죠.”

아까보다 한결 편해진 얼굴로 아이작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하지만 폐하, 혹시 모를 상황이라는 게 있습니다.”

레오나드의 서늘한 기운에 의해 잠시 닫혀 있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준비해온 대답과 함께.

“칼리드 히르 데르키안 황제 폐하께서 어떻게 되셨는지 잊어버리신 것입니까?”

아이작의 말을 끝으로 잠시 회의장 안에 짙은 정적이 흘렀다. 온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싸늘한 침묵이었다.

귀족들은 조용히 눈만 움직여 분위기를 살폈다. 마주치는 시선 속에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지금껏 그 누구도 레오나드 앞에서 칼리드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누가 굳이 나서서 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종의 금기어였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칼리드에 대한 언급이 그의 사후를 떠올리게 할까 봐.

현재 카일룸 제국에서 나름 이름을 날리고 있는 가문들, 그러니까 지금 이 회의장 안에 있는 이들은 모두 300년 전 레오나드가 암살당할 뻔했던 수많은 사건의 주도자와 방관자였으니.

칼리드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기사 중 가장 말단이었던 헨티슨 가문이 결국 그의 아들 레오나드를 데리고 황궁 밖으로 도망치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리고 데프론 가에 붙었던 나머지 귀족들은….

‘그 대가로 아주 잘 먹고 잘살았지.’

받은 것이 많으니 지금 저렇게 눈치만 보고 아무런 말도 못 하는 것이리라.

아무리 그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라고 한들, 자신들의 조상이 한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이득을 지금까지 버젓이 누리고 있는 이상.

“……지금 무슨 말을 한 건지 알고 있는 건가?”

아까보다 한참은 낮아진 목소리로 레오나드가 입을 열었다. 듣는 이라면 누구라도 벌벌 떨 차가운 음성이었으나 나는 알았다.

그 안에 숨길 수 없는 떨림이 공존하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이사벨이 칼리드에게 저주를 걸어 그를 처리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레오나드의 부모는 이사벨이 레오나드에게 날린 저주로 인해 목숨을 잃지 않았는가.

그로 인해 레오나드는 큰 죄책감을 갖고 있었고.

저주의 근원인 자신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괴로운 과거를 마주한 레오나드의 몸이 잘게 떨렸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작에게도 똑같이 느껴졌던 것 같았다.

사뭇 긴장하고 있던 얼굴에 얼핏 미소가 스쳐 지나갔던 것을 보면.

“제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꺼낸 것은 폐하께서 누구보다 안전하셨으면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충직한 신하인 양 말을 잇는 아이작의 모습에 레오나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레오나드는 이미 아이작을 보고 있지 않았다. 깊이 가라앉은 짙은 적안이 지금 이곳이 아닌 기억 속 어딘가를 훑고 있었다.

‘더 시간 끌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거야.’

초조한 마음에 레오나드를 힐끗 바라보았으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타오를 듯 빛나고 있던 붉은 눈이 점차 어둠 속으로 침전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뭐가 없을까, 레오나드가 단번에 정신을 차리게 할 방법이.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결국 그의 손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잠깐 사이에 차갑게 식은 체온이 손끝에 닿았다.

이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걱정이 되었으나 아주 찰나였다.

‘이건 당신 탓이야.’

난 이 말은 안 하려고 했어. 그러니 나중에 왜 그랬냐고, 왜 이래놓고 떠난 거냐고 나를 원망하지 마.

생각을 마치자마자 그의 손바닥에 빠르게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레오나드가 움찔 몸을 떠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개의치 않고 마지막 글자까지 적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바로 눈치챈 레오나드가 뭐라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레오나드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더 보고 있다가는 나까지 이상해질 것 같았으니까.

레오나드에게는 이것만으로 충분했는지 차가운 기운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이제는 오히려 열기를 머금은 손이 내 손을 힘주어 잡았다.

나는 그 간절하고 애달픈 손길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데프론 공작님.”

“예, 아멜리오 백작.”

기다렸다는 듯 앞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녹색 눈이 잠시 나와 레오나드가 앉아 있는 책상 쪽을 향했다.

다리 쪽이 가려져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겠지만 어쩐지 등골이 오싹했다.

“이 자리에서 바로 결정할 만한 사안은 아닌 것 같은데, 이쯤 하시고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나는 부들거리는 입꼬리를 애써 올리며 아이작을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세상 참 살기 힘들다.

나조차도 기분이 이렇게 구린데 레오나드의 심정은 어떨지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아무런 말 없이 내 손만 붙잡고 있는 레오나드를 힐끗 바라보는데, 대답이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예, 그렇게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번 회의가 길어지기도 했고…….”

“주, 중요한 사안이니 어쩔 수 없지요. 아멜리오 백작의 말이 맞습니다.”

평소라면 아이작의 비위를 맞추느라 바빴을 사람들이 하나같이 내 말에 동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분위기를 눈치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유롭게 웃고 있는 저 얼굴 때문이겠지.

‘애초에 내 말에 동조한다고 보는 것이 웃기기도 하고.’

어차피 회의가 끝나면 아이작에게 변명하기 위해 앞다투어 뛰어갈 사람들이니.

가만히 아이작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제럴드가 눈치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버티고 있을 줄 알았던 아이작은 의외로 제일 먼저 회의장 밖으로 나갔다.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듯 상당히 후련한 태도였다.

‘나도 이제 나가야지.’

나와 레오나드. 그리고 제럴드를 제외한 사람들이 다 나간 것을 확인하고 일어서던 참이었다.

레오나드와 맞잡고 있던 손을 떼려던 순간, 그가 다시금 손을 힘주어 잡은 뒤 그대로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엇…….”

잠시 휘청이던 몸이 그대로 레오나드의 품에 안착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제럴드가 헛기침하며 회의장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새는 없었다. 내가 글자를 썼던 자신의 손바닥을 물끄러미 보던 레오나드가 고개를 들었으니까.

“한 번만 더 해 줘.”

“…….”

“아까 했던 그 말.”

무언가에 억눌리듯 잔뜩 갈라진 음성이었다. 온갖 감정이 뒤섞인 듯한 눈에 나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나에게 그 말을 육성으로 뱉을 용기는 없었다.

그건 후에 레오나드의 곁을 떠날 때를 생각한 내 마지막 양심이었다.

대신 나는 아무런 말 없이 레오나드에게 입을 맞췄다. 갈증을 참던 레오나드가 그것에 넘어갔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 손을 감싸던 온기가 내 어깨를 안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전보다 한결 짙어진 것 같은 마음을 애써 부정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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