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안 그래도 깜깜한 방 안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방을 거니는 발소리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지금이 적기라는 듯 움직임이 점점 더 빨라졌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에 촛불에 비친 그림자가 거세게 일렁였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
작은 목소리가 미처 숨기지 못한 흥분으로 인해 잘게 떨렸다. 탐욕스러운 눈동자가 제 앞에 누워 있는 여자를 훑었다.
정확히는 달빛에 반짝이는, 자신의 것과 꼭 닮은 은발을.
바닥에 흘러내린 긴 은발을 쥔 남자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하하하…….”
즐거움을 참지 못한 남자가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올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여기는 그 누구도 모르는 데프론 공작가의 비밀 창고였으니까.
자신의 공간에서 기분 좋게 웃던 아이작이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마녀 이사벨과 어머니가 무슨 관련이 있다고 자꾸 물으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아닌 척하지만 분명하게 떨리고 있었던 푸른 눈동자. 그 속에서 아이작은 숨길 수 없는 동요를 읽었다.
데프론 공작저에서 당돌하게 외치며 에녹의 손을 잡고 나갔던 것과는 상반된 느낌이었다.
곧 그보다 더한 표정도 볼 수 있을 터였다.
에녹이 달라진 것도 다 그 반쪽짜리 계집 때문이니 일만 잘 해결되면 모두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었다.
에녹도, 그리고 본래 자신의 것이었던 황궁도.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만 해도 눈앞의 여자는 제 할 일을 다 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쯤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얼굴들을 생각하니 이제껏 고생했던 순간들이 다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정신을 차리면 어떨지 기대되는데.’
이런 보물을 이제야 발견하다니. 선조들이 남긴 흔적을 미리 확인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그랬더라면 그 하프 드래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스러운 일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권력의 상징인 반지를 넘기며 굽신거렸던 그 날의 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손이 달달 떨렸다.
“……어차피 나중에는 나한테 살려달라고 빌게 될 거야.”
자신을 깔보듯 내려다보던 적안이 두려움에 물들 것을 상상하니 짜릿했다.
아무래도 생명의 신은 제 후손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나의 손을 잡아줄 리가.’
만족스러운 미소가 입가에 떠올랐다.
자신에게 다시 반지를 가져다줄 여인을 내려다보는 아이작의 녹안에 부드러운 미소가 드리웠다.
그렇게 데프론 공작가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아가씨,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사다리에 탄 채 책장에 꽂혀있던 책을 바닥으로 옮기는 나를 보며 메리가 물었다.
뭐 하긴. 여기서 나갈 준비하지.
‘여기 오래 있을수록 안 좋아.’
레오나드 곁에 오래 있을수록 원작대로 갈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진다. 그건 부정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꼭 레오나드 옆에 있어야 살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예전에 했던 대로 가문의 기사들을 늘리고, 저택 밖에는 되도록 나가지 않으며 은둔 생활을 하면 어떻게든 데드 엔딩을 피하게 되겠지.
그리고 굳이 저택 안이 아니더라도 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것이 아주 미약한 가능성이라 할지라도.
‘……그래, 그러면 된 거야.’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었다. 나는 메리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서둘러 움직였다.
준비를 다 마칠 때까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괜히 그랬다가 말이 새어나가 레오나드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내가 가만히 입을 다물자 메리가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따라왔다.
“무슨 일 있으세요? 표정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안 좋기는. 너무 좋아서 탈인데.”
“기분이 너무 좋으신 분이 보통 그런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죠.”
메리가 입술을 쭉 내밀며 불퉁하게 투덜거렸다. 자연스럽게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이 멎었다.
“……내 얼굴이 어떤데?”
“당장이라도 울 것 같으세요. 쓰러지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이신걸요.”
“그렇게 보여?”
“네, 완전요.”
단호한 말에 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졌다. 굳이 보지 않아도 입꼬리가 축 처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많이 티나 나?’
메리가 눈치챌 정도면 다른 사람들도 다 알 거라는 건데.
오늘 만난 건 아직 메리뿐이니 다행이긴 하지만.
‘혹시 어제 레오나드도 알아차렸을까?’
갑작스러운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설마 그러겠어. 어제 얼굴도 제대로 안 보여 줬는데.
그리고 표정 감추는 건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잖아.
‘어떻게 여길 나갈지나 생각하자.’
레오나드에게 말해 봤자 안 보내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나가려면 그 사람 몰래 나가야 했다.
레오나드와 내가 떨어져 있는 시간은 아침에 일어난 직후 나갈 준비를 하는 시간과 자는 시간뿐이었다.
중간중간 다이아나가 나를 찾아온다든가 레오나드가 제럴드와 따로 볼 일이 있다든가 하는 시간도 있었지만 그건 유동적이고 워낙 짧으니 생략하고.
‘아침에 나가는 건 너무 눈에 띄니까 밤이 좋겠어.’
내가 일기장 역할을 다하고 레오나드가 잠든 다음. 그때 나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레오나드의 저주는 기밀이라 내가 일기장 역할을 할 때쯤이면 주위에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때는 나를 붙잡는 사람도 없겠지.’
그럼 나가는 건 오늘 밤이나 내일 밤이 좋겠…….
“무슨 생각 해?”
“……앗!”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놀란 몸이 휘청였다. 사다리를 떠난 발이 허공을 젓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가다간 바닥에 머리부터 박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곧 온몸을 강타할 충격을 상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윽고 떨어진 몸이 바닥에 부딪혔다. 생각했던 것보다 아프지는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무도회장에서 넘어졌을 때 에녹이 받아준 것과 같은 느낌이랄까.
“헉!”
불현듯 깨달은 사실에 번쩍 눈이 떠졌다. 예상대로 레오나드가 나한테 깔린 채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어쩐지 뭔가 느낌이 이상하더라니!
“미, 미안해요! 안 다쳤어요?”
“안 다쳤어. 너는?”
“나도 안 다쳤어요. 빨리 비켜줄……. 아얏.”
몸을 일으키다가 불쑥 다리에 느껴진 통증에 신음이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떨어지는 도중 어딘가에 세게 부딪힌 것 같았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다친 것을 늦게 깨달았다. 진즉에 알았더라면 어떻게 해서든 들키지 않게 입을 틀어막았을 텐데.
‘곧 탈출해야 하는데 이게 뭐야.’
이 다리로 황궁 경비를 뚫고 어떻게 나가냐고. 깊은 절망감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다친 거야? 어디 봐.”
“아니에요. 그냥 살짝…….”
“얼른.”
레오나드가 그답지 않게 굳은 얼굴로 종용했다.
다정하면서도 힘이 있는 말에 나는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몸을 맡겼다.
“저, 메리는…….”
“내가 들어오는 거 보고 바로 나갔어. 그것도 몰랐어?”
……몰랐다. 어떻게 탈출하면 좋을까 생각하느라 정신을 반쯤 빼놓고 있었으니까.
“아프더라도 잠깐만 참아.”
레오나드가 나를 조심스레 안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나를 자신의 다리 위에 앉힌 레오나드가 다친 다리를 유심히 살폈다.
“그냥 살짝 부딪힌 거예요.”
“살짝이 아닌데…….”
레오나드가 드레스 끝자락을 살짝 걷어내며 중얼거렸다.
고개를 숙이자 드러나 있는 발목이 퉁퉁 부어 있는 것이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 더 많이 부어오를 것 같았다. 딱 봐도 퍼렇게 멍이 들 조짐이 보였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많이 다친 것을 보자 너무 놀란 나머지 딸꾹질이 나왔다.
“……히끅!”
……총체적 난국이다, 진짜.
딸꾹질을 멈추려 입을 틀어막는 사이 내 발목을 살피던 레오나드가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삔 거 같아. 세게 부딪힌 거 같은데.”
“많이 심각한가요? 히끅!”
“응, 당분간 못 걸을 거 같은데. 가만히 있는 것도 아프지?”
딸꾹질을 멈추려 숨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왜 눈치채지 못했는지 모를 정도로 아팠다.
그에 덩달아 심각한 표정이 된 레오나드가 조금 더 드레스를 올렸다.
“발목만 다친 게 아니라 그 위도 다친 거 같은데?”
“……히끗! 진짜요?”
“다리 윗부분까지 멍이 들어있는 거 같아.”
어쩐지 더럽게 아프더라니. 나는 눈물을 삼키며 드레스에 가려져 있는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끅…… 얼마나 지나면…… 끅…… 나을까요?”
“좀 걸릴 거 같은데. 당분간 쉬어야 해.”
“빨리 낫는 방법은…… 히끅…… 없어요?”
“뭐 급한 일이라도 있어?”
……급한 일 있죠. 어서 당신한테서 도망가야 하거든요.
정곡을 찔린 기분에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곧바로 다리를 살피는 척 고개를 숙인 덕에 이상해 보이지는 않은 것 같았다.
레오나드의 표정도 괜찮아 보이고.
“이러면 레오나드가…… 히끅…… 불편하잖아요. 거의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 하는데.”
“어차피 한 공간에만 있으면 되니까 상관없어. 난 거의 집무실에만 있으니 넌 소파에 누워서 쉬면 돼.”
레오나드가 내 허리와 다리 뒤에 팔을 넣어 안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입을 막던 손을 들어 레오나드의 목을 껴안자 머리 위로 낮은 웃음소리가 내려앉았다.
그 안에 든 애정의 깊이가 물씬 느껴져서 심장이 찌르르 울렸다.
“아니면 내가 안고 다녀도 상관없고.”
“……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당황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었으나 레오나드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너만 괜찮다면 그렇게 할게.”
“……그건 좀 그런데요.”
공주님 안기로 나를 안아 침실까지 온 레오나드가 조심스레 나를 침대 끄트머리에 앉혔다.
그러고 나서 그냥 갈 줄 알았던 레오나드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하얗고 긴 손가락이 다친 발목을 살피듯 느릿하게 훑고 지나갔다.
어쩐지 간지러운 느낌에 몸을 움찔 떨자 가만히 다리를 살피던 레오나드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럼 빨리 낫게 하는 건 어때. 내가 그렇게 해 줄 수 있는데.”
“……히끅! 하지만…….”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물론 레오나드가 치료해 주면 금방 낫겠지.
나도 그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다리만 낫는다면야 황궁을 벗어나기 한결 쉬워질 텐데 왜 마다하겠어.
‘지금도 아파죽겠는데.’
문제는 치료 방식이 입맞춤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필 다친 부위가 발목부터 허벅지까지라는 것도 한몫했고.
접촉 방식이 꼭 입맞춤이 아니더라도 효과는 있다고 했지만, 워낙 미미하다고 했고 애초에 그 방식도 문제…….
‘하, 모르겠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냥 눈 딱 감고 치료받아? 하지만 너무 부끄러운데.
내가 고민하는 걸 알았던지 묵묵히 기다리던 레오나드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좀 그러면 내가 눈 감고 할게. 어때.”
“눈을 감으면 앞이 안 보이…… 끅…… 잖아요.”
“그래도 할 수 있어. 난 원래 보이는 것보다는 느껴지는 거에 더 의존하는 편이라.”
하긴. 레오나드는 저주 때문에 시각보다는 다른 감각에 더 예민하지.
그리고 굳이 그 문제가 아니더라도 레오나드라면 할 수 있겠다는 알 수 없는 믿음이 있었다.
“좋아요. 대신 눈 감지 말고 눈 가리고 해요……. 히끅.”
“왜, 못 믿겠어?”
“……네.”
나지막이 대답하자 레오나드가 손을 뻗어 내 발목을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좋은 생각이야.”
살짝 고개를 숙인 레오나드가 발목에 입을 맞추며 작게 속삭였다.
적안이 기이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계속 믿지 마, 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