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59화 (59/144)

#59화

“……네?”

미처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이었다.

레오나드가 아무것도 잡지 않은 손을 주머니에 넣더니 손수건을 꺼냈다.

뭘 하는 건가 싶어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레오나드가 쥐고 있던 손수건을 불쑥 내밀었다.

“자.”

“갑자기 웬…… 히끅…… 손수건이에요?”

“눈을 가리는 게 좋겠다며. 이걸로 가리라고.”

“내가요?”

“내가 하는 것보다는 네가 직접 하는 게 더 확실하지 않겠어?”

하긴 그건 그렇지. 헐겁게 묶을 수도 있는 거니까.

내가 하는 편이 여러모로 확실하긴 했다.

“그, 그럼…… 끅…… 내가 묶을게요.”

“그래.”

레오나드가 천천히 눈을 감으며 내게로 얼굴을 내밀었다. 가지런하고 긴 속눈썹이 눈앞에 보였다.

‘따로 관리하는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저렇게 예쁘지.’

남자 주인공은 뭔가 다르다 이건가.

어쩐지 숨을 쉬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딸꾹질 소리도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손을 들었다.

손수건을 들고 레오나드의 머리 뒤로 손을 가져가는 와중에 결 좋은 머리카락이 간지럽게 스쳤다.

방 안에 천이 스치는 소리만 작게 울렸다.

“다 되었어요.”

“그럼 시작할게.”

레오나드가 내 발목을 잡은 팔을 들며 고개를 숙였다. 곧 부드러운 감촉이 발목에 닿았다.

“……정말 안 보이는 거 맞죠?”

“당연하지. 네가 묶었잖아.”

“그건 그런데…… 히끅…… 움직이는 게 너무 자연스럽잖아요. 꼭 보고 있는 것처럼…….”

“나도 그러면 좋겠는데 아쉽게도 투시 능력은 없어서.”

……지금 뭐라고? 당황해서 나오려던 말은 바로 이어지는 입맞춤에 입안으로 삼켜졌다.

발목에 자잘한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처음 입을 맞춘 부위가 다 치료되었다는 게 느껴졌는지 레오나드가 천천히 상처 입은 부위를 타고 올라왔다.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다소 민망한 소리만 들렸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던 탓에 어느새 딸꾹질은 멈춘 지 오래였다.

‘눈도 가렸는데 왜 이상한 기분이 들지?’

아, 눈을 가려서 더 그런 건가. 간지러운 느낌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곧 무릎 아래까지 치료가 끝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레스가 무릎 살짝 위까지 밀려 올라갔다.

레오나드가 그곳에 입을 맞추려던 순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잠깐만요, 레오나드!”

“…….”

“잠깐만 멈춰봐요.”

다급한 말에 레오나드가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나는 방금까지 내 다리에 닿아있던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니까 더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거 같아.

빨리 떼어버려야지.

“저, 이제 그만할게요. 이 정도면 되었어요.”

“…….”

“……이 정도만 해도 아무것도 안 한 것보다는 훨씬 빨리 나을 테니까…….”

내가 손을 뻗어 묶은 손수건을 푸는 와중에도 레오나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뭐라고 말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조용히 있으니 더 미칠 지경이었다.

“……레오나드?”

조심스레 레오나드를 불렀을 때 묶여있던 손수건이 스르륵 풀리며 그의 턱밑으로 흘러내렸다.

이윽고 마주한 두 눈에 나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낮게 가라앉은 눈에 딱 봐도 알 수 있는 욕망이 넘실거렸다. 잠시 멍하니 있는 사이 레오나드가 내 허리를 감싸 끌어당겼다.

나는 그 힘에 속절없이 끌려가 레오나드의 품 안에 안착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잠깐! 치, 치료해 준다고 했잖아요!”

“내가 절대 믿지 말라고 했잖아.”

“그런 말이 어디 있…….”

“입 맞춰도 돼?”

말을 끊고 불쑥 뱉은 말에는 생각보다 배려심이 담겨 있었다.

다급한 행동에 언뜻 초조함이 비쳤기에 당장이라도 입을 맞춰 올 거라 생각했는데.

“네가 싫어하는 건 안 해.”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레오나드가 이마를 맞대며 속삭였다.

내가 싫다고 하면 정말 그대로 물러날 기세였다.

생각해 보면 레오나드는 늘 그랬다. 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내 의견이 먼저였지.

나는 눈앞에 있는 사랑스러운 이의 모습을 보며 마음을 굳혔다.

‘……오늘 떠나자.’

마음이 더 깊어지기 전에, 그래서 레오나드가 셀리아가 아닌 나를 선택하기 전에.

그때쯤이면 나도 정말 레오나드를 떠나기 싫어질지도 모르니까.

“레오나드.”

“……알겠어. 그럼 의사를 불러서 상태가 어떤지나 보…….”

쪽.

레오나드의 볼을 잡고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입술을 떼자 레오나드가 멍한 얼굴로 가만히 있는 것이 보였다.

“싫다고 한 적 없는데.”

“…….”

“뭐, 레오나드가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레오나드가 다급하게 입을 맞춰왔다.

내가 한 것과 달리 꽤 오래 머무는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얼마 전 레오나드와 함께 소원 나무에 걸었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저주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아주 오래도록.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떠나는 것이 맞았다.

그래야 원작대로 셀리아가 레오나드를 찾아올 것이고, 종국에는 그를 구원할 수 있을 테니.

* * *

“……오늘 있었던 일은 이걸로 끝이에요.”

나는 레오나드가 오늘 했던 마지막 일을 알려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레오나드는 잠들어 있었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레오나드의 얼굴에 쏟아졌다. 그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직 뛰는 것까지는 무리였지만 레오나드가 많이 치료해 준 덕에 느리게 걷는 것 정도는 괜찮았다.

‘이제부터가 기회야.’

평상시 그랬던 것처럼 레오나드의 침실에서 나가기 위해 문을 열자, 메리가 긴장된 얼굴로 큰 가방을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레오나드의 침실로 오기 전에 메리한테 여길 떠날 거라고 말했으니까.

내가 문을 완전히 닫고 나온 것을 확인한 메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작게 속삭였다.

“……백작님,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폐하께 말씀을 드리고 허락하시면…….”

“아니,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메리.”

말하면 레오나드가 보내주겠어? 당연히 안 된다고 하겠지.

“…….”

‘내 정체에 대해 다 털어놓고 이해해 달라고 하는 방법도 있지만…….’

세상에 어느 누가 믿어주겠어.

여긴 사실 소설 속이고 나는 다른 세상에서 그 소설을 읽다가 빙의한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당신을 구원할 여자 주인공이 미래에 나타날 것이며 그것을 알면서도 내가 당신의 정해진 인생을 망가뜨리려 했다는 것까지.

전부 다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닌가. 믿지도 않을 것이었다. 별 효과도 없을 것 같고.

‘……아니지. 그 말을 하면 확실히 인연을 끊을 수 있으려나.’

이야기를 다 듣고 화를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토록 자신을 괴롭히던 저주가 풀리는 미래를 내가 망치려고 했다는데 얼마나 증오스러울까.

‘상상하니까 끔찍하네.’

그러니 그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부터 셀리아가 예정대로 나타날 수 있게 죽은 것처럼 살 테니 이 정도 이기심은 있어도 되잖아.

레오나드의 붉은 눈이 나를 향한 분노로 가득 차는 것을 보는 건 너무 괴로울 것 같았다.

비겁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셀리아를 만나면 나 같은 건 금방 잊게 될 거야.’

레오나드와 있었던 시간은 그가 젠이었을 적까지 합쳐도 1년이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으니.

뭐, 그래도 그 정도면 과분하지. 나 같은 엑스트라에게는.

“메리, 짐은 다 챙겼지?”

“네, 저, 그런데…….”

잠시 뜸을 들이던 메리가 이내 결심한 듯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정말 에녹 님 도움을 받으실 거예요?”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메리에게 몸을 기댔다.

아직 혼자 오래 서 있기에는 좀 무리가 있었던 탓이었다.

“……응, 도와주시기로 했어.”

에녹의 도움을 받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원래도 자주 편지를 보내곤 하던 에녹의 편지가 하필 오늘 도착했기 때문에.

편지를 받자마자 혹시 도와줄 수 있겠냐는 말을 썼지만 설마 곧바로 그러겠다는 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하려는 일은 카일룸 제국 황제의 말을 거역하는 일이니까.

“저는 좀 불안해요, 백작님. 다른 분도 아니고 에녹 님이잖아요. 폐하와 데프론 공작가가 사이가 안 좋으신 거 아시면서.”

“그래서 더욱 에녹이어야 하는 거야.”

레오나드는 이미 나와 에녹의 사이를 오해한 전적이 있었다.

이번에 내가 에녹의 도움을 받아 도망간 것을 알면 또 그렇게 생각하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에녹의 도움을 받은 것에 배신감을 느낄지도 몰랐다.

레오나드가 괴로워할 것은 마음이 아프지만…….

‘그럴수록 나를 더 빨리 잊을 수 있어.’

그리고 내가 이 세계에서 레오나드를 제외하고 믿을 만한 사람도 에녹뿐이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이 일에 제격인데 굳이 다른 사람을 고려할 이유는 없지.

물론 에녹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기에 이것이 그에게 실례가 되는 일이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다른 선택권이 없잖아.’

다소 이기적이지만 나에게는 이게 최선이었다. 이 다리로 혼자 탈출하는 건 무리였으니까.

나는 굳은 마음으로 메리의 부축을 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에녹의 말에 따르면 황궁 뒤쪽으로 쪽문이 하나 있다고 했다.

워낙 오래되기도 했고 덩굴로 가려져 있는 탓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겨우 황궁 뒤쪽까지 가자 편지에 적혀 있던 대로 수풀 사이에 쪽문이 있는 것이 보였다.

손으로 덩굴을 걷어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알고도 못 발견할 뻔했다.

“……그럼 열게요.”

메리가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키며 조용히 속삭였다.

“응, 얼른 나가자.”

내 말에 맞춰 메리가 천천히 문을 밀었다. 꽤 오랫동안 사용이 되지 않은 탓인지 끼기긱- 하고 기괴한 소리가 났다.

건너편도 덩굴로 덮여 있었던 건 마찬가지인지라 걷어내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문밖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나무가 울창한 숲이었다.

수도에 큰 규모의 숲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마 그곳인 모양이었다. 하긴 이런 쪽문을 번화가로 연결되게 만들어놓지는 않았겠지.

“자, 백작님, 제 손 잡고 천천히 나오세요.”

먼저 문밖으로 나간 메리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걸음을 떼려다가 불쑥 느껴지는 시선에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세요?”

“……누가 이쪽을 보고 있는 것 같아서.”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뒤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 누가 보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혹시 몰라서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자 내가 하는 모양새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메리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에이, 아무도 없어요. 그리고 누가 봤다면 저희가 이렇게 나갈 수 있겠어요? 누구든지 바로 잡으러 오시겠죠.”

“……그렇지?”

하긴 누군가 봤다면 황궁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지.

아무래도 너무 긴장한 탓에 착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레오나드가 있을 방향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작게 심호흡을 했다.

이제 다시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이상했다.

‘……진짜 들키기 전에 빨리 나가자.’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느낌에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며 발을 뗀 순간이었다.

무의식중에 힘주어 걸은 탓에 허벅지부터 발까지 찌르르한 통증이 타고 내려갔다.

“아앗…….”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몸을 살짝 휘청이는데 뒤로 넘어가지 않게 어깨를 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는데 다행이었다.

“고마워, 메…….”

“괜찮습니까?”

머리 위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익숙한 느낌에 서둘러 고개를 들자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살피는 얼굴이 보였다.

“에녹…….”

“예, 나 맞아요. 혹시 다쳤어요?”

“아, 지금 다친 건 아닌데 다리를 약간……. 앗.”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녹이 다리 뒤로 손을 가져가더니 번쩍 나를 들어 올렸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한 탓에 재빨리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작게 속삭였다.

“에녹, 저 괜찮아요. 빨리 내려주…….”

“여기서 빨리 벗어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건 그런데…….”

“그러면 이렇게 가는 게 맞아요. 어차피 빨리 걷지도 못하잖아요.”

구구절절 다 옳은 말이라 뭐라 반항하지 못하고 조용히 몸에 힘을 풀었다.

사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다치지 않았더라도 어지러워서 얼마 못 걸었을 것 같긴 했다.

저항하기를 완전히 포기한 나는 나를 안은 에녹이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는 것을 느끼며 작게 읊조렸다.

“에녹,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네, 뭐든지 말해요.”

“진짜 미안한데 조금만 자도 될까요? 피곤한 건지 긴장이 풀어져서 그런지…….”

무거워진 눈꺼풀에 웅얼거리며 말하자 에녹이 조용히 웃는 소리가 들렸다.

“푹 자요. 도착하면 깨울게요.”

작게 토닥이는 손길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앞의 이 암흑처럼 레오나드와의 추억도 더는 보이지 않기를 바라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