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황궁의 뒤쪽에 있는 쪽문이 닫히는 것을 본 적안이 주위의 풍경에 동화되듯 어둡게 가라앉았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건만 가슴은 갑작스러운 일을 마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쿵쾅거리며 뛰었다.
레오나드는 이미 저만치에 떨어져 나뒹구는 심장을 애써 모른 체하며 고개를 돌렸다.
안 그래도 꽉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 손바닥에 핏방울이 맺혔으나 상처는 곧 저절로 사라졌다.
“제럴드.”
“예, 폐하.”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럴드가 천천히 걸어 나오며 모습을 드러냈다.
일련의 상황들을 다 목격한 탓에 레오나드를 살피는 기색이 역력했다.
로레이나를 만난 이후로 몰라보게 밝아졌던 모습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져버린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제럴드는 직감했다.
이제 자신의 주인은, 방금 황궁을 탈출한 그 사람이 없으면 빈껍데기나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확실히 따라붙었겠지?”
“예, 그렇게 지시해두었고 방금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혹시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잘 지켜보라고 해.”
다시금 쪽문 쪽을 보던 레오나드가 곧 거칠게 머리를 헤집으며 창가에서 벗어났다.
로레이나가 사라진 황궁은 벌써부터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겉보기에 달라진 것이 전혀 없음에도 그러했다.
사실상 로레이나 없이 살았던 세월이 훨씬 긴데 그 시절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양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도대체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버텼는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뭐 필요한 거 있어 보이면 그것도 티 나지 않게 도와주라고 해. 시녀 하나만 있으면 어려운 점이 있을 테니까.”
“저 그것이…….”
제럴드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레오나드가 빨리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자 닫혀 있던 입술이 마지못해 열렸다.
“에녹 데프론이 아멜리오 백작과 동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데프론 공작가에 심어놓은 이로부터 온 연락이 맞았던 모양입니다.”
“……에녹 데프론?”
“예, 오늘 낮에 말씀드렸는데 기억 안 나십니까?”
아, 그런 연락을 받았던가.
그러고 보니 제럴드가 서면으로 보고를 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뭔가가 적힌 서류를 받았던 기억이 머릿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로레이나와 한 공간에 있을 때는 굳이 서면으로 보고를 하지 않아도 되어서 제대로 살피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런 것도 제대로 기억 못 하다니.’
아무래도 로레이나가 떠난다는 생각 때문인지 몸 전체가 고장이 나버린 것 같았다.
이래서야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은가.
‘넌 내가 없어도 괜찮은 걸까.’
자신을 싫어해서 그런 건 아닐 거라고. 무슨 사정이 있어서 떠난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부정적인 마음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로레이나에게 곁에 있어 달라 매달린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그녀는 그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지 않은가.
애초에 로레이나가 자신의 옆에 있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득해지는 기분에 레오나드는 거칠게 입술을 짓씹었다.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가장 중요한 것은 로레이나가 뭘 숨기는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이로써 로레이나가 무슨 일이 있다는 건 확실해졌다.
‘저주를 풀면 뭘 하고 싶어요?’
갑작스레 로레이나가 눈물을 보였던 날, 분명 그렇게 물었었지.
그때는 그냥 뜬금없는 질문이라며 웃고 넘겼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질문에 뭔가가 있었던 것 같았다.
혹시 저주를 풀지 말까 했던 음습한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걸까. 그렇게 해서라도 붙잡고 싶었던 소유욕을 눈치채버린 걸까.
레오나드의 기준에는 걸리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로레이나의 앞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있어도 늘 부족했으니까.
사람과의 교류가 거의 없었던 자신과 달리 로레이나는 그녀를 아는 사람 모두가 좋아했다.
하다못해 로레이나의 가장 큰 적이라고 할 수 있는 데프론 공작의 아들 에녹 데프론도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지 않던가.
‘안전하게 가고 있을까.’
레오나드는 당장이라도 다시 데려오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다시금 로레이나가 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 작은 행동에도 베여 있는 감정의 깊이에 제럴드가 잠시 숨을 삼켰다.
“……사실 깜짝 놀랐습니다.”
“뭐가?”
“폐하께서 이런 결정을 하실 줄을 몰랐거든요. 당장이라도 백작이 못 나가게 막으실 줄 알았습니다.”
“……그랬지.”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평생 옆에서 나만 보고 살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잖아.”
무슨 일이 있는 건 확실한데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아마 대놓고 물어봤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예전에는 참 알기 쉬운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부끄럽거나 당황하면 그것이 바로 얼굴에 드러났고, 레오나드는 항상 그 모습을 보며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싶었던 마음을 삼켰으니까.
하지만 그건 명백한 오판이었다. 로레이나는 정작 말해야 할 중요한 것들은 말하지 않았다.
어여쁜 미소 뒤에 얼마나 많은 얼굴이 숨겨져 있을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항상 레오나드를 미치게 만들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뭘 숨기는지 알 수 있겠지.”
그러니 지금은 가만히 있을 것이었다.
레오나드는 로레이나의 신변에 위협이 되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쳐낼 준비가 되어있었다.
“내가 아무것도 안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적당히 사람을 풀어서 찾는 척하라고 해.”
“예.”
“로레이나가 위험해지는 일이 생겨서는 안 돼. 절대로.”
“예, 잘 지켜보라 지시해 두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가는 제럴드를 보던 레오나드가 다시금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늘 밤은 참을 수 없이 길 것만 같았다.
* * *
“으으음…….”
가늘게 뜬 눈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살짝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완전히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손끝에 닿는 침대의 감촉도 상당히 낯설었다. 어색한 느낌에 손바닥으로 이불을 천천히 쓸었다.
백작가나 황궁에서 쓰는 것보다는 다소 질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리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여긴 어디지.’
창문을 타고 들리는 시장터에서나 날 법한 시끌벅적한 소리에 천천히 다리를 움직여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제야 방 안의 풍경이 제대로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메리가 여관을 잡았나 보네.’
하긴. 어제 그 상태로 더 갈 수는 없었겠지. 시간도 많이 늦었었고 나는 잠들어 있었으니까.
게다가 다리도 이 지경이니 괜히 움직이다가 덧나는 것보다는 이렇게 한 번 쉬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다.
‘대충 보니까 점심 때쯤인 거 같은데.’
이렇게 많이 자다니. 어제 진짜 피곤했었나 보네.
슬슬 일어나야겠다 싶어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는데 이를 밖에서도 눈치챘는지 문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메리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고마워라. 나중에 맛있는 거라도 사줘야지.
“들어와.”
곧 문이 열리고 방 안으로 들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 일어나는 것 좀 도와줄래?”
“…….”
“아직 혼자서 그 정도까지는 못할 것 같은…….”
무의식중에 고개를 든 순간, 시야에 들어온,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에 나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아니,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어?
“……에녹?”
멍하니 이름을 뱉자 날 내려다보고 있던 녹색 눈이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봄바람과 잘 어울리는 미소였다.
“예, 나예요.”
들으면 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나긋한 미성이었지만 나는 좀처럼 웃지 못했다.
‘왜 에녹이 여기에 있는 거지?’
내가 부탁한 건 황궁을 탈출해 숙소를 잡는 것까지였는데.
혹시 몰라 기억을 더듬어보았으나 틀림없었다. 애초에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을 리도 없었고.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에녹이 아까보다 더 활짝 웃었다.
“도와주려고 아침 일찍 왔어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어제도 저 데려다주느라 힘들었잖아요.”
“이왕 도와주기로 한 거 끝까지 도와줘야죠.”
“그럴 필요는 없…….”
손을 내저으며 말하자 에녹이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말을 끊었다. 다정한 얼굴과 달리 제법 단호한 행동이었다.
“다 나을 때까지만.”
심호흡하듯 잠시 말을 끊은 에녹이 살짝 허리를 숙였다.
그 탓에 아래로 내려온 은색 머리카락이 내 이마에 간지럽게 닿았다.
“다리가 다 나을 때까지만 옆에 있을게요.”
“…….”
“걱정되니까.”
오로지 나만 담겨 있는 눈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에녹답지 않게 꽤 완강해 보이는 얼굴에 나는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더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에녹은 날 도와준 은인이니까.
“알겠어요. 그럼 조금만 더 부탁할게요.”
어차피 레오나드의 눈에 안 띄게 도망치려면 계속 이동해야 한다. 어느 정도까지는 에녹이 도와주는 편이 좋겠지.
내가 사라진 것을 안 이상 레오나드는 가만히 있지 않을 테고 곧 여기도 황궁에서 나온 사람이 들이닥칠지 몰랐다.
“혹시 바쁜데 괜히 저 때문에 여기 와 있는 건 아니죠?”
“안 바쁩니다. 오히려 요즘에는 여유로운 편이에요.”
조심스레 내 팔을 잡은 에녹이 곧 손에 힘을 주어 나를 당겼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주 수준급이었다.
“이전에는 내 시간이라는 게 없었으니까.”
내가 제대로 선 것을 확인한 에녹이 나와 눈을 마주하며 말갛게 웃었다.
여태껏 보아왔던 에녹의 모습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웃음이었다.
“그래서 4년 전 아멜리오 백작가에 있었던 때가 너무 소중했어요. 백작가에는 온갖 좋은 것들이 가득했거든요.”
“좋은 것들이요?”
궁금한 마음에 되묻자 에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일단 길버트의 특제 애플파이가 정말 맛있었죠. 어릴 때 자주 들려주었던 이야기들도 다 재미있었고.”
“나중에 길버트 만나면 꼭 이 말 똑같이 해 줘요. 분명 엄청 좋아할 테니까요.”
작게 웃으며 답하자 그것을 본 에녹이 덩달아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나를 웃게 한 것이 퍽 만족스러운 듯했다.
“물론이죠. 그때는 꼭 특제 애플파이 비법을 알아내고 말 겁니다.”
“에이, 그게 가능하겠어요? 저도 여태껏 못 알아낸 거라고요.”
“가능할지도 모르죠. 길버트가 저를 꽤 좋아했었거든요.”
“그건 부정 못 하겠네요.”
“그렇죠?”
에녹과 마주 보며 떠들고 있자니 4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지금에 비하면 비교적 걱정이 덜 하던 그때로.
“그리고 예법 상관없이 누워서 간식을 먹었던 것도 좋았고 호수에서 물놀이했던 것도 좋았습니다.”
“아, 맞아요. 그때 엄청 재미있었어요. 다 젖었는데도 바보같이 계속 웃음만 나더라고요.”
“재밌을 수밖에 없죠. 주변 사람들 시선 신경 쓸 것 없이 마음껏 놀고 떠들었으니까요. 다른 곳에서는 상상도 못 하는 일이라.”
“그리고요? 또 좋은 거 없었어요?”
추억 여행이라도 떠난 기분에 신나서 물은 순간, 기억을 더듬듯 읊조리던 에녹이 갑작스레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을 본 에녹이 여전히 내 팔을 감싼 손을 떼지 않으며 또박또박 말을 뱉었다.
“다요.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좋았습니다.”
“에이. 저 기분 좋으라고 그러는 거죠? 아무리 그래도 그 작은 곳에서 어떻게 불만이 하나도 없을 수가…….”
“정말입니다.”
에녹이 입가에 짙은 미소를 띠며 내 말을 끊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고 뚜렷한 대답이었다.
가만히 나를 응시하는 녹색 눈동자가 한층 더 따뜻한 빛을 머금었다.
그 안에 넘실거리는 무언가를 본 순간,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뒤에 이어질 말은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옆에 당신이 있었으니까요.”
“…….”
“그래서 무엇을 해도 좋았습니다.”
물론 도망치기에는 이미 늦은 뒤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