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61화 (61/144)

#61화

“어, 저기 에녹…….”

“…….”

“그게 그러니까…….”

……아, 괜히 물어봤다.

아멜리오 백작가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면 내 이야기가 나오는 건 뻔한 일이었는데.

나는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고 조용히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에녹이 했던 말의 의미를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내가 옆에 있어서 무엇을 해도 좋았다니.

‘직접적으로 말을 안 했을 뿐이지 좋아한다고 고백한 거나 다름없잖아.’

당황해서 손발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아무런 말 없이 눈치를 살피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제는 정말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입을 여는데, 그런 나를 보던 에녹이 다 안다는 듯 눈웃음을 짓더니 말을 돌렸다.

자연스레 내가 말할 기회는 사라졌다.

“평소에 쉬는 시간조차 거의 없다 보니 또래 친구랑 노는 게 그렇게 재미가 있더라고요. 로레이나도 그랬죠?”

“……아, 네, 그랬죠.”

“생각해 보니 우리 둘 다 친구가 별로 없네요.”

에녹이 뒷덜미를 긁적이며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 행동이 정말로 지금 상황이 재미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님을, 전부 나를 배려해 주려고 그러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나도 성의 없이 대답해서는 안 돼.’

에녹이 상처 입지 않을 수 있게, 최대한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말해야지.

나는 눈꼬리를 휘며 할 수 있는 최대한 밝게 웃었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게 애를 쓴 에녹이 어색해하지 않을 수 있도록.

“에녹, 아침 먹었어요?”

“…….”

“이 시간에 이런 걸 묻는 게 좀 이상하긴 하지만. 저한테는 아침이 맞으니까요.”

잡혀 있는 손을 살짝 뺀 후 다시 에녹의 팔을 잡았다.

내 얼굴을 보던 시선이 팔에 닿아 있는 내 손으로 향했다.

“지금 밥 먹으러 갈 생각인데 같이 먹을래요?”

다시 고개를 들어 싱긋 웃는 나를 보던 에녹이 짧게 웃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래, 이 정도면 되었다.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에 다시금 웃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쯤이에요? 수도를 벗어나지는 못했을 것 같은데.”

“예, 황궁 쪽문 쪽에 있는 숲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온 정도입니다. 날이 어두워서 더 걸을 수가 없었거든요.”

“아아.”

“메리도 오래 움직여서 그런지 지친 것 같아 그냥 여기로 들어왔어요.”

“그러셨구나. 감사해요. 메리는 어디 있나요?”

“말을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지 상태가 안 좋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쉬라고 했습니다.”

하긴 메리가 말을 잘 타는 편은 아니긴 하지. 그래도 어느 정도는 탈 줄 아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다니.

잠들어 있었으니 망정이지 깨어있었다면 나도 앓아누웠을지도 몰랐다.

난 메리랑 달리 아예 말을 탈 줄 모르니까.

가뜩이나 어제 상태도 안 좋았으니 정말로 침대 신세를 지고 있었을지도.

나는 어쩐지 오싹한 기분에 팔을 연신 쓸어내렸다. 메리는 그냥 쉬게 두고 나중에 식사를 따로 챙겨줘야지.

“그나저나 여기는 음식이 어떨지 모르겠네요. 혹시 여기서 밥 먹어봤어요?”

“아니요.”

에녹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를 따라왔다.

맛없으면 어떻게 하지. 어제 체할까 봐 제대로 못 먹어서 오늘은 맛있게 먹고 싶은데.

“그럼 메뉴가 뭐 있는지부터 먼저 물어봐야겠네요.”

“아, 그거라면 알고 있습니다. 방으로 오는 길에 봤거든요.”

잘됐다. 메뉴 듣고 별로인 거 같으면 근처 다른 음식점 가야지.

“어떤 게 있는데요?”

“일단 버섯 수프가 있었고 버터 발라서 구운 바게트도 있었어요. 그리고…….”

기억을 더듬는 듯 에녹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사실 그냥 1층에 내려가서 메뉴판을 보는 게 더 빠를 것 같았지만 그냥 두었다.

아직까지 옅게 남아 있는 미묘한 분위기를 되도록 빨리 털어버리고 싶었으니까.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리고 예상대로 어딘가 어색했던 분위기는 곧 사라졌다.

에녹의 다음 말에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던 사람이 갑작스레 생각났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그리고 소고기 스테이크가 있었습니다. 이런 여관에서는 흔치 않은 메뉴라 기억이 나네요.”

“……소고기 스테이크요?”

“예, 신기하죠? 아, 그러고 보니 아멜리오 백작가 영지에서 수도로 오는 길에도 소고기 스테이크를 팔던 여관이 있었던 것 같더라고요. 혹시 압니까?”

“네, 알아요.”

당연히 알지. 수도로 올라오는 길에 거기서 묵었으니까.

레오나드가 폭탄선언을 했던 바로 그 여관이잖아.

‘이 사람, 제 사람입니다.’

레오나드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저절로 재생되었다. 마치 지금 옆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상처를 치료해 주겠다며 볼에 입을 맞추었던 것도 생생히 기억이 났다. 그것들을 다 떠올리고 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진짜 미치겠다.’

이럴 때는 기억력이 좋다는 것이 미치도록 원망스러웠다.

아니, 그냥 ‘로레이나 아멜리오’라는 몸에 빙의한 것부터가 문제였다.

죽을 것이 예정되어 있는 몸이라 섣불리 움직이지도 못하고, 레오나드를 위해 한다는 것이 고작 이렇게 도망치는 것뿐이라니.

‘참 보잘것없고 초라하다, 나.’

그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떠난다는 말은 다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나쁜 사람이 되기 싫으니 그냥 핑계를 대는 것에 불과하다고 이전 세계에서 혀를 찼었지.

‘내가 이렇게 될 줄도 모르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내가 혹시라도 죽음을 피하지 못했을 경우 그로 인한 고통을 레오나드가 겪게 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 이게 맞는 거야.’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에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무는데 머리 위로 무언가가 툭 얹어졌다.

고개를 드니 에녹이 로브를 내 몸에 둘러주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혹시 모르니 조심해야죠. 로레이나는 너무 눈에 띄니까.”

머리카락과 얼굴이 거의 안 보일 정도로 로브의 후드를 내린 뒤 목 부분의 리본까지 제대로 묶어준 에녹이 곧 손을 떼었다.

“이제 되었어요. 아무도 로레이나인 줄 모를 거예요.”

“…….”

“당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구나. 내가 어떤 기분인지 알고 신경 써준 거야.

“음식 이야기하니까 배고프네요. 나 먼저 가고 있을 테니까 뒤따라와요.”

작게 손짓한 에녹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런 에녹의 등 뒤에 붙어서 천천히 걸었다.

에녹은 그대로 멈추거나 뒤돌아보지 않고 쭉 걸었다.

눈앞의 등은 넓고 듬직해서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내가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그로 인해 얼마나 로브가 젖었는지도.

* * *

딱딱딱. 손가락으로 의자 손잡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데프론 공작저 집무실을 울렸다.

기대감과 떨림으로 아이작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이제 곧 도착하겠군.”

황제의 동태를 살피라고 보낸 이가 엄청난 것을 알아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편지로는 전할 수 없는 말이니 직접 가서 하겠다고.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말이길래 그렇게 말한단 말인가. 뭔지는 몰라도 엄청난 이야기일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편지에 적혀 있던 말투로 보아 자신에게 유리한 쪽일 것이 확실했고.

“이거 정말 모든 게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가는 거 같은데…….”

억누를 수 없는 궁금증에 아이작이 손잡이를 다시 한번 내리쳤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기다리던 손님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들어오라고 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렸고 웬 남자 하나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예상대로 아이작이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안녕하십…….”

“인사는 되었고 본론부터 말해라.”

녹색 눈동자가 기이하게 번뜩였다. 그것을 본 남자가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아멜리오 백작이 황궁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잠깐 외출이라도 한 모양이지.”

“잠깐 외출한 것이 아닙니다!”

잠시 주위를 살피던 남자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목소리를 낮췄다.

“아예 황궁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백작가에서 데려온 시녀와 짐 몇 개도 같이 사라졌다고 하니 확실합니다.”

“비서관이라 뭔가 임무라도 맡은 것은 아니고?”

“지금 황제가 은밀하게 사람을 풀어서 찾는 중이라고 합니다. 상황을 보아하니 황제 몰래 황궁을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아이작이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 둘의 사이가 틀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런 것치고는 무도회나 귀족 회의에서 둘 사이가 심상치 않아 보였는데.

‘대놓고 사람을 풀어 찾지 않는다는 건 그 반쪽 계집이 죄를 짓고 도망치는 중인 건 아니라는 거겠지.’

그리고 자신의 비서관이 부재중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별 상관이 없다면 황궁 기사단을 동원해서라도 찾고도 남았을 것일 테니까.

“……내가 먼저 찾으면 어떻게 될까.”

그 이종족 황제가 찾지 못해 안달이 난 계집을 자신이 먼저 찾는다면?

견딜 수 없이 짜릿한 기분에 아이작이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생각만 해도 즐겁지 않은가.

그 잘난 척하는 얼굴이 일그러지는 순간을 직접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어떻게 할까요? 백작을 먼저 찾아낸 다음 보상이라도 요구할까요?”

“보상?”

“예, 저번에 회의에서 황실 기사단 충원을 요청하시지 않았습니까. 백작을 찾아서 데려가면 이번에는 무시하지 못할 것 같은데요.”

아이작이 가만히 있자 자신의 말을 긍정적으로 듣고 있다고 생각한 남자가 살짝 흥분하며 말을 이었다.

눈앞의 남자를 독대할 기회가 어디 흔하겠는가.

이런 기회가 왔을 때 어떻게든 눈도장을 제대로 찍어두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사람을 풀어서 찾으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혹시 다치기라도 한다면 황제 쪽에서 트집을 잡을 수도 있으니 최대한 상처 나지 않게 데려와서…….”

“아니.”

다소 큰 목소리로 이어지던 남자의 말을 단번에 끊은 아이작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럴 필요 없어.”

“……네? 하지만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이번에 황제 쪽에서 먼저 아멜리오 백작을 찾는다면…….”

“그 말이 아니야.”

“그러면 무슨…….”

“죽여.”

단 두 글자. 그 짧은 말이 가진 파급력에 남자가 놀라 숨을 삼켰다.

아이작은 그 모습에도 전혀 개의치 않으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혹시라도 상처가 날까 걱정하며 데려올 것 없이 그냥 발견하는 즉시 죽이라고.”

그럼 뒤늦게 온 이종족 황제는 자신이 아끼는 이의 싸늘한 시체만 보게 될 것이었다.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여태까지 눈에 거슬리는 이들을 처리해 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똑같이 뒤처리하면 되니까.

그리고…….

‘……평생의 반려라고 했던가.’

이종족이 사랑하는 이가 생겼을 때 치른다는 그 의식.

만약 그 계집이 황제와 의식을 끝마친 상황이라면.

‘계집이 죽는 즉시 황제도 죽겠지.’

평생의 반려는 목숨이 연결되어있으니까. 설사 아직 의식을 치르기 전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황제가 정신 못 차리게 만들 수는 있겠지.

그러니 아멜리오 백작이 죽는 건 아이작에게 있어 어떤 식으로든 이득이었다.

“아멜리오 백작을 찾아내. 그리고 그 즉시 죽여라.”

남자에게 명령한 아이작이 즐거운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로 집무실을 나섰다.

본래 자리로 돌아갈 날이 머지않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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