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62화 (62/144)

#62화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왔다.

에녹은 일정 때문에 내일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공작저로 돌아간 참이었다.

방에 들어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엘레노아의 일기장을 살피는 일이었다.

이렇게 옆에 아무도 없을 때 안 보면 볼 기회가 좀처럼 없으니까.

“역시 없네…….”

촤르륵. 나는 일기장을 빠르게 넘기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역시 그때 잘못 본 게 아니었구나.

일기장을 본 마지막 기억대로 뒤쪽에는 아무런 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 자리는 새하얀 백지였던 것처럼.

혹시라도 내가 못 본 부분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구석구석 살폈으나 나오는 것은 없었다.

확실하다. 이건 마법이 아니고서야 설명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일기장을 어디서 구했는지 찾아봐야 하나.”

아니지. 일기장의 주인인 엘로노아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 무슨 수로.

게다가 일기가 적힌 날짜를 보면 엘레노아가 일기장을 구한 시점은 최소 400년 전이었다.

그렇게 오래된 물건을 어디서 구했는지 알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기억하는 사람도 없을 테고.

“그럼 엘레노아 쪽을 알아보는 게 좋을 거 같은데…….”

하지만 그것 또한 문제인 것이, 유일하게 엘레노아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아멜리오 백작가에 있는 그녀의 서재인데, 이미 그곳은 내가 발이 닳도록 돌아다녀서 안 살핀 구석이 없었다.

내가 알기로 그 서재에는 별다른 점이 없었단 말이다.

이사벨에 관한 이야기가 요만큼이라도 나왔다면 내가 바로 알아챘겠지.

“아악, 머리 아파.”

나는 머리를 감싸 쥐며 그대로 침대 위에 엎어졌다.

도대체 뭐가 이렇게 복잡한 거야. 멀쩡하게 있던 글씨가 왜 갑자기 왜 사라진 거냐고.

‘그것도 딱 내가 읽지 못한 부분만.’

일기장을 처음 읽은 날로부터 시간이 꽤 지났는데 뭐 하나 확실하게 알아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왜 엘레노아가 나한테 일기장을 넘기라고 했는지도 모르겠고, 일기장에 나온 이사벨이 원작 속 그 ‘이사벨’인지도 확실하지 않고.

‘그리고 그 꼬맹이도 누군지 모르겠다는 말이야.’

엘레노아가 교육을 맡았다는 꼬맹이. 아무래도 이 꼬마에 대해서도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걸 또 어떻게 알아내냐고…….”

막막한 상황에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다못해 이름이라도 한 번 언급해 주었으면 몰라. 이 꼬맹이는 그런 것도 없었다.

어떻게 내가 읽은 부분까지 계속 꼬맹이라고만 부를 수가 있어?

“……원작만 알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나 숨겨진 것들이 많다니.”

하긴 여기도 사람 사는 세상인데 소설에서 모든 걸 설명해 줄 수는 없었겠지.

게다가 지금은 원작 진입 전이잖아.

“그래도 이렇게 하나도 아는 게 없으니 좀 지치는데…….”

나는 손을 뻗어 일기장 표지를 천천히 매만졌다.

살짝 자주색 빛이 도는 갈색 겉면은 어제 사기라도 한 것처럼 깨끗했다.

손상된 부분이 하나도 없는 말끔한 모습에 어쩐지 살짝 소름이 돋았다.

내가 전혀 접하지 못했던 미지의 무언가를 마주하게 된 것 같아서.

‘내가 이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까.’

그냥 포기하고 내 목숨 부지하는 것에나 집중할까. 잠시 그런 생각도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데프론 공작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취급을 받아놓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게다가 이건 레오나드를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

“어떻게든 알아내야지…….”

“뭘 알아내요?”

“앗, 깜짝이야!”

옆에서 불쑥 들린 목소리에 나는 재빨리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들자 메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메, 메리, 언제 왔어?”

“지금요. 왜 그렇게 식은땀을 흘리고 그러세요? 혹시 어디 아프세요? 다리 때문인…….”

“아니, 아니야! 그냥 좀 더워서 그래!”

어색하게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다행히도 메리는 그 앞에 한 말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난 또 원작이니 뭐니 하는 말까지 다 들은 줄 알고 당황했네.

뭐, 어차피 워낙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으니 더 일찍 들어왔어도 잘 못 들었을 것 같긴 하지만.

“주무시려고 누워계셨는데 저 때문에 깨신 건 아니죠?”

“아니야. 배불러서 잠깐 누워있었어. 맞다, 메리. 점심 먹었어? 쉬고 있다고 하길래 일부러 안 불렀는데.”

“네, 방금 먹고 오는 길이에요. 그런데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메리가 내 얼굴을 살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꼭 상태가 중한 환자라도 보는 표정이라 설핏 웃음이 나왔다.

“침대에 좀 누워 있었던 거 가지고 그렇게 걱정하는 거야? 나 진짜 괜찮다니까.”

“예전에도 그러셨던 적이 있으니까 그렇죠.”

“예전?”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자 메리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따뜻한 손이 이마 쪽으로 오더니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네. 정확히 말하면 아프셨던 건 아니지만요. 그래도 저는 백작님이 그때로 다시 돌아가실까 걱정이 된단 말이에요.”

“그때라니? 내가 예전에 어땠는데?”

“기억 안 나세요?”

메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무래도 내가 빙의하기 전의 로레이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내가 로레이나가 어땠는지 알 리가 없지.’

로레이나 아멜리오는 원작 진입 전 죽어버리는 엑스트라라서 아예 언급조차 안 되니까.

그래서 내가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거 아니겠어.

“어릴 적이라 그런가, 잘 생각이 안 나네.”

뒷덜미를 긁적이며 메리를 슬쩍 올려다보다가 멈칫했다. 머릿속에 불현듯 어떤 생각이 스친 탓이었다.

‘생각해 보니 메리는 엘레노아를 만난 적이 있잖아.’

내가 빙의되었을 당시에 메리는 시녀가 된 지 2년 차라고 했는데 엘레노아는 그때 죽었으니까.

그렇다면 메리는 적어도 2년은 엘레노아와 같은 공간에서 지낸 셈이었다.

‘길버트한테 편지라도 해 볼까 했는데 우선은 그럴 필요 없겠어.’

레오나드가 아멜리오 백작가로 사람을 보냈을지 모르는데 지금 길버트한테 편지를 보내는 건 너무 위험한 판단이었다.

나는 태연한 얼굴로 침대를 팡팡 치며 웃었다.

“그러니까 여기 앉아서 옛날이야기 좀 들려주라. 집 떠나온 지 오래되어서 그런지 자꾸 생각나네.”

“백작님…….”

내 말이 마음 한구석을 자극한 듯 메리가 눈물을 글썽였다.

이윽고 소매로 눈물을 훔친 메리가 목을 가다듬고는 내 옆에 앉았다.

“으음,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요?”

“아무거나 괜찮아. 아까 네가 말한 대로 예전에 내가 어땠는지 말해 줘도 좋고…….”

잠시 심호흡을 하며 메리의 눈치를 살폈다. 부디 내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메리가 모르기를.

“……부모님 이야기를 해 줘도 좋고.”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내 입에서 ‘부모님’이라는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던지 메리는 꽤 놀란 눈치였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 나는 의도적으로 백작 부부 이야기를 피했으니까.

‘그 둘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는데 어쩔 수 없잖아.’

괜히 말을 꺼내서 어린 시절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들키는 것보다는 그냥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충격으로 언급을 꺼린다는 콘셉트를 유지하는 편이 나았다.

물론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으니 어쩔 수 없지만.

“응, 괜찮아. 그러니까 어서 이야기해 줘. 다른 사람이 보는 나나 부모님은 어땠는지 궁금했거든.”

“알겠어요. 그런데 저 사실 백작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그렇게 드릴 말이 많지 않아요.”

응? 왜지? 메리는 내 전속 시녀 아니었던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으나 메리가 곧바로 ‘왜 그런지 백작님도 아시죠?’라고 묻는 통에 그러지 못했다.

“어, 그럼. 알지. 하하…….”

매우 어색한 웃음이었으나 다행히도 메리는 별다른 말 없이 넘어갔다.

“예전에는 백작님과 대화할 시간이 없었잖아요. 늘 방에만 계셨으니까요. 아가씨 방은 주인님과 마님을 제외하고는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고요.”

로레이나가 그랬다고? 생각지도 못한 말에 가만히 굳어 있자 이를 다르게 오해한 것인지 메리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렇다고 그게 안 좋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그때는 백작님이 지금이랑 성격이 좀 다르셨잖아요. 아직 어린 나이셨으니 부모님하고만 대화하고 싶으셨을 수도 있죠.”

“그, 그렇지.”

“그래서 사실 백작님이 저한테 말을 걸어 주기 시작하셨을 때는 엄청 기뻤어요. 뭔가 백작님과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때의 감정이 떠오르는 듯 메리가 말갛게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을 보며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성격이 특이하다고 해도 그렇지, 메리는 직속 시녀인데 아예 대화를 안 할 수가 있나?’

게다가 그 나이까지 대화한 사람이 부모님뿐이라니. 메리는 로레이나가 아직 어렸다고 했지만 그래 봤자 10대 초반이다.

내가 빙의한 것이 그때쯤이니까. 아무래도 뭔가 좀 이상한데.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나는 알았다는 의미로 싱긋 웃은 뒤 조금 더 메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에 대한 말은 어느 정도 했으니 이제는 엘레노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차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요…….”

“내 이야기는 이 정도면 되었고 어머니 이야기나 해 줘.”

“마님이요?”

“응, 누구랑 친하셨다던가 뭘 좋아하셨다던가 그런 거 있잖아.”

“으음, 뭘 좋아하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친한 분은 없었던 것으로 알아요.”

“없었다고?”

“네, 지금 백작님은 다른 분들과 교류하시는 편이지만 마님께서는 안 그러셨거든요. 제가 처음 백작가에 들어올 때도 외부인 함부로 들이지 말라고 교육을 받았는걸요. 마님이나 주인님께서 안 좋아하신다고요.”

“아, 그래?”

“네, 예전에 한 번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아이가 동생을 잠깐 백작저 안으로 들여서 난리가 난 적이 있었을 정도였어요.”

……그렇게까지 했단 말이야?

물론 일기장을 읽어봤으니 엘레노아가 타인과 교류하는 것을 즐기는 성격이 아닐 거라는 건 예상했다.

그래도 그렇지. 설마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이렇게까지 할 정도면 인간을 기피하는 수준 아니냐고.

“그래도 어린아이는 좋아하셨나 봐? 나랑 많이 놀아주셨던 거 같으니까.”

“네? 아니요. 그건 백작님이어서 그러신 거죠. 어린아이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아까 말씀드린 아이의 동생이 엄청 어렸었다고 들었거든요.”

“……그럴 리가.”

앞에 한 말은 그렇다고 쳐도 이건 도저히 그냥 못 넘어가겠다.

엘레노아가 어린아이도 싫어했다고?

생판 모르는 어린애 덥석 받아주고 그것도 모자라 이름까지 지어준 사람이?

‘아무래도 중간에 태도가 바뀌게 될 만한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일기장의 뒷부분, 그러니까 지금은 글자가 사라진 장들에 뭔가 중요한 내용이 있었던 것이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이 이렇게까지 되는 게 설명이 안 되잖아.

‘그리고 생각해 보니 엘레노아가 그 꼬맹이를 맡게 된 것도 좀 이상하네.’

아무리 그때 당시에는 엘레노아가 타인을 꺼리지 않았다고 해도 그렇지. 굳이 같은 인간도 아닌 이종족에게 애를 맡길 이유가 있나?

게다가 엘레노아는 그냥 이종족도 아니고 세상에 마지막 남은 순혈 엘프였다.

이 세계에서 이종족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그렇게 쉽게 접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멜리오 백작가로 매번 청혼서나 초대장이 날아오는 것에 비해 찾아온 이는 한 명도 없었던 것이 그 증거였다.

‘돈을 주고 엘레노아를 당당하게 고용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지?’

잠시 이어지던 고민이 정해진 목적지에 도달했다. 지금껏 들은 말들을 생각하면 매우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만약 그 꼬맹이 역시 이종족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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