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일기장에 나온 꼬맹이, 엘레노아가 맡은 그 아이가 그녀와 마찬가지로 이종족이라면 어느 정도 말이 되었다.
‘물론 그때는 이종족이 지금만큼 소수는 아니었으니 특정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이것만 해도 엄청난 수확이었다.
‘이사벨’이라는 어린아이도 그 ‘꼬맹이’가 데려왔다고 적혀 있었으니 어쩌면 그 정체까지 같이 알아낼 수 있을지 몰랐다.
“……메리, 오래전 기록을 찾아보려면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얼마나 오래전이요?”
“아주아주 옛날. 갑자기 어머니가 사시던 시대가 궁금해서.”
“으음, 그러면 아무래도 자료가 제일 많은 황궁 도서관이 제일 좋…….”
거기까지 말하던 메리가 입을 다물더니 내 눈치를 보며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에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살짝 웃어주었다.
하긴, 내가 지금 원하는 자료를 찾기에는 황궁 도서관만큼 제격인 곳은 없지.
무의식중에 나온 말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면 이 근처에 책방이 있다는데 거기는 어떨까요? 꽤 오래된 책들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네, 그리고 굳이 오래된 책이 아니더라도 시대별로 정리해놓은 역사책들도 많이 있고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나는 창밖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음, 지금 가는 건 좀 무리겠네. 메리랑 정신없이 이야기하다 보니 날이 벌써 어두워졌어.
“좋아, 그럼 오늘은 좀 늦었으니까 내일 가자.”
“네! 내일 일어나자마자 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으면 될까요?”
“응, 그렇게 하자.”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어차피 어디로 가면 좋을지 앞으로의 방향도 정해야 하니 이것저것 알아볼 것도 많았고.
물론 호위도 하나 없는 상황에서 메리와 단둘이 나가는 게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메리의 말에 따르면 얼마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인 것 같았으니 그냥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지금 상황에 위험하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어쩐지 긴장되는 마음을 안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눈 뜨자마자 메리와 나갈 준비를 했다.
물론 나가기 전에 에녹이 주었던 로브를 다시 걸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메리를 따라 여관을 나서자마자 들리는 북적거리는 소리에 몸이 한껏 움츠러들었다.
혹시라도 머리카락이 로브 밖으로 삐져나올까 봐 신경이 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머리 색 너무 눈에 띈다니까.’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도록 메리가 후드를 단단히 여며주고 나서야 나는 고개를 들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근처에 책방이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전에 와봤던 곳이야?”
“아니요, 밤에 여관 들어오다가 봤었거든요. 그래서 어떤 곳이냐고 주인한테 물어봤죠.”
“아하.”
“백작님 책 좋아하시잖아요. 백작가에 있을 때도 서재에서 한동안 책만 읽으셨고 황궁에서도 도서관에 오래 계셨고.”
“……하하, 그랬지.”
정확히 말하면 그 행동들은 책을 좋아해서 그랬던 건 아니지만.
뭐, 어쨌든 책을 좋아하는 편이긴 하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여기예요.”
조금 걷던 메리가 어느 짙은 색 나무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고개를 들자 문보다 살짝 옅은 색의 간판에 ‘책방’이라고 쓰여 있는 것이 보였다.
정말이네. 가까운 거리에 책방이 있었구나. 규모가 그리 큰 것 같지는 않지만, 확실히 책방이 맞았다.
“들어갈까요?”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메리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힘을 좀 더 주자 황궁 쪽문을 연상시키는 끼기긱 소리와 함께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긴장이 되는 마음에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안으로 들어섰다.
어쩌면 오늘 여기서 중요한 정보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자료 찾는 거 도와드릴까요?”
“응, 난 왼쪽부터 볼 테니까 너는 오른쪽부터 찾아줘. 보다가 내가 말한 거랑 관련 있어 보이는 책 있으면 알려줘야 해.”
“네, 알겠어요.”
메리를 반대 방향으로 보낸 후 나는 천천히 걸으며 책장을 훑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꼭대기부터 밑바닥까지 쭉 살폈으나 내가 원하는 책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는 없는 건가.’
그렇게 꼼꼼하게 살핀 지 30분쯤 지났을까, 나는 건너편에서 온 메리와 마주쳤다.
메리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없는 빈손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실제로 확인하고 나니 살짝 허탈했다. 역시 이런 작은 책방에서 그런 자료를 찾기를 바란 건 너무 허황된 생각이었나.
“아무래도 여기에는 없는 모양이네.”
“그러게요. 아무래도 작은 책방이다 보니 책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어떤 걸 찾으시는데요?”
메리의 말을 끊고 들린 낯선 목소리에 나와 메리는 움찔 몸을 떨었다.
고개를 돌리자 한 남자가 책장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보였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에 기억을 더듬다가 손뼉을 쳤다.
아, 어쩐지 익숙하다 했더니 책방 문 앞에 앉아 있던 남자구나.
‘여기 주인인가 보네.’
이 남자한테 물어볼까. 어쩌면 메리와 내가 못 찾은 것을 여기 주인은 찾아줄지도 몰랐다.
“옛날 자료가 담긴 책을 찾고 있어요. 한 300년 전쯤?”
“너무 범위가 포괄적인데요. 어떤 분야를 찾으시는데요?”
책방 주인이 천천히 책장을 훑으며 물었다. 아, 이상한 사람같이 보일까 봐 이것까지는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뭐, 어쩔 수 없나.’
그래. 그냥 대놓고 말하는 편이 자료 찾기는 더 쉬울지도.
“……마법에 대해서 좀 찾아보려고요.”
“마법이요?”
책방 주인이 고개를 돌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뚱맞은 말을 들었다는 얼굴이었다.
나도 안다. 지금 시대에 마법이 웬 말이냐고 생각하고 있는 거 다 안다고.
‘나라도 아무것도 모르면 그렇게 생각했을 테니까.’
게다가 굳이 말하면 현재 마법에 대한 취급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이사벨이 데르키안 황가를 망가뜨렸다는 것 때문에 마법은 흉악한 힘이라고 알려진 모양이니.
하지만 실제로 마법으로밖에 설명이 안 되는 일이 일어났는데 어떡해?
이상한 취급받는 한이 있어도 어떻게든 알아봐야지.
“네, 마법이요.”
“……마법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인 거 알고 계시죠?”
“그럼요. 설마 그런 걸 모를 리가요.”
“마법에 관한 책은 없어요. 찾는 사람이 거의 없기도 하고 워낙에 인식이 안 좋아서요.”
“아…….”
“그리고…… 혹시 호기심에 찾으시는 거면 그만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기 쉽거든요.”
“……그렇군요.”
나는 고맙다는 뜻으로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좋은 사람이다.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나를 배려해서 저렇게 말해 준 것을 보면.
그런 사람을 더 곤란하게 해서는 안 되지. 여기는 이제 그만 나가야겠다.
“메리, 여관으로 돌아가자.”
“네.”
메리가 나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 것을 보며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책방 주인 옆에 있던 다른 남자가 불쑥 입을 열었던 것은.
“그런데 마법이 아예 사라졌다고 보기도 어렵지 않나?”
“쉿! 내가 그 말은 어디서 하지 말라고 말했…….”
“뭐, 어떤가. 그쪽 사는 사람들은 다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니만.”
다시 고개를 돌리자 어쩔 줄 몰라 하던 책방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망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여기까지 다 보였다.
“혹시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까요?”
“저, 그게…….”
“다른 곳에 말하고 다니지 않을게요.”
“아…….”
“제가 찾고 있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아서 그래요. 좀 부탁드릴게요.”
눈썹을 늘어뜨리며 건넨 말에 책방 주인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남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수도 북부에서 엄청 큰 규모의 산사태가 일어났는데, 혹시 알고 계십니까?”
“네, 알고 있어요.”
귀족 회의 때 길스턴 자작이 언급했었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산사태가 일어난 원인에 대해 아직 파악하는 중이라고 했었지, 분명.
“산사태로 피해 본 마을을 복구할 사람을 구한다고 하길래 돈벌이를 할 겸 최근에 북부에 다녀왔거든요.”
“거기에서 무슨 일이 있던가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데 거기 사람들이 이상한 말을 하더라고요.”
“무슨 말을 했는데요?”
태연하게 말을 잇던 남자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 중요한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산사태가 일어난 게 아무래도 마법 때문인 거 같다고요.”
“……네? 마법이요?”
갑자기 마법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자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책방 주인이 검지를 재빨리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쉿. 너무 크게 말하면 다 들려요. 북부 사람들도 다들 쉬쉬하는 상황이라…….”
알겠다는 의미로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마저 말을 이었다.
“다들 그날 산사태가 왜 일어났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건 들었어요. 원인이 파악이 안 되고 있다고 하던데 아직도 그런가요?”
내 말에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꽤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날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난 것도 아니고 지진이 난 것도 아니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산사태가 일어날 만한 이유가 없다는데. 그쪽 사람들은 왜 일어난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수군거리던데요.”
나는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아까부터 머릿속을 맴돌던 한 가지 생각 때문이었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손이 덜덜 떨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북부 사람들은 그걸 마법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조사관들은 입단속을 시키려는 모양인데 그게 그렇게 쉽게 되겠습니까. 워낙 규모가 큰 산사태여서 자기 집이며 생계 수단이며 다 망가졌는데 다들 눈에 불을 켜고 난리를 치는 중이죠. 뭐라도 알아낼까 싶어서.”
“…….”
“그런데 파봤자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혹시 지금껏 숨어 살던 마녀가 이제야 튀어나와 산사태를 일으킨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한 거죠.”
“……그렇군요.”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는 했다.
살길이 막막해졌으니 뭐라도 분풀이를 할 곳이 필요한데 아무리 찾아봐도 원인은 밝혀지지 않으니 답답하겠지.
그런 상황에 ‘마녀’라는 존재는 제법 유혹적인 선택지였을 것이다.
애초에 마법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기도 했고.
‘그리고 아예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야.’
홍수가 난 것도 아니고 지진이 난 것도 아닌데 갑자기 그렇게 큰 산사태가 일어난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일기장 글씨가 사라진 것과 원인을 알 수 없는 산사태가 일어난 시기가 비슷한 건 우연인가?’
기묘한 감각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누군가 내 귓가에 속삭이기라도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거라고, 이게 바로 내가 찾던 것이라고.
“좋은 정보 감사해요. 메리, 이제 돌아가자.”
“아, 네.”
메리와 재빨리 책방을 나가 여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방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챙겼다.
짐을 챙기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꺼낸 것들도 별로 없었으니까.
메리를 데리고 방 밖으로 나오자 내 방의 문을 두드리려고 한 듯 에녹이 손을 든 채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갑자기 나올 줄 몰랐는지 녹색 눈을 동그랗게 뜬 채였다.
참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같이 가는 걸 거절할 수도 없게.
“지금 어디 가는…….”
“수도 북부로 갈 거예요, 에녹.”
나는 짐짓 결연한 말투로 대답했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야겠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지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