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64화 (64/144)

#64화

“북부에 간다고요?”

에녹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럴 만도 했다. 별다른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북부에 간다니.

하지만 북부에 가는 이유를 말하려면 설명해야 하는 것들이 많았다.

‘산사태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 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엘레노아의 일기장 속 글씨가 사라졌다는 것까지 말할 수는 없잖아.’

게다가 나는 이미 무도회 날 에녹에게 그가 찾는 조건에 맞는 책이나 자료가 없다고 거짓말을 해 놓은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굳이 이 이야기를 할 이유는 없었다.

“최대한 빨리 가야 해요.”

“갑자기 북부에는 왜 가려는 겁니까?”

에녹이 그대로 자신을 스쳐 지나가려는 내 팔을 잡고 물었다. 얼굴에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위험할 일일까 걱정이 되어서 그래요.”

“…….”

“정확히 말해 주는 건 바라지도 않으니 대강이라도 말해 줘요. 알아서 알아들을게요.”

이렇게까지 나오니 더는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에녹도 같이 가는 게 지금 상황에서 확실히 도움이 되기도 하고.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결국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산사태에 관해 알아보러 간다는 것까지만 이야기하면 되겠지.

“……가서 알아볼 것이 있어서요.”

“혹시 북부에서 일어났다는 그 산사태 때문인가요?”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할 예정이었던 말을 태연하게 먼저 뱉은 에녹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얼굴이 안도감에 점차 펴지는 것이 보였다.

“워낙 크게 일어난 산사태니까요. 수도 북부라고 하니까 제일 먼저 떠오르더라고요.”

“아하…….”

“귀족 회의 때도 산사태에 대한 것이 안건으로 올라왔다고 하던데, 아닙니까?”

“……맞아요.”

뭐야. 내가 굳이 설명할 것도 없었잖아. 하긴, 이 정도는 누구나 다 예상할 법한 일이긴 하지.

‘생각해 보니 아까 책방 주인도 다 알고 있었잖아.’

어쩐지 에녹을 지나치게 경계한 것 같은 느낌에 작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에녹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그대로 몸을 돌려 나와 다시 한번 눈을 맞췄다.

“최근에 일어난 산사태 때문이라면 확실히 말을 조심할 만해요. 그러니까 괜히 나한테 미안한 마음 갖거나 신경 쓸 것 없어요.”

“……그런 적 없어요.”

“알겠어요.”

조금도 알아듣지 못한 얼굴로 에녹이 싱긋 입꼬리를 올렸다.

저렇게 사람 마음 다 파악하고 말하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나저나 당신이 직접 가서 뭔가를 알아볼 정도라니. 확실히 큰일인가 보네요.”

“작은 일은 아니긴 하죠.”

혹시라도 레오나드에 대해 이야기할까 불안했는데, 에녹은 의도적으로 그에 대한 언급을 피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는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에녹이 자세한 것을 묻지 않는 것에 깊이 안도했다.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는가 싶던 에녹이 이내 결론을 내린 듯 나직이 입을 뗐다.

“나도 같이 가요.”

먼 길을 떠나는 것치고는 상당히 망설임 없는 태도였다.

이제부터는 거리도 멀어져서 오늘처럼 공작저에 들렀다 오는 것도 불가능해질 텐데.

“저야 같이 가준다면 고맙지만 괜찮겠어요? 짐도 안 챙겨왔잖아요.”

“필요한 건 그때그때 사면 되니까 괜찮습니다. 혹시 몰라서 돈도 두둑이 챙겨 다니고 있고.”

에녹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웃으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보따리를 내밀었다.

보따리를 묶은 끈을 풀자 안에 금화가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아니, 이걸 이렇게 나한테 보여줘도 되는 건가? 내가 홀라당 들고 튀면 어쩌려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던지 에녹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한참이나 이어지던 웃음소리는 여관 복도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내 눈이 세모꼴이 되고 나서야 멈췄다.

물론 그러고 나서도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웃음기가 묻어났지만.

“아, 미안해요. 순간 너무 웃겨서 그만…….”

“얼굴에 웃음기나 좀 지우고 말하지 그래요.”

“푸흡……. 아, 알겠어요. 진짜 미안…….”

“……됐어요. 얼른 여기서 나가기나 해요. 말 빌리려면 또 시간 걸릴 테니까.”

이제는 정말로 가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데 에녹이 빠르게 다가오더니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지. 자기 다리 길다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지금 말을 타고 간다고 했어요?”

“네, 북부까지 걸어갈 수는 없잖아요. 거리도 먼데.”

“그건 당연하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기가 막힌다는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에녹이 몇 번 도리도리 고개를 젓더니 시선을 내 아래쪽에 두었다.

정확히는 내 다리에 말이다.

“지금 그 다리로 말을 타고 가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심각하게 다치지는 않았어요. 물론 지금은 좀 절뚝거리지만,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요.”

“말 타면 나으려던 다리도 도로 덧나요. 게다가 로레이나는 혼자서 말도 못 타잖아요.”

에녹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정곡을 찔렀다. 내가 말을 못 타는 건 맞았다.

아멜리오 백작가 영지가 워낙 작아서 굳이 승마를 배울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내가 원작 시작 전에 죽는 엑스트라라는 것을 알았을 시점에서 이미 모든 위험 요소는 인생에서 다 차단했었다.

‘그중 낙마할 가능성이 큰 승마는 제일 처음 지워졌지.’

요즘 아가씨들은 승마는 기본으로 할 줄 안다며 제발 배우라던 길버트의 잔소리도 다 이겨내었는데.

설마 이렇게 필요한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혹시 같이 타고 가자는 건 아니겠지?’

밥 먹기 전에 에녹이 했던 말 때문에 아직은 좀 불편한데.

“그럼 메리랑 같이 타고 갈게요. 메리는 말을 탈 줄 아니까…….”

“로레이나,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지금 제일 문제라고 생각하는 건 당신이 말을 탄다는 사실 그 자체예요.”

“…….”

“누구랑 같이 타건 혼자 타건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뭐든 간에 다리가 안 좋아지는 건 마찬가지니까. 덜 안 좋아지느냐 더 안 좋아지느냐의 차이라고요.”

“그럼 덜 안 좋아지는 방향으로…….”

“로레이나.”

에녹이 낮은 한숨과 함께 진지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읊조렸다.

“4년 전부터 말했지만, 제발 몸 생각 좀 해요. 다른 방법은 생각 안 해 봤어요? 마차를 탄다던가.”

“마차를 타면 정말 좋겠죠. 하지만 여기서 마차를 구하는 것도 일이에요. 수도 북부까지는 꽤 거리가 먼데 거기까지 가줄 마부는 몇 없을 거라고요.”

우리가 있는 곳은 황궁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 즉, 수도의 한가운데인 번화가였다.

누가 봐도 꿀인 자리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수도에서 사람이 제일 드문 북부로 갈 이유가 없었다.

마부가 우리를 내려주고 수도 중심으로 돌아오는 비용까지 합쳐서 두 배로 쳐준다면 모를까.

“게다가 온 마을이 피해를 볼 정도의 큰 산사태가 일어난 곳이라니. 분명 또 갈 사람이 반으로 줄겠죠.”

누가 그런 곳을 가고 싶겠어. 나라도 위험해서 안 가겠다.

“그렇게 수소문하면서 시간 낭비할 바에 그깟 다리 좀 희생하고 말 타고 가는 게 나아요.”

나름 논리적으로 잘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에녹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말을 잘못했나 싶어 영상 되감기를 하듯 내가 뱉은 말을 곱씹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내가 잘못 말한 것은 없……. 아, 하나 걸리는 것이 있긴 했다.

“……그깟 다리라고 한 건 미안해요.”

조심스럽게 건넨 말에 에녹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것 때문에 그런 거였구나.

“알았으면 얌전히 마차 타고 가요.”

“하지만 그럼 비용이 꽤 많이 나올 텐데…….”

“로레이나.”

앞서서 가던 에녹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에녹은 꼭 내가 몸을 함부로 다루면 저런 얼굴을 했다.

자기 일이 아닌데도, 꼭 내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나 돈 많아요. 아까 그거 알려주려고 보따리 열어서 보여 준 겁니다.”

“그…….”

“내가 말타기 싫어서 빌리는 거예요. 그럼 됐죠?”

다급하게 말을 마친 에녹이 내가 뭐라 말릴 새도 없이 여관으로 들어갔다.

여관 주인에게 마차를 빌릴 곳을 연결해 달라고 말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에녹이 보기에는 내가 답답하겠지만 이쪽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나는 당신에게 이 이상 더 도움을 받기 싫단 말이야.’

안 그러면 나중에 분명하게 에녹을 거절할 때 나는 더 큰 마음의 빚을 지게 될 테니까.

도움받을 건 다 받아놓고 거절했다고 스스로 비난할지도 몰랐다.

에녹이 원해서 그런 것이라고 한들 결과적으로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은 나니까.

‘……이제 어쩔 수 없나.’

자책은 나중에 하는 것으로 하자. 지금은 너무 피곤하니까.

포기하고 가만히 서 있는데, 내가 메리를 데리고 도망이라도 갈까 걱정이 되었는지 에녹이 마차를 구해 빠르게 돌아왔다.

나는 더 말하지 않고 얌전히 마차에 올랐다.

메리는 어제 말을 탈 때 멀미가 제법 심했던지 마차를 타는 것을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자연스럽게 메리가 내 옆자리에 앉았고 에녹은 나와 메리가 자리를 잘 잡은 것을 확인한 후에야 반대편에 앉았다.

잠시 뒤 마차는 북부를 향해 출발했다.

밖으로 보이는 황실 문양에 나는 나도 모르게 로브를 여미며 머리카락을 가렸다.

다그닥. 다그닥.

한동안은 마차가 움직이는 소리만 들려왔다.

에녹이 그 짧은 사이에도 꽤 좋은 마차를 빌렸던지 흔들림이 별로 없었다.

‘좀 졸리네.’

꽤 잔 것 같은데 요새 일이 많아서 그런가. 고요한 적막 속에 있으니 점점 눈이 감겨왔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메리에게 살짝 손짓했다.

그것을 본 메리가 나를 향해 몸을 숙이자 나는 그대로 얼굴을 내려 메리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 조금만 잘게. 혹시 이상한 잠꼬대를 하거나 잠버릇 심하면 바로 깨워줘.”

“네, 알겠어요. 주무세요, 백작님.”

내가 정말 피곤해 보였던지 곧바로 대답한 메리가 자신의 어깨를 내어주었다. 나는 그 어깨에 편히 기대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부디 지금 가는 곳에 내가 원하는 답이 있기를 바라며.

* * *

잠시 뒤 나는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슬쩍 눈을 떴다.

처음에는 메리가 깨웠다고 생각해서 화들짝 놀라 일어났으나 그것이 아니라는 건 눈을 뜨자마자 알았다.

‘여긴 어디지?’

눈을 뜨면 메리나 에녹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내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주변은 온통 흰색이었다.

이상하다. 나는 분명 북부로 가는 마차 안에서 잠이 들었는데.

알 수 없는 상황에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어디선가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렸다.

“……이나.”

거리가 먼 탓인지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나는 조금 더 집중하려고 애를 쓰며 숨을 죽였다.

그리고 그제야 흐릿하던 소리가 제대로 들렸다.

“로레이나.”

비몽사몽 하던 아까와는 달리 정신을 차리고 나니 또렷하게 들렸다.

지금 들리는 이 음성이 누구의 것인지도 확실하게 알았다.

순식간에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이름에 나는 서둘러 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찰나조차도 매우 더디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예상대로 익히 아는 사람이 서 있었다.

“……레오나드.”

내가 언제나 바라고 바라던 그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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