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에녹은 그 상태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창문 밖으로 들리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차차 줄어들고, 방 안에 자리하고 있던 그림자가 길어지는 시간이 될 때까지.
결국, 방 안의 가라앉은 분위기를 견디다 못해 먼저 입을 뗀 것은 나였다.
“이만큼 도와줬으면 많이 도와준 거잖아요. 안 그래요?”
“…….”
“그러니까 제가 예전에 목숨을 구해 줬던 일은 그만 잊어버렸으면 좋겠어요. 솔직히 황궁에서 나가는 걸 도와준 것만으로도 에녹은 이미 그 이상을 해 준 거예요.”
사실이었다. 만약 황궁을 완전히 빠져나가기 전에 레오나드에게 걸렸더라면 에녹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레오나드가 이걸 기회 삼아서 데프론 공작가를 아예 박살을 내버렸을지도 모르지.
이런 절호의 기회를 레오나드가 날릴 리 없을 테니까.
“이제 더 도와줄 필요 없어요, 에녹.”
그러니 이제 그만 당신은 당신의 자리로 돌아가.
뒷말은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었을 테니.
나 때문에 에녹이 곤경에 처하는 건 싫었다.
아무리 내가 레오나드를 선택했다고 한들 그 역시 내 소중한 사람 중 하나였다.
난 그런 사람을 내 불행에 같이 끌어들일 용기가 차마 없었다.
“잘 가요.”
평소와 달리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지 않는 인사.
부디 에녹이 내 마음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며 관계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한참을 굳어 있던 에녹이 몸을 돌렸던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싫습니다.”
망설이면서 시작했던 것과 달리 말끝은 꽤 단호했다.
여태껏 에녹이 내게 했던 것 중 가장 단호하고 명백한 표현이었다.
에녹은 그동안 내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고백도 대놓고 하지 못했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당황스러웠으나 이내 마주한 광경에 그 생각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러기 싫습니다.”
나를 담은 녹색 눈동자 끝에 맺혀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와 턱을 적셨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절제하는 모양인지 눈물은 딱 그 한 번이 끝이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에녹이라는 점에서 이미 흘린 눈물의 양은 중요하지 않았다.
제 아버지의 어두운 면을 알게 된 날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사과하던 사람이 아닌가.
그런 사람이 지금 내 앞에서 울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내게 뭐라고 해도 당신 곁을 떠날 일은 없을 거예요.”
“……에녹.”
“안 그러면 당신은 내가 모르는 곳으로 가버릴 테니까.”
에녹이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아갈 듯 미약한 음성이었지만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들렸다.
나는 에녹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여기서까지 거짓말을 하는 건 그를 기만하는 것이었으니까.
이미 나는 300년 전 물건을 가지고 있냐는 에녹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지 않은가.
그것만으로도 에녹에게는 충분히 잔인한 일이었다.
설사 에녹이 속았다는 사실 자체도 모른다고 하더라도.
“……역시 그렇군요.”
지금 이 침묵이 긍정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에녹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터졌다.
“생각해 보니 당신은 늘 그렇게 행동했죠. 당신이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는 것처럼.”
그럴 수밖에. 본래 로레이나 아멜리오는 남자 주인공과 엮일 일도, 전 황태자와 만날 일도 없잖아.
지금 내가 누리는 것들은 전부 내 것이 아니었어야 할 것들이었다.
그 때문에 내가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죄책감은 늘 마음 한구석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너무 지쳤어.’
이전 생부터 지금까지 뭐 하나 편하게 살아온 적이 없었다.
그냥 아멜리오 백작가에서 메리와 길버트, 이렇게 둘만 옆에 있었던 그대로 있을걸.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데드 엔딩을 피하는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괜히 살겠다고 남자 주인공을 찾아 나서서 이 꼴이다.
꼭 정해진 역할을 벗어난 것에 대한 벌이라도 받는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가혹한 벌을.
지금 이게 벌이 맞는다면, 더는 그만할래.
“에녹, 나는…….”
“가지 말아요.”
에녹이 애원하듯 눈썹을 늘어뜨리며 내 말을 끊었다.
하지만 가까이 와서 나를 붙잡지는 않았다. 충분히 그럴 능력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꼭 한순간에 사라질 신기루라도 보는 것 같았다.
“내 마음을 알아달라 하지 않을게요.”
“…….”
“받아드릴 수 있을 때까지,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하지도 않을게요.”
“…….”
“그러니 제발…….”
겨우 다가와 내 손끝을 붙잡은 에녹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내 손등에 이마를 기댔다.
손가락에 눈물이 맺힌 눈꺼풀이 닿았다.
“적어도 내가 아는 곳에 있어 줘요.”
에녹이 뱉은 마지막 문장은 새벽의 안개처럼 내 마음속에 자욱하게 남았다.
사실 에녹의 손을 잡는 것은 가장 유혹적인 선택지였을 것이다.
어차피 아이작 데프론은 자신이 사랑하는 에녹을 이길 수 없다. 그러니 에녹과 내가 이루어진다면 나를 건드릴 수 없을 터였다.
‘애초에 아이작의 목적은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나를 에녹의 짝으로 만드는 거였잖아.’
그것이 레오나드에게 맞서기 위해서든, 에녹이 나를 좋아하기 때문이든 간에.
에녹을 선택한다면 레오나드에게 확실히 미움을 받을 수 있을 테니 원작대로 가기도 쉽겠지.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가뜩이나 작았던 마음 안에 이미 레오나드가 꽉 차버려서.
이제 더는 누군가가 들어올 공간이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지금 에녹이 바라는 건 최소한 내 생사만이라도 확인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임을 알았다.
그런데도 나는 이조차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작은 연결고리는 어떻게든 여지를 남긴 것이 되고 나는 에녹이 그것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다.
“미안해요, 에녹.”
나는 슬쩍 에녹에게 잡힌 손을 빼내었다. 그리고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나 같은 건 그냥 잊어버려요.”
진심이었다. 에녹은 원작 진입 전까지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하는 나를 쫓아다니기에 너무 아까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에녹의 생각은 나와 달랐던지 그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에녹이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올렸다.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 사이로 고개를 내민 달빛에 떨어지는 눈물이 반짝였다.
“당신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알아요.”
“안다고요?”
텅 빈 빈껍데기 같은 웃음소리가 방 안을 조용히 울렸다.
“아니, 당신은 몰라요. 모르니까 이렇게 잔인할 수 있는 겁니다.”
잠시 말을 멈춘 에녹이 숨을 길게 뱉었다. 저녁이 되어 꽤 쌀쌀해진 바람과 어울리는 메마른 한숨이었다.
“내 목숨을 구해 주었고 내가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었고…….”
“…….”
“쳇바퀴 돌 듯 굴러가던 내 인생에 잊지 못할 추억들을 만들어주었잖아.”
반쯤은 혼잣말인 그 말에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상처의 독을 손수 빨아 에녹을 살렸던 일. 에녹이 이야기한 동화가 잘못된 부분이 있음을 지적했던 일.
그리고 셋이서 아멜리오 백작가에서 뛰어놀았던 기억까지 전부.
생각해 보면 그 추억 속에서 에녹은 항상 웃고 있었다.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4년 전 그 순간들은 내게만 소중했던 것이 아니었다는 걸.
“나는 당신한테 뭐든 해 줄 준비가 되어있는데…….”
“…….”
“그런데 당신은…… 당신은 왜…….”
참다못한 에녹의 입에서 결국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 당신한테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어.”
단순히 나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절규에 가까웠다.
한때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오를 것이 예정되어 있었던 고귀한 사람이 내 앞에서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나일 수는 없었던 겁니까.”
“…….”
“지금도 당신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분이 아니라…….”
안 그래도 파르르 떨리던 음성이 늦가을의 낙엽처럼 잘게 부서졌다.
“나를 선택할 수는 없었던 거냐고요.”
“에녹, 그건…….”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에 고민할 것도 없이 입을 연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에녹이 내 팔을 당겨 나를 감싸 안았다.
“위험해요!”
와장창. 창문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내 앞으로 유리 파편이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나는 멍한 얼굴로 창문을 깼을 것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돌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레오나드가 보낸 사람들이 나를 찾아온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방법이 너무 과격한데.
아니야. 굳이 과할 건 없지.
레오나드의 허락도 없이 황궁을 벗어난 시점부터 나에 대한 취급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니까.
“괜찮아요? 다친 데 없어요?”
“……괜찮아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살피는 에녹의 목소리에 나는 머릿속을 떠도는 수많은 생각을 뒤로하며 창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윽고 조용하던 방에 낯선 이가 발을 디뎠다. 뭔가를 눈치챈 듯 에녹이 몸을 일으켰던 것도 그때였다.
언제 눈물을 흘리고 있었냐는 듯 녹색 눈동자가 꽤 결연했다.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지?”
내가 익히 알던 이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서릿발 같은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낯선 음성 안에는 명백한 경계심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처음 보는 상대를 대하는 것치고는 매우 익숙한 느낌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나는 그 이유를 눈치챘다.
‘데프론 공작가의 사람이구나.’
하긴, 아이작이 너무 아무것도 안 한다 싶었지.
그때 황궁에서 백작 부인 이야기를 물어봤던 때를 생각하면 나에게 얻어낼 것은 다 얻어낸 모양이니까.
에녹과 결혼할 것도 아닌 나를 굳이 살려둘 필요는 없을 터였다.
오히려 너무 늦게 온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 와중에 레오나드가 보낸 사람들은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하는 모습이 참 역겹고 우스웠다.
내가 먼저 떠나왔으면서 염치도 없지.
“당장 물러나.”
에녹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천천히 빼내 꺼내 들었다. 그사이 방을 점령한 침입자의 수는 점차 늘어갔다.
맨 처음 방에 들어온 남자는 에녹이 이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 여자에게서 비키세요, 에녹 님. 에녹 님까지 다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말에 에녹은 오히려 내 앞으로 와 완전히 내 시야를 가렸다.
그것이 나를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건 나도 저 남자들도 모를 리 없었다.
“……그러신다고 해서 저희가 건드리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
“에녹 님을 어느 정도 상처입히는 한이 있더라도 아멜리오 백작을 확실하게 처리하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숨기는 것 없이 투명한 말에 내 입에서 옅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니까.
“에녹, 굳이 입장 곤란하게 그럴 필요 없어요.”
“…….”
“나가서 치안대에 신고만 해 줘요. 그 뒤는 내가 어떻게든 해 볼…….”
“아니요.”
에녹이 단호하게 내 말을 끊었다.
뒤를 돌아 있음에도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당신을 지키는 건 내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