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70화 (70/144)

#70화

메리는 옆방에서 들리는 소리에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로레이나가 묵고 있을 방에서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린 후 한참이나 꽤 큰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말다툼하는가 싶더니 이제는 날카로운 것들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칼싸움을 하는 것 같은.

‘맞아. 황궁에서 다이아나 님 훈련하시는 거 구경할 때 이런 소리 많이 들었어.’

아무리 생각해도 뭔 일이 낫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빨리 옆 방으로 들어가서 확인해야 하는데…….

“도대체 언제 들어갈 수 있는 거예요? 이러다 진짜 큰일 나겠어요!”

“괜찮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옆에서 같이 상황을 살피고 있던 남자가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뭐가 때가 아니라는 건지 정말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으시고 말이야.’

옆 방에서 깨지는 소리가 난 직후 방에 갑작스레 들어온 남자는 처음부터 메리가 로레이나에게 가는 것을 말리러 온 것으로 보였다.

처음에는 자신을 해치려고 온 사람인가 싶어 잔뜩 경계했지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남자가 입은 옷에 익숙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으니까.

얼마 전까지 매일 본 탓에 잊어버리려야 잊어버릴 수가 없는.

‘황실 기사님이 그러실 리가 없지.’

그리고 예상대로 남자는 황실 기사가 맞았던 모양인지 메리에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옆 방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 건 답답하긴 했지만 무언가 이유가 있어 보였으니 일단은 가만히 있기로 했다.

자꾸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고.

‘다른 기사님들이 더 오시나?’

옆방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어보면 침입자가 한둘이 아닌 것 같았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말 그대로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지 그것이 지금 이렇게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상황을 이해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무리 에녹의 실력이 상당하다고 해도 그렇지 저렇게 있다가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려고 이러고 있는단 말인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던 메리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으나 곧바로 만류하는 손짓에 다시 앉는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있으세요. 위험합니다.”

“그러니까 빨리 가야죠! 더 위험해지시기 전에!”

“백작님은 괜찮으실 겁니다. 가면 위험한 건 당신이에요.”

“……지금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요? 누가 위험하다고요?”

알 수 없는 말을 뱉은 기사가 무언가를 살피듯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무언가를 발견한 듯 날카롭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아마 그분이 오시면 당신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으실 겁니다. 어쩌면 옆에 있다가 휘말려서 크게 다칠지도 모릅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제가 여기에 있는 것이고요.”

“……네?”

메리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자 기사가 안심하면서도 무언가 걱정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지금 화가 많이 나셨거든요.”

잠시 뒤 하늘 위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포효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 * *

“허억…… 헉.”

누구의 것인지 모를 거친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방 안에는 별다른 말 없이 칼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만 요란하게 들리고 있었다.

에녹의 실력은 듣던 대로 굉장했다. 상대가 여섯이나 되는데도 전혀 밀리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에녹의 몸이 버텨줄 때까지다.

안 그래도 상대가 다수라 불리한데 나까지 지켜주고 있는 탓에 더 고생하고 있잖아.

그 생각을 하는 동시에 에녹이 한 남자와 칼을 맞대던 중 다리가 살짝 뒤로 밀리는 것이 보였다.

‘……힘이 빠졌어.’

처음 침입자들에게 달려들어 월등하게 싸우던 것치고는 눈에 띄는 변화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 긴장감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어떡하지?’

혹시라도 치안대가 오지 않을까 기대하며 창밖을 여러 번 살폈으나 그런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소리가 크게 나지 않나?

아니면 이 일대가 데프론 공작가에 이미 매수된 상황일 수도 있겠다.

산지기 한 명에게 얼굴을 보였을 뿐인데 이 넓은 카일룸 제국에서 내 위치를 파악한 것을 보면.

하긴 아이작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에녹을 다치게 해서라도 날 없애겠다는 말도 진심인 것 같고.’

상대들도 에녹이 약간 힘이 빠진 상태라는 것을 눈치챘는지 자기들끼리 시선을 주고받는 모습이 보였다.

물론 지쳐 보이는 것은 저 남자들도 마찬가지였지만 혼자인 것과 여섯인 것에는 차이가 명백하게 있으니까.

고민을 마친 듯 남자 하나가 달려들었다.

에녹은 그에 맞춰 칼을 들어 방어했고 곧 금속끼리 쓸리는 끼기긱- 하는 기괴한 소리가 났다.

에녹도 더 시간을 끌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아까보다 움직임이 다소 격해졌다.

그 탓에 흩날리는 옷자락 사이로 몸 곳곳에 난 생채기가 보였다.

에녹은 몸이 그 지경이 되고 땀을 뻘뻘 흘리는 와중에도 내 앞에서 비켜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남자들을 처리하는 것보다 나를 지키는 것을 우위에 두고 있다는 건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에녹…….”

“아무 말 하지 말아요.”

에녹이 여전히 내게 뒷모습을 보인 채로 말을 끊었다. 그 순간에도 칼날을 이쪽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에녹이 아닌, 그 뒤에 있는 나를 향해서.

그 모습을 계속 보고 있자니 안 그러려고 해도 자꾸만 안 좋은 생각이 머릿속을 비집고 올라왔다.

‘……혹시 오늘인가.’

내가 죽게 되는 그날이.

설마 이렇게 빨리 찾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나는 로레이나가 원작 시작 전에 죽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게 소설 속에서 언급 한번 없는 엑스트라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다.

‘아무리 원작을 피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건가.’

에녹이 지쳐 쓰러지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정말로 죽는 건가?

‘……아니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나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에녹은?

설사 내가 여기서 잘 빠져나간다고 하더라도 에녹이 잘못되면 나는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나?

아무리 저 남자들이 에녹이 죽지 않게 조심한다고 해도 싸우는 중에는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 아닌가.

‘이렇게 숨어 있기만 해서는 안 돼.’

어차피 황궁에서 나오면서 죽을 각오는 했잖아. 레오나드의 옆이 아니면 어디든 위험할 수 있다는 거 알고 나온 거잖아.

“로레이나.”

내가 무언가 결심했다는 것을 느꼈는지 내 앞을 지키고 있는 몸이 불안한 듯 잘게 떨렸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요. 그래 봤자 소용없으니까.”

“…….”

“난 당신이 뭐라고 해도…….”

잠시 격해진 숨을 고르던 에녹이 검을 고쳐잡았다.

날카로운 검 끝이 에녹의 마음을 대변해 주기라도 하는 양 달빛에 반짝였다.

“반드시 당신을 지킬 겁니다.”

그리고 나는 그 흔들림 없는 모습에 결심을 굳혔다.

“……미안해요, 에녹.”

“무슨…….”

나는 재빨리 에녹의 뒤에서 나와 침입자들의 눈에 훤히 보이는 곳에 가서 섰다.

에녹이 미처 말릴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이 방에 있는 모든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나는 그것을 가만히 보다가 싱긋 웃었다.

그래도 누가 나를 죽이는지는 확실히 알고 갈 수 있겠네.

그동안 언제 어떻게 죽을까 불안해하던 것을 생각하니 조금 후련하기도 했다.

“괜한 사람 건드리지 말고 이쪽으로 와요.”

“…….”

“어차피 당신들이 원하는 건 나잖아.”

“로레이나!”

비명 섞인 외침이 방 안을 크게 울렸다. 에녹이 내가 있는 곳으로 다급히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 먼저 팔을 뻗은 것은 침입자가 먼저였다.

애초에 거리 자체가 차이가 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를 붙잡는 것에 성공한 남자는 이 기회만을 기다렸다는 양 눈을 빛내며 내 목에 칼을 가져다 대었다.

에녹은 여기서 더 가까이 가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던지 멈춰선 채 이쪽을 노려보았다.

“당장 그만둬.”

에녹이 나를 붙잡은 남자를 향해 검을 겨누며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검 끝이 내 목에 닿을까 잔뜩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미래의 네 주인이 누구인지 생각해라.”

“…….”

“여기서 무사히 나가더라도 나한테 너 하나 망가뜨릴 능력은 충분히 있다는 거 잊지 말고.”

남자가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는 눈치이자 에녹이 다시 한번 말에 쐐기를 박았다.

“선택해. 여기서 저 사람을 죽이고 나중에 먹고 살길 다 끊기고 배를 곯으며 살지.”

“…….”

“아니면 이대로 조용히 나가고 나중에 더 높은 자리와 두둑한 돈을 챙길지.”

검을 겨눈 채 남자를 보는 녹색 눈동자가 제법 날카롭게 빛났다.

하지만 미약하게 떨리는 검 끝 때문에 초조한 마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리고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에녹이 한 말 중 후자는 나를 처리한 다음 아이작으로부터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걸.

나를 죽이든 안 죽이든 똑같은 결과라면 굳이 나를 안 죽여 아이작의 화를 부르는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었다.

내 옆에 있는 남자도 곧 이를 눈치채겠지.

‘아이작이 그 정도 생각도 못 하는 머저리를 내게 붙이지는 않았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잠시 고민하던 남자는 내 목 가까이 댄 칼에 조금 더 힘을 실었다.

그 탓에 검 끝이 내 목에 살짝 닿았다.

“지금 제 주인은 데프론 공작님입니다.”

“…….”

“제가 선택한 일에 대한 대가는 미래에 받겠습니다.”

흔들림 없는 대답에 에녹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남자를 보던 시선이 그 옆으로 살짝 옮겨가 나를 살폈다.

그 눈빛에 나는 애써 입꼬리를 빼 당겼다.

아무리 각오했다고 한들 죽는 게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라 제대로 미소 지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급하게 뛰어 다시금 맛이 간 다리가 욱씬거린 탓에 인상이나 찌푸리지 않았으면 다행이었다.

“에녹.”

“……로레이나.”

“당신은 아까 내가 그만 돌아가라고 했을 때 이 방을 나간 거예요.”

그러니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거야. 마지막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뱉지 못하고 삼켰다.

그러자 에녹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이상한 얼굴이었다.

“당신은 정말…….”

거칠게 입술을 짓씹으며 뭐라 중얼거리던 에녹의 눈에 뭔가를 결심이라도 한 듯 결연한 빛이 돌았다.

“싫습니다.”

“…….”

“사랑하는 사람을 외면할 만큼 못난 놈은 아니라서요.”

고백이나 다름없는 말을 뱉은 에녹이 그대로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그에 대응이라도 하듯 남자가 내 목에 댄 칼에 힘을 주었다.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뺀 탓에 깊게 들어가지는 못한 칼이 목을 얕게 스쳤다.

칼이 지나간 궤적을 따라 피가 흘러내렸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에녹을 다른 동료에게 맡긴 남자가 다시금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이번 건 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강력하게 들었다.

‘그래,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삶이었지.’

좀 짧긴 했지만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잖아.

이전 세계에서 늘 혼자였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과분한 삶이었다.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만 더 보고 싶은데.’

염치없지만 진짜 딱 한 번만. 웃는 얼굴은 바라지도 않으니까 화난 모습이라도 볼 수 있었으면.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으려는데 어디선가 뭔가가 포효하는 소리가 들렸다.

건물이 흔들릴 정도의 울림에 방 안에 있는 모두가 움직임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뭐지?”

“근처에 산짐승이라도 나타났나 보지. 일단 빨리 처리해!”

남자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에녹이 옆에서 뭐라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이제 진짜 죽는구나.’

내 눈앞까지 다가온 검을 보며 질끈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곧 끔찍한 통증이 느껴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즉사해서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던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있는데 바로 옆에서 비명과 함께 누군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놀라 눈을 뜬 순간, 나는 보았다.

내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리워하던 얼굴을.

밤하늘과 잘 어울리는 검은색 머리카락이 살짝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렸다.

단검을 던져 남자를 처리한 레오나드가 느릿하게 방 안을 훑었다.

충분히 반격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그 누구도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조용히 숨만 삼켰다.

마침내 그 시선이 내 목에 난 상처에 닿았을 때, 레오나드가 나직이 입을 뗐다.

“……꺼져.”

당장이라도 다 없애버릴 듯한 차갑고 섬뜩한 음성으로.

“다 죽여버리기 전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