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아멜리오 백작이 산사태가 일어난 곳에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더 심각한 건…… 그 이야기가 방금 데프론 공작에게도 들어갔다는 보고가…….’
레오나드는 머릿속을 맴도는 제럴드의 말을 되새기며 이를 악물고 날았다.
아이작 데프론의 이름을 듣는데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아니, 실은 이미 조각나버린 지 오래였다. 레오나드에게 있어 로레이나는 세상 그 자체였으니까.
뭐 하나 분명한 것 없이 모호하고 불안정한 것들 속에서 유일하게 반짝이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빛.
‘……로레이나가 위험해.’
그 하나만으로 레오나드가 황궁을 박차고 나갈 이유는 충분했다.
애초에 레오나드가 로레이나를 보내주었던 이유는 그녀가 숨기고 있는 것을 알아내 위험해질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함이었으니까.
로레이나를 지키기 위해 선택했던 일이 그녀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절대 그렇게 되도록 둘 수는 없었다.
갑작스레 하늘에 등장한 거대한 생명체에 지상에서 이를 보던 사람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검은색 드래곤이 하늘을 가르며 달빛을 가로막는 광경이 눈을 비빌 만큼 비현실적이었다.
레오나드가 지나는 곳마다 은은하게 비추던 빛이 사라졌다.
날갯짓 한 번에 나무가 거세게 흔들리고 나뭇잎이 이리저리 휘날렸다.
물론 이는 레오나드가 알 바가 아니었다.
지금 그는 혹시라도 로레이나가 있는 위치를 잊어버릴까 되뇌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리고 마침내, 레오나드는 그토록 그리던 이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도 그에게 있어 가장 최악의 방법으로.
눈을 질끈 감고 있다가 레오나드를 발견한 로레이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변함없이 어여쁜 그 모습에 레오나드의 가슴 한구석이 뻐근했다.
얼굴을 훑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내려가다가 멈칫했다.
목이 길게 난 상흔을 보자마자 그대로 엎어버리고 싶은 것을 참느라 입술을 거칠게 씹었다.
‘……더 빨리 출발했었어야 했어.’
제럴드가 헐레벌떡 우산을 가지러 갔을 때부터.
아니, 애초에 로레이나가 황궁을 벗어났을 때부터 직접 가서 살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깟 황제 자리가 무엇이라고 어떻게든 지키겠다고 일을 하고, 아이작 데프론을 경계하며 살폈다.
로레이나에 대한 일을 수시로 보고받았으면서 그녀가 산사태가 난 지역으로 향했다는 말에 곧바로 날아가지 않았다.
그렇게 레오나드가 죄책감으로 자신을 갉아먹는 사이 로레이나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며 물었다.
며칠 사이 꽤 야윈 얼굴에 레오나드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칠게 흔들렸다.
“……레오나드?”
늘 그리워하던 따뜻하고 나긋한 목소리.
우습게도 그 높은 음성 한 번에 레오나드는 모든 불안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야 좀 제대로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레오나드는 자신이 아까 처리한 남자를 그대로 지나치며 고개를 돌렸다.
어딘가 섬뜩한 적안과 마주친 남자가 몸을 벌벌 떨었다.
별다른 행동 없이 자신을 가만히 보기만 하는데도 알 수 없는 살기가 느껴졌다.
아랫도리를 적실 것 같은 기분에 수치스러워진 남자가 검을 들고 레오나드에게로 달려들었다.
“으아악!”
괴성을 지르며 휘두른 검이 어딘가에 박혔다.
공격에 성공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고요한 주변에 남자는 제 검이 어느 벽에 걸려 빠지지 않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제 목숨도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귀를 찢을 듯한 비명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레, 레오나드!”
눈앞의 광경에 로레이나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온몸이 굳어버려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건 검을 든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던지라 차마 다음 행동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위를 올려다봤다.
레오나드의 얼굴은 상당히 평온했다.
검에 배를 꿰뚫린 사람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을 만큼.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생각보다 쉽게 끝난 공격에 남자가 얼떨떨한 얼굴을 하자 레오나드가 입꼬리를 올렸다.
배에 검이 박힌 채 피를 뚝뚝 흘리며 웃는 모습이 달빛과 어우러져 더 기괴스러웠다.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일어 남자가 레오나드의 배를 찌른 검을 빼내려는 찰나, 레오나드가 살짝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궁금하지?”
“……예?”
“알려줄까.”
레오나드가 검을 잡은 남자의 손 위로 손을 겹치며 힘을 주었다. 그 채로 반대쪽으로 잡아당기자 검이 쑥 빠져나갔다.
상처가 왈칵 뱉어낸 핏물이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점점 불어나는 양에 로레이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갈 무렵, 레오나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말로 하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보여 준 거야.”
알 수 없는 말에 남자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갸우뚱하자, 그것을 따라하기라도 하는 양 레오나드가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기회는 한 번뿐이니 잘 보도록.”
“…….”
“절대 나를 죽일 수 없다는 걸.”
남자가 미처 그 말을 이해하기도 전이었다. 레오나드의 배에 뭔가 성스러운 빛이 감돌았다.
그것이 배의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이라는 건 어둠 속에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바닥에 떨어지는 피가 서서히 줄더니 이제는 아예 멎었으니까.
살짝 찢어진 옷 사이로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피부가 보였다.
레오나드의 상처가 말끔히 나은 것을 확인한 남자의 눈이 커지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카일룸 제국민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데르키안 황가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이 어떤 존재였는지도.
‘……생명의 신의 후손.’
드래곤이란 그런 생명체였다. 신의 사랑을 받는 이종족 중에서도 유달리 특별한 존재.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건드렸는지를 깨달은 남자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애써 이를 부정하려는 듯 다시 한번 레오나드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레오나드는 그저 가만히 서서 그 공격을 고스란히 받았다. 날카로운 검이 팔을 스쳤다.
꽤 깊게 난 상처였고 이번에도 많은 양의 피가 흘렀다.
이번에는 옷자락이 바람에 날릴 정도로 뜯겼기에 상처가 드러나 보였다.
그것이 빠르게 아무는 과정도.
“아…… 아아…….”
비명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살기 가득한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그 두 눈을 마주하며 분명하게 깨달았다.
그 누구도 이 사람을 절대 이길 수 없을 거라는 걸.
두 눈 안에 선명하게 들어찬 공포에 레오나드가 다시금 웃었다.
그리고 그것이 남자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제 눈앞에 있는 남자의 몸이 숨이 끊어진 채 바닥으로 쓰러지는 것을 확인한 레오나드가 남자의 검을 쥐며 등을 돌렸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죽였는지 알 수도 없을 만큼 눈 깜짝할 새였다.
다음은 자신의 차례라는 것을 직감한 이들이 몸을 크게 떨었다.
몇 명은 그래도 맞서기 위해 검을 바로 쥐었으나 다른 이들은 달랐다.
생전 느껴보지 못한 공포에 위협을 느낀 남자 둘이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곳곳에 숨어 있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던 것도 그 순간이었다.
“잡아라!”
레오나드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이들이 도망친 침입자를 쫓아 창문 밖으로 뛰었다.
그사이 남은 이들을 처리하는 레오나드를 따라 자신의 옆에 있던 한 명을 무릎 꿇린 에녹이 나직이 입을 뗐다.
“……이자는 살려두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폐하.”
죽이지 말고 살려두어 사건의 증인으로 쓰라는 뜻이었다.
그것을 이해한 레오나드가 입을 달싹이며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에녹보다는 저 멀리서 몸을 떨고 있는 로레이나를 신경 쓰는 것이 먼저였다.
“끌고 가.”
“네!”
혹시 몰라 남아 있던 기사들이 남자를 끌고서 사라지는 것을 본 에녹의 시선이 잠시 로레이나에게 닿았다.
푸른 눈동자는 못이라도 박힌 듯, 한 사람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뼈저리게 알고 있었던 에녹이 쓴웃음을 삼켰다.
“……저도 추적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말릴 새도 없이 앞서 나간 기사들을 따라 창밖으로 몸을 던진 에녹이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그제야 방 안에 남은 것이 레오나드와 자신, 단 둘뿐이라는 것을 눈치챈 로레이나가 조용히 숨을 삼켰다.
‘어떡하지? 뭐라고 말을 해야…….’
레오나드를 빠르게 살피던 시선이 그의 배 쪽으로 향했다.
조금 전 그 커다란 검에 꿰뚫린 상처가 있던 곳이었다.
푸른색 눈이 마찬가지로 크게 다쳤던 팔 부분을 살피며 파르르 떨렸다.
얼마나 많이 다쳤었는지 알 수 있는, 바닥에 떨어진 피의 양에 로레이나가 주먹을 꽉 쥐었다.
“……괜찮아요?”
“뭐가.”
대답하는 음성이 살갗을 베기라도 할 것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로레이나는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먼저 배신하고 달아난 쪽은 자신이지 않은가.
레오나드가 구하러 왔다고 해서 그가 용서한 것이라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미 예상하던 상황이었기에 로레이나는 손에 힘을 더 주며 말을 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불안함에 뛰는 심장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다쳤잖아요. 피도 엄청 많이 나던데.”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다 나았으니까.”
별거 아니라는 듯 레오나드가 손에 묻은 피를 옷에 닦으며 대답했다.
그런데도 로레이나의 얼굴은 좀처럼 나아질 줄 몰랐다.
아니, 오히려 며칠 새 많이 상한 얼굴이 그전보다 더 일그러졌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애써 참기라도 하는 양.
“그래도 아팠잖아요.”
“…….”
“다 나았다고 해서 아팠던 게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말끝에 도저히 지워낼 수 없었던 물기가 묻어났다.
그와 동시에 푸른 눈 안에 넘칠 듯 말 듯 담겨 있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내렸다.
“왜 그랬어요?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잖아요.”
“…….”
“도대체 왜…….”
거기까지 말한 순간 가만히 지켜보던 레오나드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로레이나는 그 모습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번에는 또 어떤 날카로운 말과 눈빛이 돌아올지 무서웠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예상했다고 한들 진짜와 상상은 달랐으니까.
그렇게 몸을 한껏 움츠린 채 고개를 숙이는데 큼지막한 손이 로레이나의 볼을 감쌌다.
그에 놀란 로레이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때 레오나드가 고개를 기울이며 몸을 숙였다.
뭐라 할 새도 없이 훅 다가온 레오나드가 다급하게 로레이나의 입술을 삼켰다.
뺨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자리를 옮겨가 귓바퀴를 매만지는 것을 느끼며 로레이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너무나도 그리웠던,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입맞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