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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72화 (72/144)

#72화

뜨거운 숨결이 아랫입술을 느릿하게 훑었다.

처음에는 노크라도 하는 듯 입술에 짧은 키스가 이어졌으나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귀를 매만지던 손이 내 뒤통수를 감싸 쥐는가 싶던 순간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레오나드는 그때를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더 깊게 다가왔다.

다소 거칠게 부딪친 입술 안을 뜨거운 열기가 쉴새 없이 파고들었다.

“레, 레오…….”

점점 호흡이 가빠오는 느낌에 레오나드의 가슴을 치며 이름을 불렀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름을 부를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아까보다 거친 숨결이 입술 위로 쏟아졌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다리에 힘이 빠져 살짝 휘청이자 잊고 있던 통증이 허벅지를 타고 올라왔다.

“아…….”

입에서 자그마한 신음이 터졌다.

다리의 통증 때문인지 아니면 아까부터 느껴지는 몸속의 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소리에 반응이라도 한 듯 레오나드가 살짝 입술을 뗐다. 나는 급하게 숨을 고르며 그를 올려다봤다.

짙게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안에 든 선명한 감정이 나를 옭아매는 것 같았다.

뭐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모습에 멍하니 바라보는데 별안간 몸이 번쩍 위로 들렸다.

“앗…….”

허리를 잡아 그대로 나를 안아 올린 레오나드가 힘있게 나를 받쳤다.

혹시라도 떨어질까 싶어 긴장하자 레오나드가 귓가에 입술을 붙이며 속삭였다.

“힘 풀어.”

“…….”

“꽉 잡고 있을 테니까.”

……그게 마음대로 되겠냐고.

바닥을 흘깃 보며 숨을 삼키는데 레오나드가 다시금 입술을 짙게 눌러 왔다.

입맞춤이 길어지자 예상과 달리 몸의 힘은 쉽게 풀어졌다.

몸에 힘이 빠지자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것 같아서 눈앞에 있는 레오나드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레오나드가 겹쳐있는 입술 사이로 무언가를 애써 누르는듯한 거친 숨소리를 토해냈다.

레오나드의 고개가 조금 틀어지는가 싶던 순간 아까보다 더 진득하게 숨이 얽혔다.

오랫동안 참아왔던 것을 한꺼번에 터뜨리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저녁이라 조금 쌀쌀한 와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 안을 지피는 열기 탓에 점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갔다.

레오나드의 목을 감싼 팔에서 점차 힘이 빠졌다.

내가 계속 미끄러지자 레오나드가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자리를 옮겼다.

곧 등 뒤로 벽이 닿았고 나는 레오나드와 벽 사이에서 다급하게 움직이는 그를 힘겹게 받아냈다.

‘……숨 막혀.’

계속해서 맞물리는 입술 탓에 호흡이 버거웠다.

이제 정말로 한계다 싶어 레오나드의 옷깃을 꽉 쥐었을 때쯤 그가 입술을 떼었다.

“하아…….”

쿵쿵하고 거칠게 뛰는 심장에 눈앞이 핑 돌아서 레오나드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레오나드가 그런 내 귓불에 살짝 입을 맞추며 조용히 속삭였다.

“날 걱정해 주지 마.”

“…….”

“아까 같은 눈으로 쳐다보지도 말고.”

레오나드가 말을 뱉으며 계속해서 입을 맞췄다.

자잘한 입맞춤이 이어지는 자리마다 불이라도 덴 듯 홧홧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랬다면 그런 식으로 나를 떠나지는 말았어야지.”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음성이었으나 행동은 달랐다.

오랜 입맞춤 탓에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해 주는 손길이 제법 다정했다.

정말이지, 눈물이 왈칵 쏟아질 만큼.

우는 것을 들킬 것 같아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그의 목을 감싼 팔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금세 레오나드의 어깨가 젖어갔던 탓에 별 소용은 없는 일이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가자 레오나드가 헛웃음을 뱉었다.

“왜 울어.”

“……흑.”

“네가 버리고 가놓고 왜 우냐고.”

원망스러운 기색이 담긴 말에도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쏟아냈다.

한참을 가만히 있던 레오나드가 침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나를 침대에 조심스레 내려놓은 레오나드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덕분에 눈높이가 맞춰져서 레오나드의 눈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지만 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얼마나 꼴사나워 보일까.’

어쩌면 어이없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자기가 먼저 떠나놓고 만나니까 우는 꼴이라니.

하긴 나조차도 내가 우는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데 레오나드는 오죽할까.

미쳤다고 여기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로레이나.”

“…….”

“로레이나 아멜리오.”

나직하고 낮은 목소리가 연이어 내 이름을 불렀다.

길고 하얀 손가락이 내 눈가를 느릿하게 쓰는 것이 느껴졌다.

레오나드가 나머지 한쪽 손으로 내 볼을 감싸 얼굴을 들어 올렸다.

눈에 가득 차 있던 눈물이 걷히자 이제야 시야가 맑아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레오나드와 눈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평소보다 짙은 감정이 넘실거리는 붉은 눈을.

“내가 예전에 말했지. 이 시간이 지나면 그때는 정말 못 놓아준다고.”

아멜리오 백작가를 떠나올 때를 언급한 레오나드가 내 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나는 레오나드의 손에 의지해 얼굴을 기댔다.

원래도 안 좋았던 몸이 눈물까지 펑펑 쏟아내자, 힘이 다 빠져버린 것 같았다.

그런 나를 가만히 보던 레오나드가 살짝 몸을 일으켜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 말 진심이야. 절대 못 놔줘.”

“…….”

“아무 데도 안 보내.”

……글쎄. 과연 나중에도 당신은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슨 일이든 다 받아줄 테니까 숨기지 말고 나한테 말을 해.”

아, 역시 완벽하게 숨기는 건 무리였던 모양이다.

나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나를 보는 레오나드를 보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렇게 쳐다봐도 당신한테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야.

내가 사실대로 다 이야기하면 아마 당신은…….

‘자기 미래를 바꿀 뻔한……. 아니, 이미 바꿨을지 모를 날 경멸할 테니까.’

그래, 바로 그 꿈에서처럼.

아까부터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 때문에 미칠 지경이라, 더 견디기 어려워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스르르 눈을 감았다.

절박하게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와 함께.

“내 옆에 있어 줘, 제발.”

* * *

“으음…….”

어쩐지 찌뿌둥하고 무거운 몸을 느끼며 눈을 떴다. 많이 피곤했던 탓인지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여기 어디지…….’

가늘게 뜬 눈 사이로 이제는 꽤 익숙해진 천장이 보였다.

아, 아직 그 여관이구나.

작게 신음하며 몸을 살짝 일으켜 창문 쪽으로 고개를 빼자 잠들기 전과 다를 것이 없는 어두운 하늘이 보였다.

아직 해가 뜨지는 않은 것을 보니 그리 오래 잠들어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네.’

하긴 그러니까 아직 이렇게 피로가 덜 풀린 거겠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앉았다.

주변이 깔끔한 것을 보아하니 내가 잠든 사이에 방을 옮긴 모양이었다.

몇 시간 내에 그 흔적들을 다 치우고 부서진 창문을 수리했을 리는 없으니까.

누가 나를 옮겨 줬으려나. 메리는 당연히 아니겠고…….

‘……역시 레오나드인가.’

빠르게 스쳐 가는 지난 기억들에 나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유독 길고 다급했던 입맞춤까지 떠오른 탓이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무리 죽을 위기에 처했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는 안 되었다. 어떻게든 밀어냈어야 했다.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질질 짜기나 하고. 밀려오는 자책감에 나는 방 안과 창밖을 조용히 훑었다.

‘……지금이라도 도망칠 수 있을까.’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레오나드가 기껏 발견한 나를 두고 그냥 돌아갈 리 없다는 것.

‘제대로 대화도 못 하고 끝났는데 그냥 갈 리 없겠지.’

잠이 들기 전 기억을 더듬어보니 레오나드는 내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내가 깨어난 것을 알면 그게 무엇인지 물으러 오겠지.

‘그 전에 나가야 해.’

생각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할 수 없었다.

메리까지 챙길 시간은 부족하니 일단 나부터 빠져나간 다음에 나중에 따로 연락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문은 내가 미처 손을 대기도 전에 반대 방향으로 열렸다. 내가 무슨 행동을 할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문이 완전히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이가 느릿하게 나를 훑었다.

발끝부터 머리까지 지나간 시선이 내 눈에 닿았다.

그 상태로 레오나드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붉은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어디 가려고?”

누가 봐도 화가 난 것이 분명한 물음에 나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하필 지금 들어올 게 뭐람.

‘아니지. 내가 일어났으니 지금 들어온 건가.’

둘 중 뭐든 간에 내가 지금 큰일이 났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지. 뭐라고 둘러대면 좋을까.

“……사, 산책 가려고요.”

더 지체하면 뭐라고 하던 수상해 보일 것이 뻔해서 나는 결국 아무 말이나 뇌까렸다.

문제는 이게 정말 아무 말이었다는 것이었다.

레오나드도 기가 찼는지 작게 헛웃음을 짓는 것이 보였다.

“그 다리로?”

“아니, 사실은 화장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변명을 이어가던 나는 레오나드와 눈이 마주친 순간, 곧바로 입을 닫았다.

아까까지는 그래도 생기가 있던 눈이 짙게 가라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하…….”

낮은 한숨을 흘려보낸 레오나드가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문을 닫았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을 치다가 다리에 닿은 침대에 무릎이 꺾였다.

풀썩.

침대에 뒤로 넘어짐과 동시에 레오나드가 내 얼굴 옆으로 양손을 대고 몸 위로 올라왔다.

아무런 말 없이 나를 내려다보는 모습에 나는 좀처럼 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물론 레오나드가 내 턱을 잡아 다시금 돌려놓는 통에 별 소용은 없었지만.

“……말해.”

“……”

“지금 이 순간에도 네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는 게 뭔지 말하라고.”

내 얼굴 옆에 있는 손에 잡힌 침대 시트가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로 인해 레오나드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또한 느껴졌다.

하지만 그 말에 곧이곧대로 답할 수는 없었다. 나는 결국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을 택했다.

“무슨 말을 하라는 건지 모르겠……”

“로레이나!”

갑작스럽게 내 이름을 크게 부르는 소리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것을 본 레오나드의 눈이 불을 머금은 듯 활활 타오르다가 움찔하며 짙게 가라앉았다.

아까보다 다소 누그러진 태도였으나 나는 그 얼굴을 보는 것이 더 힘이 들었다.

붉은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릴 것 같았으니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

“뭘 말하든 상관없으니까 말을 좀 해, 제발…….”

애끓는 음성으로 말을 건넨 레오나드가 고개를 숙여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지금이 적기라는 것을 알았다.

레오나드와 멀어질 수 있는 최적의 순간.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자동으로 입이 열렸다.

“……당신이 싫어졌어요.”

나와 레오나드, 둘 모두에게 잔인한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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