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뭐?”
레오나드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래로 깔린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내 양옆에 놓인 팔이 충격에 살짝 휘청였다가 다시 곧게 펴졌다.
“……못 들었어. 다시 말해 봐.”
사실은 제대로 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레오나드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동요가 드러나 있었으니까.
아마 여기서 말을 번복한다면 레오나드는 모르는 척 넘어가 줄 것이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것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그가 준 마지막 기회를 그대로 쳐내었다.
입술 사이로 미처 막지 못한 힘없는 웃음소리가 나갔다.
여태껏 미루다가 이제야 레오나드를 완전히 끊어내려는 내 이기심이 우습기 짝이 없어서였으나, 레오나드는 좀 다르게 받아들인 듯했다.
못 본 사이 많이 상한 얼굴에 좀 더 그늘이 졌다.
“들었잖아요. 당신이 싫어졌다는 말.”
“…….”
“더는 레오나드 곁에 있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떠난 거라고요.”
다시 한번 쐐기를 박자 레오나드가 그에 반응하듯 옅은 한숨을 흘렸다.
방 안에 숨이 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
잠시 뒤 레오나드가 억눌린 숨을 토해내며 입을 열었다. 긴장한 듯 목소리 끝이 잘게 떨렸다.
그가 필사적인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아니에요. 정말이라고요.”
“로레이나.”
이어지는 말이 괴로운지 레오나드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만류했다.
적안이 점차 그 특유의 색을 잃어가고 있었다.
잘못 들었을 것이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고개를 마구 흔들기도 했다. 그렇게 행동하는 레오나드는 꼭 세상이라도 잃은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보며 나는 심장을 누군가가 뜯어가기라도 한 것 같은 통증에 가슴을 꾹 눌렀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만 했기에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다.
다행히도 쿵쾅거리는 심장과 다르게 말은 버벅거리지 않고 술술 나왔다.
어쩌면 지금 이 상황을 매번 상상해 왔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레오나드, 아무래도 뭔가 착각을 하는 것 같아요.”
“…….”
“애초에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잖아요.”
“……아무 사이도 아니었더라.”
레오나드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다소 큰 웃음소리가 방 안을 크게 울렸다.
그렇게 한참을 이어지던 소리가 갑작스레 뚝 끊겼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레오나드의 이성 또한 같이 날아간 것처럼 보였다.
가라앉아 있던 적안이 활활 타오르는 형상이 눈에 아른거렸다.
“어떻게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니었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레오나드가 무언가를 참는 사람처럼 잔뜩 갈라진 음성을 내며 으르렁거렸다.
나는 숨이 막힐 듯한 기운에도 동요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그리고는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나는 레오나드한테 기회를 준 것뿐이었는걸요. 그리고 당신은 그 기회를 잡지 못했잖아요.”
“하, 그게 말이…….”
“혹시라도 당신이 마음에 들까 봐 좀 지켜봤는데 생각보다 별로더라고요. 싫증이 나서 떠나고 싶어졌어요.”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왜 자꾸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네요. 내가 당신과 입맞춤을 해서? 아니면 당신을 도와서?”
“아니야……, 아니야…….”
레오나드가 미친 사람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며 조용히 읊조렸다.
그 모습을 보는 것이 힘이 들어서 고개를 돌렸다.
내 말로 인해 상처받는 레오나드의 얼굴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입술 사이로 준비했던 마지막 말이 뱉어졌다.
“잘 생각해 봐요, 레오나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혹은 좋아한다고 제대로 말한 적이 있었던가요?”
“…….”
“나는 당신을 좋아한 적이 없어요.”
말이 끝난 순간, 레오나드가 호흡을 멈췄다.
꽤 가까운 거리임에도 정말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꼭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혹시 잘못되기라도 한 걸까? 너무 갑작스럽게 말했던 걸까? 이대로 숨이 멎으면 어떡하지?
온갖 불안한 생각들이 파도처럼 머릿속을 휩쓸었다.
당장이라도 레오나드의 얼굴을 잡고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었다.
몸이 뚝- 하고 저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깊은 어둠에 집어 삼켜지는 것만 같았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갈 무렵, 레오나드의 몸을 지탱하고 있던 팔의 힘이 풀리더니 그가 내 위로 풀썩 내려앉았다.
불안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덜덜 떨리는 입을 열어 그를 불렀다.
“……레오나드?”
대답 대신 귓가에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레오나드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눈앞이 핑 돌았다.
아까 깊은 상처가 금방 나았던 것처럼 레오나드는 자신의 몸을 치유할 줄 알았다.
그런 그가 이렇게 약해질 가능성은 딱 하나뿐이었다.
레오나드가 치유력을 차단하고 제 몸을 스스로 망가뜨리고 있었을 경우.
“레오나드 좀 일어나봐요. 레오나드!”
팔에 살짝 힘을 주자 레오나드가 옆으로 힘없이 밀렸다. 나는 제대로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레오나드의 이마 위로 손을 올렸다.
그때, 레오나드가 갑작스레 손을 들더니 내 팔을 쳐냈다.
“……가.”
“네?”
“신경 쓰지 말고 가라고.”
레오나드는 눈을 제대로 뜨고 있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몸 상태를 보니 황궁에서 여기까지 온 게 기적일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방 안에 들어올 때 몸이 많이 젖어 있었지. 그것까지 떠올리자 오늘 비가 왔었던 것이 생각이 났다.
레오나드는 소나기를 뚫고 이 먼 곳까지 날아온 거다. 내가 위험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몸에 알 수 없는 소름이 돋았고 나는 아까 한 생각이 맞았음을 실감했다.
오늘은 정말로 레오나드와 멀어질 수 있는 최적의 기회였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야.’
내가 레오나드와 헤어지려는 이유는 그가 행복하길 바라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대로 레오나드가 잘못되도록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사람을 불러줄게요. 근처에 분명 의원이 있을…….”
“그냥 가라고, 제발.”
레오나드가 애원하듯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음성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힘이 하나도 없어.’
진짜 저러다 죽을지도 몰라.
불안감에 입술을 거칠게 물었다. 무수히 많은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왔지만, 그중에서도 레오나드가 죽는 미래는 없었다.
숨소리도 낼 생각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자 그것이 신경 쓰였는지 레오나드가 힘겹게 눈을 떴다.
“지금 안 나가면 날 좋아한다고 생각할 거야. 그러니까 눈앞에서 사라져.”
“…….”
“어차피 고작 이런 것으로는 안 죽어.”
그 말이 꼭 더한 짓을 해서라도 죽고 싶다는 말처럼 들린다면 착각일까.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결론을 내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의외로 짧았다.
‘어쩔 수 없어.’
생각을 마치자마자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다시금 욱신거렸음에도 멈추지 않고 문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산을 오를 때 챙겼던 가방을 열었다. 분명 여기 있을 텐데.
“……찾았다.”
찾은 물건을 들고 다시 뒤를 돌았다. 가는 줄 알았던 내가 돌아오자 레오나드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 시선을 피하며 빠르게 레오나드의 이마에 있는 머리칼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다리 때문에 받은 냉찜질용 수건이에요. 안에 얼음이 들었는데 다행히 아직 별로 안 녹았네요.”
“로레이나.”
“이거 대고 있으면 좀 열이 내릴 거예요. 비를 맞아서 그런지 몸살 기운도 있는 것 같…….”
“날 좋아해?”
레오나드가 가늘게 뜬 눈을 애써 나와 맞추려고 노력하며 물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냉큼 고개를 끄덕일 뻔했지만, 꾹 참았다.
“말했잖아요. 이제 싫어졌다고.”
겨우 뱉은 말에 레오나드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빤히 내 눈을 바라보았다.
잠시 정처 없이 흔들리던 시선이 곧 생각을 마친 듯 올곧게 나를 향했다.
“……그럼 이제 볼 일 없겠네. 그래도 계산은 확실하게 해야지.”
“……계산이요?”
“소원권 두 개 있잖아. 그거 중에 하나 쓸게. 나머지 하나는 그냥 없는 셈 쳐.”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레오나드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나와 눈을 마주했다.
“아까 했던 말, 다시 내 눈 보고 말해 줘.”
“…….”
“거절할 거면 똑바로 해. 그러면 나도 이제 착각 같은 거 안 할 테니까.”
“……알겠어요.”
레오나드의 말이 맞았다. 이렇게 하면 완전히 끊어낼 수 있겠지.
심호흡한 뒤 기억을 더듬어 아까 했던 말을 그대로 뱉었다. 레오나드의 눈을 제대로 보면서 하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레오나드, 애초에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요.”
거짓말. 내 마음이 그렇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당신한테 기회를 준 것뿐이었는걸요. 그리고 당신은…… 그 기회를 잡지 못했잖아요.”
아니, 레오나드는 그 기회를 제대로 잡았다. 내가 기회를 주기 훨씬 오래전부터.
“……당신이랑 있는 게 생각보다 별로더라고요. 싫증이 나서 떠나고 싶어졌어요.”
그랬으면 이렇게 고민을 하지도 않았겠지.
레오나드가 저주로 고통을 받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니 옆에서 꼭 붙어서 내 살길만 생각했을 것이다.
“잘…… 생각해봐요, 레오나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혹은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던가요?”
있었다. 매일 레오나드를 보면서 생각했다.
회의장에서 어쭙잖게 손바닥에 썼던 고백 말고 제대로 말하고 싶었다.
당신을 좋아한다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고 있다고.
“나는 당신을…… 좋아한 적이…….”
“…….”
“좋아한…… 적이…….”
아, 망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저 눈을 보면서 도저히 마지막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레오나드를 좋아한 적이 없다니. 말도 안 되는 말이잖아.
나는 끅끅 소리를 내며 울음을 터뜨렸다. 레오나드는 그런 나를 아무런 말 없이 바라보다가 웃었다.
아직도 잘 떠지지 않는 눈을 힘겹게 뜨면서, 안도했다는 듯이.
“……뭐야, 나 안 싫어하네.”
“그렇게 웃지 말아요.”
눈물이 왈칵 쏟아져 제대로 눈을 뜰 수도 없는 주제에 레오나드를 잔뜩 흘겨보았다.
원망의 대상이 레오나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결심한 건데……. 무슨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로레이나.”
레오나드가 제 몸을 천천히 치유하는 중인지 아까보다 한결 나은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생각보다 멍청해서 네가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몰라.”
“…….”
“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려줘.”
“흐윽. 싫어…….”
“어떤 내용이든 내가 다 감내할게. 너를 탓하지도 않을게.”
나직이 말을 잇던 레오나드가 짧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애초에 나한테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놀라울 만큼 애정이 담긴, 따뜻한 목소리였다.
내가 지금껏 고민했던 것이 다 쓸모없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에 마음속에 작은 희망이 피어났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레오나드가 내 이야기를 다 듣고도 나를 향해 웃어주지 않을까 하는.
다시 레오나드를 밀어내고 어디론가 떠나기에 나는 너무 지친 상태였다.
더는 도망갈 곳도 없었다.
나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천천히 내 비밀을 털어놓았다.
이 세계에 들어오면서 시작된, 그 누구에게도 한 적 없는 이야기였다.
“레오나드, 사실 난 다른 세계에서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