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다른 세계?”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던 듯 레오나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라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난데없이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말을 누가 그리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어.
문제는 레오나드가 놀랄 만한 일이 아직 산더미처럼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음,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
“제가 있던 곳은 여기와는 전혀 다른 곳이었어요. 생활하는 방식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언어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것을 빼면 다른 점이 더 많은 곳이었죠.”
레오나드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에 용기가 났기 때문일까. 생각보다 말은 술술 잘 나왔다.
어쩌면 나는 내 비밀을 털어놓는 것보다 레오나드가 싫어졌다는 말을 하는 것이 더 버거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다른 사람 몸에 들어와 있는 거예요. 부모님 장례식날이었는데, 그때는 정말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어요.”
그날을 회상하자 감정이 살짝 울컥했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다가와 나에게 괜찮냐며 물었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로 그 모든 시선과 새로운 세상에서도 홀로 남겨진 건 매한가지라는 사실을 감내해내어야만 했다.
매 순간이 지옥 같았다.
그러던 중 발견하게 된 ‘카일룸 제국’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당신은 모를 거야.
“그렇게 지내다가 알게 되었어요. 이 세상은, 제가 살던 곳에서 읽었던 이야기 속이라는 걸.”
내 말이 끝날 때까지는 입을 열지 않기로 한 듯 레오나드가 의아한 얼굴로 눈썹만 치켜세웠다.
그에 나는 살짝 웃었다.
“당신이 주인공인 이야기였어요, 레오나드. 저는 거기에 등장도 하지 않는 엑스트라였고요.”
나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며 덤덤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처음에는 제법 괜찮았다.
하지만 중간에 내가 살기 위해 레오나드를 찾았던 순간이라던가, 레오나드를 따라 황궁에 갈 결심을 한 일을 이야기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훔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된 거예요.”
모든 이야기를 마치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큰 산을 하나 넘은 것뿐이었고 진짜 시작은 이제부터였다.
나는 조용히 레오나드가 내릴 판결을 기다렸다.
내 말을 들은 레오나드는 혼란스러운 듯 보였다. 그것이 갈 곳을 잃은 시선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어. 아니, 네 말을 안 믿는 건 아닌데……. 그러니까 내 말은…….”
“믿기 어려운 거 알아요. 그게 당연한 거니까.”
덤덤한 말투로 레오나드를 다독였다. 다 털어놓고 나니 후련한 느낌이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지만 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던 죄책감은 확실히 조금 옅어진 상태였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렇게 애써 스스로 위로했다.
“그럼…… 정해진 이야기와 달리 네가 날 찾아왔으니 미래는 바뀌었다고 보면 되는 건가.”
“……아마도요.”
긴장되는 마음에 입술을 말아 물며 손에 힘을 주었다.
저 말을 꺼낸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서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아니지. 이미 알고 있잖아. 나는 이 이후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원작이 틀어져 셀리아가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겠지.’
그래도 상처받지 말자.
내가 잘못한 거잖아. 레오나드의 인생을 망친 거나 다름없으니 원망을 받아야 마땅하지.
덜덜 떨리는 손을 드레스 자락에 숨기며 고개를 숙였다.
레오나드의 대답을 기다리는 찰나가 억겁의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이윽고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던 레오나드가 이내 입을 열었다.
이어지는 말은 내가 예상한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러면 너도 죽을 위기에서 벗어난 거지? 본래 이야기와 달리 내 옆에 있었으니까.”
“……네?”
“내 말이 맞지 않아? 내가 남자 주인공이라 내 옆에 있으면 살 수 있으니 찾아온 거라고 했잖아.”
“그렇죠?”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레오나드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남자 주인공이라는 거, 꽤 쓸 만하네.”
너무 아무렇지 않은 얼굴에 나도 모르게 맞장구를 치며 같이 웃을 뻔했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레오나드, 내가 한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나는 살기 위해 당신을 찾아간 거라고요. 계획적으로 당신을 따라 황궁에 간 거고.”
“그래, 백작가에 숨어 있지 않고 용기를 내서 나한테 찾아와줬지. 거기서 잘 알지도 못하는 꼬마를 도왔고.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도.”
“……그리고 당신 운명을 바꿔버렸어요. 어쩌면 셀리아는 나타나지 않을지도 몰라요. 아니, 아예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죠.”
“잘되었네. 그냥 오지 말라고 해. 생판 모르는 사람이 주는 알 수 없는 호의 같은 거 별로 원하지 않으니까. 아, 4년 전 일은 예외야. 그건 내가 먼저 뛰쳐나갔기도 했고.”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에요, 레오나드.”
“나도 장난하는 거 아니야.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인데.”
레오나드가 어깨를 으쓱 위로 올리며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아무래도 내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는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아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나 때문에 저주를 영원히 못 풀게 될 수도 있다고요.”
“그럴 수도 있겠지.”
“당신의 구원자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데 아무렇지도 않아요?”
“너야말로 아무렇지도 않아?”
레오나드가 팔을 뻗어 드레스 사이에 감춰진 내 손을 잡았다.
아래로 깔린 붉은 눈동자가 덜덜 떨리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 말대로라면, 너와 나는 앞으로도 평생 만나면 안 된다는 건데.”
그래서 당신을 떠나려고 한 거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레오나드도 이미 알고 있을 테고 어차피 내 거짓말이 들통이 난 마당에 떠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물론 레오나드가 원한다면야 기꺼이 그렇게 하겠지만…….’
내 손을 감싼 온기가 아까보다 더 힘을 주어 나를 다독이는 것을 보아하니 그럴 일은 없을 듯싶었다.
물론 나는 그런 레오나드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를 경멸하며 뭐라 소리를 쳐도 모자랄 텐데, 지금 왜 이러는 걸까.
“……저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나도 네가 이해가 안 가. 아까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왜 내가 당연하게 그 여자를 반길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거야 당신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니까요. 셀리아는 그 상대역이고.”
그것도 당신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셀리아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저주를 풀어주겠다 나설 정도로 당신에게 호감이 있었어요. 그리고 흔한 로맨스 소설이 그러하듯…….”
“…….”
“……당신도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방 안에 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맞잡은 손이 아니었더라면 눈앞의 레오나드가 혹시 허상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레오나드는 할 말을 고르는 듯 입을 다문 채 엄지로 내 손바닥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어쩐지 간지러운 느낌에 눈꺼풀을 떨며 고개를 든 순간, 레오나드와 눈이 마주쳤다.
겹쳐져 있는 건 손뿐인데 어쩐지 그가 내 모든 것을 쥐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적안이 알 수 없는 감정들로 넘실거렸다.
“내가 널 옆에 두고 싶어서 무슨 생각까지 했는지 알면 그런 말은 못 할 텐데.”
“…….”
“마법사나 마녀 같은 거 필요 없어. 저주 따위 풀지 않아도 돼. 어차피 풀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지금 뭐라고? 황당함에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때였다. 레오나드가 잡은 손을 힘주어 당겼다.
얼떨결에 침대에 누워 있는 레오나드의 위로 엎어지자 그가 그런 나를 감싸 안으며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이어지는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난 너만 내 옆에 있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
“늘 생각했어. 저주를 풀지 않는다면 착한 너는 평생 내 옆에 있어 주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대로 지내도 상관없다고.”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알 수 없는 전율에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하지만 늘 저주를 풀길 바랐잖아요. 사람들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싶었잖아.”
흐느낌이 섞인 다소 뭉개진 발음이었다.
그런데도 레오나드는 잘 알아들었는지 내 등을 토닥이며 천천히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그랬지. 하지만 그것도 네가 내 옆에 있었을 때야.”
“…….”
“저주를 풀어봤자 네가 없으면 아무 소용없어.”
내 목덜미를 간질이던 숨이 뺨을 지나더니 이마 위에 경건하게 내려앉았다.
짧게 입을 맞춘 레오나드가 이마를 맞대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사랑해.”
그 세 글자에 담긴 진득하고 달콤한 감정에 숨이 멈췄다. 레오나드에게서 제대로 들은 첫 고백이었다.
몰랐던 것도 아닌데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열이 오르고 레오나드의 눈을 똑바로 보는 것이 어려웠다.
레오나드는 그런 나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보며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했어. 자기도 겁에 질려 덜덜 떨고 있으면서 나를 뒤에 세우고 앞으로 나서는 점이, 이야기할 때는 상대의 눈을 보고 하는 거라고 일러주는 다정함이.”
“…….”
“남 구해 주느라 입술이 망가진 와중에도 괜찮다며 애써 웃는 모습도, 손바닥에 이름을 쓰며 아이 같이 좋아하는 얼굴도, 그 밖의 모습들도 그냥 다 견딜 수 없이 좋아서, 그래서 항상 말하고 싶었어.”
“…….”
“내가 너를 이렇게나 사랑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다른 건 신경 쓰지 말라고.”
“흐윽…….”
애써 참고 있던 감정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지금 당신이 얼마나 엄청난 말을 했는지 당신은 알고 있을까.
레오나드가 사랑한다고 고백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아멜리오 백작가의 귀한 아가씨 로레이나 아멜리오가 아닌, 진짜 나.
가끔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나에게 호감을 보이는 이들은 전부 내 껍데기만 보고 좋아하는 것일 거라고.
에녹과 레오나드도 어쩌면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고.
레오나드는 마치 그런 내 속마음을 꿰뚫고 있는 사람 같았다.
마주친 눈이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내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건 바로 너라고. 그 완전한 감정을 받아들이며 나는 그만 인정하기로 했다.
벅찬 마음에 입이 저절로 열렸다.
이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껏 하고 싶었음에도 차마 하지 못한 말이었다.
“……나도 사랑해요.”
“…….”
“사랑해요, 레오나드.”
울음소리가 섞여 있던 앞의 말과는 달리 좀 더 명확하고 확실한 고백.
이 정도면 레오나드가 알아들었을까.
걱정스러운 마음 반 기대되는 마음 반으로 가슴이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며 뛰었다.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떨림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도 많이 좋아했어요. 언제인지 모를 순간부터 쭉.”
순간, 내 머리칼을 매만지던 레오나드의 손길이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아서 이상한 마음에 고개를 들었다.
레오나드는 어쩐지 멍한 얼굴로 굳어 있었다.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붉은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꽤 가까이 있는 그의 가슴팍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나와 같은, 아니, 나보다 훨씬 큰 박동으로 뛰고 있는 심장 소리였다.
혹시 이러다가 펑- 하고 터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잠시 그 상태를 유지하던 레오나드가 간신히 입을 움직여 목소리를 내었다.
이렇게까지 당황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늘 차분하던 몸이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한 번만 더 말해 줘.”
“사랑해요, 레오나드.”
“한 번만 더.”
“사랑해요.”
“더.”
“사랑해요, 아주 많이.”
계속되는 고백에도 레오나드는 좀처럼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다시금 그의 입이 열렸다.
“한 번 더…….”
그러나 레오나드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모조리 삼켜버렸으니까.
그의 사랑도, 숨결도 전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