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은근한 손길로 내 목을 매만지며 묻는 음성에는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손을 들어 가만히 그의 목울대를 쓸었다.
손끝이 살짝 스치는 정도로만 움직이자 레오나드의 눈꺼풀이 갈증이라도 난 사람처럼 파르르 떨렸다.
“로레이나.”
애타는 음성으로 내 이름을 읊조리던 레오나드가 제 턱 주변을 배회하던 내 손을 잡아챘다.
그리고는 손바닥에 깊게 입을 맞추었다.
“응?”
레오나드가 조르는 듯 눈을 살짝 내리깐 채 나를 보았다.
내 손바닥에 입술이 눌린 채 뭉개져 나오는 발음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애끓고 간절했다.
레오나드의 입술이 닿은 자리가 홧홧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에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둔 자리에는 노트 한 권이 있었다. 오늘 레오나드의 부탁으로 내가 가지고 온 엘레노아의 일기장이었다.
그것을 보자 누군가 뒤통수를 세게 때린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쳤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나는 여전히 은근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레오나드를 끌어당겼다.
레오나드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로 다가왔다. 가까워진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이다음은 나중에.”
“……뭐?”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잖아요. 일기장 본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챙겨왔는데.”
“그렇긴 한데…….”
레오나드가 황망한 얼굴로 자신의 품을 빠져나오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레오나드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나도 홀라당 넘어갈 뻔했다. 누가 저렇게 나른하게 말하래. 내가 저런 모습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고.
방긋 웃으며 일기장을 들고 오는 나를 보던 레오나드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웃지 마. 꼭 나만 매번 아쉬워하는 것 같으니까.”
“이렇게 웃는 거 별로예요?”
“아닌 거 다 알면서 하는 말이지?”
“헤헤 고마워요.”
발꿈치를 들어서 볼에 살짝 입을 맞추자 레오나드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에 한 번 더 입을 맞추려 가까이 다가가자 레오나드가 고개를 돌렸다.
쪽. 갑작스레 닿은 입술이 짧은소리만큼이나 빠르게 떨어졌다.
물론 보통의 가벼운 입맞춤보다는 붙어 있는 시간이 조금 길었다.
“이 정도는 봐줘. 지금도 엄청 참고 있는 거니까.”
나도 아쉬운 건 마찬가지인데. 하지만 굳이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뜨거운 레오나드의 몸에 더 불을 지피는 꼴이 될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한번 읽어 봐요. 어쩌면 레오나드가 읽으면 뭔가 다를 수도 있으니까.”
“그전에 한 번만 더해 줘.”
커다란 강아지가 꼬리라도 흔드는 것 같은 모습에 내가 작게 웃으며 레오나드에게 몸을 기울이던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제럴드입니다.”
저번과 비슷한 상황에 레오나드가 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중얼거렸다.
“하……. 또 제럴드.”
“그래도 하기 전에 들어와서 다행이네요. 그렇죠?”
눈을 찡긋하자 레오나드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썹을 늘어뜨렸다.
작게 한숨을 내쉬던 그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들어와.”
떨어진 허락에 제럴드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생각보다 빠른 귀환에 의아했으나 제럴드의 표정이 워낙 심상치 않아 보였기에 가만히 기다렸다.
‘벌써 새로운 소식이 있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자 제럴드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내가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다.
“데프론 공자가 알현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 * *
“……에녹 데프론이?”
잠시 고민하는가 싶던 레오나드는 제럴드에게 에녹을 알현실이 아닌 집무실로 부르라 말했다.
그에 제럴드가 급히 밖으로 나갔다.
좀 더 편하게 이야기하려나 싶어서 눈치를 보다가 자리에서 슬쩍 일어났다.
제럴드도 함께 있을 테니 오히려 내가 있는 것이 더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아직은 에녹을 만나는 게 좀 불편하기도 하고.’
그리고 따로 둘이 보는 것도 아니고 이런 자리에서 바로 마주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여전히 에녹과 나의 마지막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지라 좀 그랬다.
에녹 역시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테고.
하지만 집무실을 벗어나려던 행동은 곧바로 내 팔을 잡은 레오나드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냥 있어. 너는 내 비서관이잖아. 어차피 저번에 흐지부지하게 헤어져서 해야 할 말이 많기도 할 테고.”
“지금은 그런 이야기 나눌 자리가 아니잖아요. 저는 다음 기회에…….”
“싫어.”
레오나드가 내 팔을 힘주어 당겼다. 그러자 나는 레오나드의 옆에 도로 앉혀졌다.
“……네가 에녹 데프론과 둘이 만나는 거 싫다고.”
짓씹듯이 중얼거린 레오나드가 부드럽게 내 손에 제 손가락을 얽었다. 잔뜩 초조한 기색이었다.
“불안해. 그러니까 내 옆에 있어.”
살짝 떨리는 음성에 그제야 나는 내가 에녹의 도움을 받아 떠난 일이 레오나드에게 트라우마로 남았을 수 있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이유를 알았다고 한들 그 기억이 사라질 수는 없는 거니까.
‘내가 너무 배려가 없었어.’
물론 여전히 나는 에녹과는 따로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것까지 레오나드에게 이해하고 용인해달라고 하는 건 너무 이기적이었다.
이미 레오나드는 충분히 많이 참아주었으니까. 더는 그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알겠어요. 여기 있을게요.”
맞잡은 손을 끌어 레오나드를 다독였다. 그러자 잔뜩 굳어 있던 얼굴이 다소 누그러졌다.
“그리고 나는 아직 에녹 데프론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아. 그자는 우리와는 목표가 달라. 어찌 되었든 간에 그는 데프론 공작가의 사람이니까.”
“레오나드 그건…….”
에녹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믿어도 되는 사람이라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주친 눈이 흔들림 없이 너무 완강해서, 이어지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서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로레이나, 사람은 절박하거나 궁지에 몰리는 순간이 오면 누구나 잘못된 선택을 해. 내가 이제껏 봐온 인간의 대부분이 그랬어.”
“아.”
“한때 열열하게 사랑했던 남자를 죽이고 그의 아들에게 저주까지 걸었던 것처럼.”
“…….”
“다 너처럼 자신을 희생하고 남을 위해 떠나지는 않아.”
“하지만 레오나드, 그 또한 잘못된 선택이었잖아요.”
의아한 시선이 닿았다. 나는 여전히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웃었다.
“내가 당신을 떠난 게 잘했던 행동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그건…….”
레오나드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그가 무슨 마음인지 모르지 않았기에 열심히 그를 다독였다.
“사람은 잘못된 선택을 되돌릴 수도 있어요. 저처럼요. 그리고 그런 선택을 아예 안 할 수도 있죠.”
“…….”
“확실하지 않은 일 때문에 좋은 기회를 날리기는 너무 아깝잖아요.”
나는 레오나드가 인간을 불신하지 않기를 바랐다. 모든 사람이 다 나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이건 정말 생각하기 싫지만……. 만약 내가 잘못되었을 경우 레오나드의 곁에 남아 있는 이들은 모두 인간이 아닌가.
셀리아 역시 인간이고.
반기지는 않더라도 주는 호의를 굳이 마다하지는 않는 정도. 딱 그 정도만 되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한번 에녹을 믿어보는 게 어때요?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마법에 대해서 좀 알고 있는 것도 있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좋은 사람이에요.”
“……알아. 그래서 더 만나게 하기 싫은 거니까. 그자가 널 어떤 눈빛으로 보는지 알면 절대 만난다는 말은 못…….”
레오나드가 뭐라고 더 말을 잇기 전에 가볍게 레오나드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듯 적안이 크게 뜨였다.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어요. 제가 좋아하는 건 레오나드니까. 알죠?”
눈을 사르르 접으며 말하자 레오나드가 기가 막힌 지 헛웃음을 뱉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레오나드가 내게로 몸을 기울였다. 그림자가 나를 덮었다.
숨결이 닿을 만한 거리에서, 레오나드가 나직이 속삭였다.
“이다음은 나중에라고 했던 말 지켜.”
“……네?”
“꼭 받아낼 거니까.”
폭탄 발언을 남긴 레오나드가 나를 끌어당겨 귓불에 입을 맞추고는 멀어졌다.
아니, 싫은 건 아닌데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좀 불안하잖아…….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손부채질하고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는 말에 문이 열렸고, 곧 제럴드와 에녹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에녹은 레오나드 옆에 내가 있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 한 듯 놀란 기색이었다.
하지만 곧 그 표정은 얼굴에서 지워졌다.
“……제국의 큰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에녹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가 지금 어떤 마음일까 걱정이 되면서도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오늘 에녹이 황궁을 찾은 건 나를 만나기 위함이 아니었다. 레오나드에게 할 말이 있어서였지.
아니나 다를까, 무언가를 결심한 듯 결연한 빛이 도는 녹안이 레오나드를 향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폐하.”
“무엇이지?”
“이번 회의에서 황실 기사단 충원 문제가 안건으로 올라온 것으로 압니다.”
“그래, 그대의 아버지가 낸 안건이지.”
레오나드가 몸을 느릿하게 펴며 에녹의 얼굴을 훑었다. 에녹은 그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내었다.
“내 안전을 걱정해서라고 했던가.”
허공에서 시선이 맞물리자 굳게 다물려 있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당연하게도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그런 것치고는 내 비서관을 격하게 환영해 주던데.”
붉은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것이 내가 암살당할 뻔했던 날을 말하는 것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이 방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을 터였다. 평정심을 유지하는가 싶던 에녹의 표정에 금이 갔다.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살피는 시선에 걱정스러움이 묻어났다.
“아주 대단한 충성심이더군. 좀처럼 입을 열지를 않아.”
“…….”
“도대체 수하 교육을 어떻게 한 건지 궁금해질 지경이야.”
“……그렇군요.”
에녹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어 떠나지를 않았다.
내 목 부근, 그러니까 습격을 당했던 날, 암살자의 검에 베인 상처가 있던 자리였다.
물론 레오나드 덕에 지금은 그 자리에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전혀 아프지도 않았고. 하지만 에녹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녹색 눈이 마치 저가 다치기라도 한 것처럼 잔뜩 찌푸려졌다. 그리고는 허공을 더듬어 이미 지나간 흔적을 훑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레오나드가 그 시선을 차단하기로 하듯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 길지 않은 말에 불쾌감이 묻어났다.
“공자가 할 말은 황실 기사단과 관련이 있는 모양이지?”
“예, 그렇습니다.”
말을 꺼낸 것은 레오나드임에도 에녹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꼭 이 말을 하기 위한 목적이 나라도 되는 것처럼.
아까보다 진중한 얼굴로 에녹이 입을 열었다.
“황실 기사단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폐하.”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