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실패했다고?”
“……그, 그렇습니다.”
덜덜 떨리는 몸을 추스르며 답을 한 남자가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몸 곳곳에 가득한 상처를 훑던 녹안이 번뜩였다.
흡사 광기에 쌓인 맹수와 같은 모습이었다.
남자는 제 주인이 들고 있는 와인 잔을 올려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저 안에 담긴 붉은 액체가 꼭 제 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작 데프론. 한때 이 나라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이자 지금도 그에 못지않은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아니, 아니지.’
무심코 생각하던 남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얼마 전까지는 당연했던 것이 최근 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귀족 회의가 끝난 이후부터였다.
‘황제 폐하께서 아주 늠름하시더군요.’
‘300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셨다는 게 틀린 말이 아닌 모양이에요. 기운이 어찌나 강렬하시던지.’
‘보아하니 황궁 안의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더군요. 그전까지는 좀…… 삭막한 느낌이 있지 않았습니까.’
‘생명의 신께서 축복을 내려주신 덕분이겠죠.’
본래 이 땅의 주인 아닙니까.
작게 수군거리던 귀족들의 마지막 말에 아이작이 욕설을 읊조렸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를 직접 마주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아이작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입안에 달콤한 말을 굴리던 이들이 하나같이 등을 돌렸다.
물론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완전히 아이작의 곁을 떠난 것은 아니었으나 공작저를 찾아오는 발길은 현저히 줄었다.
모두 그날 회의에 참석했고 그 자리에서 보았기 때문이었다. 카일룸 제국의 진정한 주인의 모습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레오나드의 기운은 군대 하나는 아무렇지 않게 날려버릴 정도로 험악하고 무자비했다.
그의 성정이 그 기운과는 사뭇 달랐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더라면 진즉에 회의에 참석했던 인원의 반이 목이 잘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세력이 막강하기는 하나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아이작의 편에 붙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처럼 보였다.
실제로 남자 역시 어떻게 하면 눈앞의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이작이 웬 여자 하나를 데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인사해라. 앞으로 너희들이 모셔할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
얼떨결에 아이작을 따라 지하로 내려간 남자는 거기서 처음 보는 여자를 마주했다.
어둠 속에서 은발이 반짝였고 어쩐지 아이작의 것과 닮은 것 같은 녹색 눈동자가 기억 속에 선명했다.
거기까지 떠올린 남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그 눈을 보아서는 안 되었다. 그러지만 않았더라면…….
남자가 지난 일을 후회하는 사이 잔에 담긴 와인을 모조리 삼킨 아이작이 살짝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남자가 몸을 떨었다.
“그깟 반쪽짜리 엘프 하나 처리하는 데 실패한 것도 모자라 한 놈은 황제에게 생포까지 당했다라.”
“…….”
“내가 고작 이런 꼴이나 보자고 시간을 들여 교육한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 텐데…….”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남자가 바닥에 세게 머리를 박으며 소리쳤다.
부딪힌 이마가 얼얼했고 황제의 기사들과 에녹을 피하느라 만신창이가 된 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남자는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제 앞으로 다가온 아이작을 피할 수만 있다면 남자는 더한 짓도 할 수 있었다.
아이작이 원하기만 한다면 남자는 한 줌의 재가 되어 바스러질 터였다.
다 그 여자 때문이었다. 그 여자를 만난 이후로 알 수 없는 힘이 그를 틀어쥐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으려고 아이작의 그림자로 살았던 것이 아니었다.
남자는 천천히 다가오는 죽음의 기운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의 마지막 패였다.
“에, 에녹 님이 아멜리오 백작과 오두막에 다녀온 것 같습니다.”
“…….”
“……얼마 전에 다녀오셨던 그곳 말입니다.”
목숨을 걸고 꺼낸 말에도 아이작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방 안에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온몸을 짓누르는 고요가 그의 귀에 소곤거렸다. 너는 이제 끝이라고.
이제 가망이 없다고 생각할 무렵 굳게 닫혀 있던 입이 열렸다.
“에녹이 그곳에 다녀왔다는 말이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아이작이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그와 동시에 목을 죄던 무언가가 사라졌다.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찬 바닥에 뺨을 대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몰골이 꼴사나웠겠지만 지금 그런 건 하나도 상관없었다.
이제 살았다는 생각에 남자가 안도하고 있을 때 방 안에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로 미약하던 웃음은 곧 방 안을 가득 채울 정도가 되었다.
입꼬리를 당겨 웃은 아이작이 눈꼬리를 살짝 휘었다.
그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에 남자는 어리둥절했으나 아이작은 굳이 그것을 설명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에녹이 거기서 뭘 발견한 것 같던가?”
“그것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행방도 묘연하셔서……. 제가 당장이라도 가서 알아보겠습니다!”
“아, 그건 내가 알고 있다. 신경 쓰지 말도록.”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인 남자를 손짓 한 번으로 진정시킨 아이작이 이번에 다른 것을 물었다.
“황제는 어때. 직접 마주하니까 느낌이 다르더냐?”
이전의 것과 전혀 상관이 없는 질문이었다. 남자는 잠깐의 시간 동안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했다.
무성한 소문만 듣다가 실제로 마주한 황제는 괴물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눈앞의 남자는 화를 낼지도 몰랐다.
아이작은 누가 자기 위에 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던 노릇이라 남자는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졌을 시 그것을 수습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말을 들은 아이작은 다행히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진위를 가늠하듯 남자를 뚫어져라 보던 아이작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황궁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곳에 있을 제 아들이 몇 시간 전 뱉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꽤 오랜만에 보는 아들의 눈동자에는 이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감정이 맴돌았다.
‘가지고 싶은 것이 생겼습니다, 아버지.’
‘곁에 두어야겠어요.’
에녹이 했던 말은 그게 끝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것만으로도 아들의 심경을 알아챘고 내민 손을 잡아주었다.
이제 에녹은 자신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제 할 일을 할 것이었다.
그 역시 황제의 힘이 어떠한지 본 것이 분명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황제를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저도 알았겠지.
황제를 이기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을 거라는 것도.
물론 원하는 것이 그 반쪽짜리 계집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건 후에 생각해도 될 것이었다.
“……앞으로가 기대되는군.”
아이작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그대로 제 수하를 지나쳐갔다.
아무래도 곧 에녹에게 새로운 얼굴을 소개해 줘야 할 것 같았다.
* * *
“……지금 뭐라고?”
잘못 들었다고 생각한 것인지 레오나드가 되물었다. 안 그래도 불편한 기색이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대가 뭐라고 한 건지 알고는 있는 건가?”
“예, 알고 있습니다.”
짧게 숨을 뱉은 에녹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황실 기사단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말단직이어도 상관없습니다.”
“…….”
“황궁에 있을 기회만 주시면 됩니다.”
“공작이 그렇게 하라고 시키던가?”
다소 직설적인 물음이었다. 나는 안절부절못한 채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말려보려고 했으나 팽팽한 기류에 도무지 끼어들 틈이 없었다.
한때 같이 놀았던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리고 둘 다 내가 끼어드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고.’
잠시 고민하던 나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몸을 뒤로 뺐다.
그러자 레오나드가 아예 대화에서 나를 차단하려는 듯 맞은편에 앉은 에녹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 시선을 홀로 감내하던 에녹이 곧 입을 열었다.
“일단은 그렇습니다.”
“일단은?”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아버지는 제가 황궁으로 들어가 첩자 노릇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제가 여태껏 아버지와 다른 행보를 보여왔기에, 그로 인해 폐하께 조금은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서요.”
……뭐라고? 첩자?
너무 놀란 나머지 그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할 뻔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손을 입가에 대고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그에 반해 레오나드는 그리 놀라지 않는 기색이었다.
예상했던 것은 아니지만 아이작이라면 이런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린 채 말을 듣던 레오나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기다란 손가락이 무언가를 생각하듯 팔걸이 끝부분의 나무 장식을 두드렸다.
탁. 탁. 탁.
시계 초침과 같은 소리가 집무실 안의 긴장감을 더 증폭시켰다.
잠시 그렇게 있던 레오나드가 나직이 뇌까렸다.
“아무래도 공작이 잘못 짚은 것 같군. 난 공자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데 말이야.”
“하하하, 폐하…….”
싸늘한 말에 나도 모르게 억지웃음을 지으며 그를 불렀다.
아니, 내가 아까 한번 믿어보자고 했잖아요. 그때 이야기 다 끝난 거 아니었어?
도무지 믿지 못할 거 같으면 티라도 내지 말던가.
에녹이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우리를 도와주려는 것 같은데 이러다 마음을 바꿀지도 몰랐다.
‘에녹이 도와준다면 우리가 엄청 유리해져.’
아이작이 정확히 무슨 짓을 꾸미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에녹의 말이 거짓일 경우를 생각하더라도 우리 쪽에서는 정보를 흘리지 않으면 그만이었으니 손해 볼 일은 없었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에녹을 탐색하는 듯 그를 살피기만 할 뿐 그 이후로 말이 없었다.
또다시 시작될 것 같은 침묵에 결국 입을 연 것은 나였다.
“지금 에녹 말은 이중 첩자가 되어주겠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공작님이 에녹의 말을 믿어주실까요? 애초에 에녹이 황궁으로 가서 첩자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부터가 이상한데요. 얼마 전에…… 그런 일도 있었잖아요.”
그날 일을 여기서 다시 언급하기 좀 그래서 대충 뭉뚱그려서 답했다.
내가 죽을 뻔했던 날의 일은 레오나드에게도, 에녹에게도 지뢰였다.
‘봐봐. 지금도 다시 분위기 싸해지잖아.’
그때를 떠올린 듯 싸늘하게 굳은 레오나드와 에녹의 얼굴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아니, 잠깐. 죽을 뻔했던 사람은 나인데 왜 내가 이 둘 눈치를 보고 있어야 하는 거지?
하지만 이것을 입 밖으로 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눈물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거짓말이라는 것을 바로 눈치채시지 않을까요? 조금 걱정이 되어서…….”
“이미 아버지와 이야기가 끝난 부분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첩자가 되려는 이유도 납득하셨고요.”
“그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공작에게 뭐라고 했는지 알아야 나도 거기에 맞추던가 하지.
나도 알고 있으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기에 아무런 생각 없이 물었다.
잠깐의 망설임 뒤에 들려온 답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것이었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들은 말이 직격탄이 되어 던져졌다.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을 레오나드가 입꼬리를 빼 당겼다.
“공작이 믿어줬을 만하군.”
“…….”
“거짓말이 아니라 사실이니까.”
평소보다 낮고 날카로운 음성에 나는 머리를 짚었다.
……아,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