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85화 (85/144)

#85화

내 생일은 초봄이었다. 아마도 내가 막 수도에 올라올 때쯤이었던가.

아멜리오 백작가에 레오나드가 찾아온 다음부터 너무 일이 많아서 생일은 아예 생각도 못 했다.

‘솔직히 워낙 정신없었으니까 잊어버릴 만하잖아.’

그리고 설사 기억했다고 한들 나는 애초부터 생일을 챙길 생각이 없었다.

원래 그런 것을 챙기는 성격도 아니거니와 로레이나의 생일로 내가 축하를 받는 것이 좀 웃긴다고 생각했으니까.

메리와 길버트는 이미 이런 내 성격에 익숙해진 상태였기에 딱히 신경 쓰지 않았는데…….

‘엄청 신경 쓰는 얼굴이네.’

레오나드는 내 생일을 그냥 넘겼음에도 내가 아무렇지 않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하긴, 4년 전에도 생일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으니까.

어쩐지 묘한 기분에 가만히 있는데, 레오나드가 다급히 물었다.

“그럼 본래 생일은? 원래 세계에서의 생일 말이야.”

“원래 세계에서의 생일도 지금이랑 비슷해요. 하루 차이였던가.”

“…….”

“신기하죠? 이 몸에 들어온 이유라도 있는 건지.”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전혀 소용없는 일인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안절부절못하던 얼굴이 심각한 일이라도 생긴 양 잔뜩 굳어있었다.

“저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

“지금 다른 일도 많잖아요. 북부에 가는 거에 집중해야죠.”

“…….”

“레오나드?”

연이어 불렀으나 레오나드는 귀를 닫은 사람처럼 가만히 있었다.

마차가 준비되었다며 제럴드가 들어왔을 때도.

그리고 제럴드의 안내를 받아 마차에 탄 뒤, 내가 그에게 데프론 공작저에 답장을 보내달라는 부탁을 하는 순간까지도.

‘데프론 공작이 무슨 움직임을 보이면 바로 알려달라는 말을 할 때도 아무런 말 안 했지.’

레오나드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이었다. 뭔가를 깊게 생각하는 건지, 좀처럼 입을 열지도 않았다.

그런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하룻밤이 지나고 연구원들에게 편지가 온 다음이었다.

내가 말한 일대가 멀쩡하다는 내용의 편지를 쭉 훑던 레오나드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제대로 입을 열었다.

“뭔가 하고 싶은 거나 갖고 싶은 거 있어?”

“그거 물어보려고 이제까지 고민한 거예요?”

“놀러 가는 게 아니니 행동의 제약이 있잖아. 다행히 그 일대가 망가진 것은 아니라고 하니 마음이 좀 놓여서 말하는 거야.”

그냥 하는 말이 아닌지 레오나드는 전보다 한결 나아진 얼굴이었다.

그와 같은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역시 안심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어찌 되었든 나랑 에녹 눈에만 보였던 그 오두막이 훼손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거니까.

‘그래도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지.’

이번 산사태도 꽤 크게 났다고 들었는데 거기만 멀쩡하다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저 정말 괜찮다니까요. 그리고 굳이 지금 할 필요도 없잖아요. 나중에 여유 있을 때 해도 되는데.”

“지금도 생일이 지난 상황인데 더 있다가 하라고? 되도록 빨리 챙겨야지. 나중에 제대로 다시 하는 건 당연하고.”

꽤 심각한 표정인 레오나드를 보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래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어 보이는데.

‘하지만 기사들 다 끌고 일하러 가는 와중에 생일 파티를 하는 것도 웃기잖아.’

게다가 기사 중에는 다이아나도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레오나드의 저주에 대해 잘 아는 자가 필요했기에 동행한 것이었다.

요즘 황궁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녀가 뿌듯하다는 얼굴로 나와 레오나드를 보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런 와중에 레오나드와 내가 연인 사이가 되었다는 것을 두 눈으로 보면 질문 세례가 쏟아질 것이 뻔했다.

‘그렇게는 안 되지. 가뜩이나 요즘 체력이 떨어져서 힘들다고.’

뭐가 있을까. 남의 눈에 안 띄고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잠시 고민하던 나는 불쑥 떠오른 생각에 입꼬리를 올렸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 부담스럽지도 않고.

“레오나드.”

“뭐 갖고 싶은지 정했어?”

“갖고 싶은 건 없고요. 하고 싶은 건 있는데.”

“뭔데?”

몹시 궁금했던 듯 레오나드가 곧바로 맞은편에 앉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나는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한 북부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입을 열었다.

“데이트요.”

남들처럼 시간 정해 놓고 밖에서 만나서 밥 먹은 뒤 손을 잡고 거리를 거니는, 그런 데이트를 하고 싶어.

* * *

레오나드와 로레이나가 북부에 발을 디뎠을 무렵. 데프론 공작저에서는 생일 연회가 시작되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다소 급하게 전달이 된 초대장이었으나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은 많았다.

아니,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이건 참석하지 않는 사람이 손해 보는 게임이었다.

그 ‘아이작 데프론’이 황위에서 물러나 데프론 공작이 된 뒤 처음으로 여는 파티였다.

빠질 이유가 없었다.

공작저는 오래 방치되어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고 정교했다.

수도에 있는 저택 중 가장 크고 화려한 샹들리에는 여전히 높이 치솟은 공작가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여전히 공작가의 위세가 대단하다며 떠들어댔다. 언젠가 다시 아이작의 세상이 올지도 모르겠다며 감탄했다.

하지만 사실, 이는 뭣 모르는 자들이 내뱉는 말일 뿐이었다.

실상을 아는 이들의 태도는 달랐다. 정확히는 귀족 회의에 참석했던 귀족들 말이다.

늘 아이작에 대한 찬사만 쏟아지던 파티장에서는 이제 다른 의미로 잡음이 났다.

“그거 들으셨나요? 또 수도 북부에서 산사태가 났다죠.”

“들었습니다. 아주 난리도 아니라고 하더군요.”

“맞아요. 폐하께서도 걱정이 되셨는지 직접 북부로 향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머, 그래요? 자상하셔라. 다른 사람을 보냈어도 되었을 텐데요.”

이어지는 사람들의 말에 힐끗 어딘가를 보던 여자가 다소 크게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폐하께서 그렇게 고생하시는데 이렇게 연회를 즐기고 있어도 될지 모르겠어요.”

그 시선이 향한 곳에는 이 파티의 주인공인 아이작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자의 행동에 마찬가지로 아이작을 보던 이들이 잠시 눈치를 보더니 다시금 수군거렸다.

“맞아요. 초대장을 받아서 오긴 했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네요.”

“하긴, 기사단 인원도 줄었으니 더 고생하시겠죠.”

연회장을 들어오던 아이작은 꽤 여러 곳에서 들리는 말에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그 문장들이 내포하는 의미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왜 이런 시국에 연회를 여는 것이냐고 대놓고 비꼬는 말이 아닌가.

일단 불렀으니 오기는 했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불똥이 튈까 봐 깊게 연루되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단순히 상황을 살피러 오는 사람도 꽤 있는 것 같았고.

전부 예상했던 바이긴 했지만, 그래도 막상 실제로 겪으니 분노가 차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전이라면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아닌가. 이게 다 그 망할 신의 축복 때문이었다.

자신이 드래곤이었더라면, 그런 힘이 있었더라면 절대로 자리를 빼앗기는 일 따위는 없었을 텐데.

아이작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무수한 시선들을 느끼며 연회장 제일 높은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실, 들리는 말 따라 카일룸 제국에는 막대한 피해를 입은 북부를 위로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성대한 연회를 여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즉위식도 무도회에서 간단하게 하고 생략한 레오나드와 더 비교되는 일이었고.

하지만 아이작에게는, 어느 정도 뒷말이 나올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어차피 나는 이종족의 것과 같은 신의 축복을 받을 수 없어.’

그러니 그 대신, 그에 맞먹는 힘이 필요했다. 이를테면 300년 전 사라졌다는 ‘마법’과 같은.

“아버지. 이제 슬슬 시작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이작의 옆으로 다가간 에녹이 작게 속삭였다.

제 아들을 물끄러미 보던 아이작이 꽉 쥐던 주먹을 펴더니, 작게 웃으며 멈춰있던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에녹은 조용히 눈에 담았다.

저 얼굴을 보면 자신이 했던 말을 신뢰해 주는 것은 분명한데, 이상하게도 아이작은 정작 중요한 일에 관해서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것이 꼭 중대한 일을 앞에 둔 사람 같아서 에녹은 어쩐지 불안해졌다.

‘혹시 그 보물을 벌써 찾으신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여전히 아이작의 사람들이 비밀리에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자기들 딴에는 숨기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지만 같은 장소에 있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뭘까.

‘혹시 애초부터 찾는 것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던 건…….’

거기까지 에녹이 생각한 순간이었다.

상석에 올라 연회장에 모인 이들을 향해 감사 인사를 전한 아이작이 다시금 몸을 돌렸다.

곧 등장할 누군가를 소개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은 아이작이 아니었으니까.

“이 자리를 빌려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연회장에 모인 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아이작의 말에 맞춰 연회장 구석의 커튼 뒤에서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걸어 나오고 있었다.

또각또각.

높은 구두 굽 소리가 하얀 대리석 바닥을 울렸다.

반짝이는 은발을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아이작의 옆에 섰다.

그녀의 몸을 감싼 화려한 디자인의 푸른빛 드레스 자락이 살짝 일어난 바람에 둥실 몸을 띄웠다가 가라앉았다.

치맛자락 곳곳에 박힌 보석들이 연회장의 조명에 빛나 그 모습을 여실히 드러냈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여자는 주눅이 들거나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입가에 당당하고 짙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마치 이런 광경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얼마 전 보았던 얼굴에 에녹이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무언가를 찾은 것 같은 타이밍에 갑작스레 입적된 양녀라. 과연 우연일까.

“자, 인사드려라.”

“네.”

여자가 작게 답하고 고개를 들자 꽤 닮은 두 개의 녹색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닿았다.

알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여자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찰나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파티장에 있는 이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누가 눈치를 준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하라고 시켰기 때문도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압박감과 생전 처음 보는 여자의 강렬한 존재감 때문이었다.

그렇게 모인 이들이 숨을 참는 사이 여자가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붉은 입술 사이로 매혹적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며칠 전 에녹이 미처 듣지 못했던, 그녀의 이름과 함께.

“셀리아 데프론이라고 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