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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86화 (86/144)

#86화

한참을 달리던 마차는 삭막한 북부의 풍경을 배경으로 자리에 멈춰 섰다.

먼저 밖으로 나간 레오나드가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위에 가볍게 손을 얹으며 땅에 발을 디뎠다.

며칠 만에 다시 온 북부는 그 전과 그리 달라진 것이 없었다.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저번에 에녹과 왔을 때는 거의 치워져 있던 피해의 흔적들이 다시금 늘어났다는 것 정도일까.

‘다들 고생하네.’

이전 산사태만으로도 입은 피해가 장난이 아니었을 텐데 2차 산사태라니.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는 사이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하러 갔던 기사들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산사태의 여파가 남아있을 수도 있어서 아직 산에 올라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합니다.”

“그래?”

“예. 그래서 우선 저희가 먼저 가서 살피고 괜찮으면 그 후에 가시는 것이 어떠신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던 레오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이상한 점이 발견되면 바로 보고하고.”

“예,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호위를 맡을 인원만 남기고 다시금 산 쪽으로 향했다.

상황이 정리되자 레오나드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부터 뭐 할까? 조금 시간이 나는 것 같은데.”

“으음…….”

왜 저렇게 눈을 반짝이면서 쳐다보는 거지. 이러니까 무언가 엄청난 것을 해야 할 것 같잖아.

데이트하고 싶다고 말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시간이 날 줄은 몰랐던 터라 무엇을 할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상태였다.

‘산사태 피해 복구하는 거 돕는 건 어떠냐고 물어볼 생각이긴 했는데…….’

조금 더 생각해 보니 그건 상황에 맞는 데이트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황제가 직접 피해 복구를 돕는다니. 도움은커녕 사람들에게 부담만 줄 것이 뻔하잖아.

‘게다가 내 체력을 생각하면 오래 돕지 못하고 금방 뻗을 것이 분명해.’

그렇게 되면 또 다른 민폐가 될 것이었다.

뭐가 있을까. 별로 힘 안 들이고 여기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이…….

아, 생각났다. 그리 힘쓰지 않고도 북부 사람들을 도울 방법이 있었다.

“뭐 할지 정했어요.”

“뭔데?”

“일단 준비하고 나와요. 레오나드.”

“무슨 준비?”

어리둥절한 얼굴인 레오나드의 등을 밀며 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돈 쓰러 갈 준비요.”

온 김에 여기 경제 좀 살리고 가야겠다.

* * *

“아, 아파요.”

“조금만 참아봐요. 원래 예뻐지는 건 힘든 일이랬어요.”

“맞아요, 백작님!”

아니, 나는 이렇게까지 해 달라는 말이 아니었는데.

나는 살짝 고개를 들어서 내 머리를 열심히 매만지고 있는 다이아나와 메리를 바라보았다.

북부까지 따라온 기사 중 다이아나는 당연하게도 남아서 레오나드와 나를 호위하는 쪽이었다.

아니라면 다이아나가 굳이 여기까지 따라온 의미가 없으니까.

평소에 친분이 있기도 하고 같은 여자이기도 하니 다이아나는 자연스레 내 가까이에서 호위를 맡았다.

그래, 그게 문제였다.

메리가 내 준비를 도울 때 자기도 옆에서 돕고 싶다는 말을 그냥 흘려들었어야 했는데.

‘설마 30분째 이러고 있을 줄이야.’

몇 번 얼굴 좀 보았다고 둘이 어찌나 죽이 잘 맞는지. 내가 하는 말은 족족 다 무시당했다.

어디 파티에 참석하는 것도 아니고 급하게 오느라 별로 챙겨온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너무 그렇게 뚱한 얼굴 하고 있지 마세요, 백작님. 다 백작님을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그냥 대충 가도 돼, 메리. 파티 참석하는 게 아니야. 그냥 돈 좀 쓰러 가는 거라니까?”

“에이. 로레이나, 우리 솔직해져요. 그게 아니라 데이트하러 가는 거겠죠.”

“물론 그것도 맞기는 한……. 아니, 잠깐만.”

다이아나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놀란 나머지 몸을 크게 움직이자 곧장 메리가 타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억울해. 나도 가만히 있고 싶었다고.

“그렇게 놀란 얼굴이라서 제가 더 당황스러운데요. 설마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거 아니죠?”

“…….”

“이상하네요. 예전에도 비슷한 이야기한 적 있지 않나요, 우리?”

“그건 맞는데…….”

엄연히 말하자면 그때는 정식으로 사귀는 게 아니었거든요.

아니, 안 사귀었다고 보는 것도 애매한가. 그 와중에도 할 건 다 했으니까.

……아, 모르겠다. 어차피 다 알려진 거, 이제 그냥 어떻게든 되라지.

여태까지 레오나드와 내가 보였던 행동들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납득이 갔다.

하아. 나 참 티 많이 내고 다녔었네.

“황궁 밖에서 폐하와 만나는 건 처음이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날 힘을 줘야죠.”

“……그런가요.”

생각해 보니 그랬다.

4년 전에 크루시아 축제에 갔던 것을 빼면 레오나드와 밖에서 무언가를 한 기억이 없구나.

레오나드는 저주 때문에, 나는 데드 엔딩을 피하려고.

둘 다 기구한 운명인지라 밖에 나가서 여유롭게 무언가를 할 틈이 없었다.

“그럼요. 약속한 시간까지 얼마나 남았다고 했죠?”

“이제 한 20분 정도요. 근처에 있는 빵집 앞에서 보기로 했어요.”

“시간 충분하네요. 다 되었어요.”

내 어깨를 잡은 다이아나가 그대로 나를 거울 앞으로 이끌었다.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던 나는 눈앞에 보인 모습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와아…….”

“예쁘죠?”

내 반응을 본 다이아나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현재 내 몸이라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거울에 비친 얼굴은 정말 예뻤다.

평소와 달리 옆으로 길게 땋아 내린 머리는 차분한 느낌을 주었고 심심해 보이지 않도록 중간중간에 꽃장식이 달려있었다.

꽃의 크기도 작고 대부분 연한 색깔이라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봄에 놀러 가기에 딱 좋은 스타일이었다. 연한 노란빛의 시폰 드레스와도 잘 어울리고.

‘……나 진짜 데이트하는구나.’

어쩐지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이제 와 이러는 것도 웃기지만 진짜로 그랬다. 이렇게 약속 잡고 만나는 건 처음이란 말이야.

“그럼 다녀올게요.”

“잘 다녀와요.”

“다녀오세요, 백작님! 폐하께서 보시면 또 반하실 거예요!”

마지막에 메리가 외치는 말에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밖으로 나섰다.

메리를 혼자 두는 것은 좀 그러니 다이아나는 남아있으라고 하고 다른 기사들과 갈 생각이었다.

데이트하는데 기사들 이끌고 가는 것도 좀 웃기기는 하지만…….

‘데이트하던 중에 죽을 수는 없잖아.’

레오나드가 오면 괜찮을 테니 그때까지만 있어 달라고 하고 이 사람들도 쉬게 해야지.

어차피 금방 올 테니까.

5분 정도 걸어가자 레오나드와 만나기로 약속했던 빵집이 보였다.

레오나드는 아직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오기 전에 주변 좀 살짝 둘러볼까.’

대충 뭐가 있는지는 알아야 어떻게 돈을 쓸지 고민이라도 하지.

여기 온 게 벌써 두 번째인데 여관이랑 산만 오갔던 터라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내가 뭘 하려는지 눈치를 챈 것인지 기사 하나가 입을 열었다.

“아까 마을 사람에게 들었는데 저 골목을 돌아 오른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수제용품만 파는 가게가 있다고 합니다. 괜찮으시면 한번 가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수제용품이요?”

“예. 주인이 솜씨가 좋아서 저 가게 물건들이 평이 좋은 편이라고 합니다. 관광객들이 선물용으로 많이 산다고 하는군요.”

‘선물이라…….’

그러고 보니 레오나드에게 선물을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늘 받기만 했던 것 같은데.

‘가서 선물이나 살까?’

아직 나오기 전이니까 빨리 갔다 오면 될 것 같았다.

레오나드 몰래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아닌가. 이를 놓칠 수는 없지.

평소에는 늘 레오나드와 붙어있어야 하니까 레오나드 몰래 뭔가를 하기는 어렵잖아.

내 생일 명목으로 데이트를 하는 것이니 내가 선물을 주는 것이 마음에 안 들지도 모르지만, 꼭 생일에만 선물을 줘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깜짝 선물을 주었을 때 레오나드의 얼굴이 어떨지 기대가 되었다.

처음에는 좀 그럴지 몰라도 나중에는 분명 좋아할 텐데.

잠시 붉은 눈동자를 휘며 환하게 웃는 레오나드를 상상한 나는 마음을 굳혔다.

“괜찮은 것 같아요. 한번 가볼까요?”

“예, 백작님.”

먼저 걸음을 옮기자 기사들이 내 뒤로 따라붙었다.

수제용품점은 그리 멀지 않았다. 여관에서 빵집보다도 더 가까운 거리였다.

진한 녹색으로 된 가게 문을 열자 문 위에 걸려있던 종이 딸랑-하고 청아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그 소리를 들은 듯 안쪽에서 주인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걸어 나왔다.

“어서 오세요, 손님! 어떤 것을 찾으시는……어머.”

밝게 웃으며 나오던 주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세상에. 아멜리오 백작님 아니신가요?”

“그걸 어떻게…….”

방금 주인이 그랬던 것처럼 눈을 크게 뜨던 나는 몸을 돌리다가 얼핏 시야에 비쳤던 분홍빛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지 알 수밖에 없네.’

산지기에게 한번 보였다가 수도까지 소문이 퍼졌던 머리카락이었다.

같은 마을 사람이 듣지 못했을 리가.

게다가 이번에는 황실 마차를 타고 레오나드와 대놓고 왔으니. 모르는 것이 더 이상했다.

내가 그 소문이 무성하던 하프 엘프가 맞는 듯 보이자 주인의 얼굴에 만연하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어떤 것을 찾으시나요? 말씀해 주시면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생각해 놓은 건 없어요. 선물할 만한 것을 찾는데. 혹시 추천해 줄 것이 있을까요?”

“어떤 분께 드리실 건가요?”

“젊은 남자요.”

혹시라도 특정될까 싶어 그렇게만 말했는데, 별로 소용없는 일인 모양이었다.

주인이 다 안다는 얼굴로 웃었다.

정확히 무슨 사이인지는 몰라도 레오나드의 선물을 사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그래. 뭐, 황제의 비서관이니 황제의 선물을 사는 것이 가장 유력하긴 하지.

에이. 모르겠다. 그냥 대놓고 말하자.

‘내가 레오나드에게 선물을 주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마음을 편하게 풀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알지 못했다.

이 이후에 엄청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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