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이왕 대놓고 말하기로 한 거 나는 조금 더 대범해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레오나드에게 줄 것이라 곧이곧대로 말한 건 아니지만, ‘젊은 남자’에게 줄 것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특정 짓기 쉽겠지.
“좀 특이하거나 의미가 있는 물건이면 좋겠어요. 웬만한 건 다 가지셨을 분이라.”
“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주인이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주인의 손에 들려온 것은 하얀 손수건과 웬 목걸이였다.
“이건 어떠세요? 실크로 만든 손수건이에요. 특이한 건 아니지만 품질은 보증해드릴 수 있어요.”
“엄청 부드럽네요.”
“네. 아마 이만한 손수건은 구하기 힘드실 거예요. 이제 꽤 따뜻해졌고 좀 지나면 여름이니 선물하기 딱 좋답니다.”
“그렇겠네요.”
“원하신다면 글자도 새겨드릴 수 있어요.”
괜찮은데? 너무 부담스럽지도 않고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좋은 손수건 같아 보였다.
“저 목걸이는 뭔가요?”
“사파이어 목걸이에요. 줄은 금으로 되어 있고요. 그리고 워낙 보석이 납작해서 잘 모르시겠지만…….”
잠시 말을 멈춘 주인이 손수건을 옆에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더니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들었다.
그리고는 사파이어 오른쪽에 작게 올라와 있는 금색 장식을 눌렀다.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있는지도 몰랐을 버튼을 누르자 사파이어가 반으로 갈라지며 내부가 드러났다.
“이 안쪽에 그림을 넣을 수도 있어요.”
세상에. 로켓 목걸이구나.
로켓 목걸이치고는 사파이어가 납작해서 전혀 몰랐다.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더욱 마음에 들었다. 원형으로 정교하게 깎인 디자인도 너무 예뻤다.
“혹시 하나 더 있을까요?”
“네. 딱 두 개 있어요. 이제 더 만들지 않을 예정이고요.”
“앗, 이렇게 예쁜데 다시 만들지 않으신다고요?”
“네. 얼마 전에 처음 시도해 봤는데, 생각보다 너무 오래 걸려서요. 가격대가 높아지면 살 사람도 없을 것 같고.”
그렇다는 건 세상에 딱 두 개밖에 없는 목걸이라는 말이었다.
선물용으로 주기에 너무나도 매력적인 물건이다. 나는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둘 다 주세요. 아까 그 손수건도 같이요.”
“알겠습니다. 손수건에 글자 새겨드릴까요?”
“네.”
“뭐라고 넣어드릴까요?”
음. 뭐가 좋을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불쑥 떠오른 단어를 자연스럽게 말했다.
“‘크루시아’라고 새겨주세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머나. ‘변함없는 사랑’이라니. 받는 분이 참 좋으시겠어요.”
다 알겠다는 얼굴에 나는 아무런 말없이 웃기만 했다.
모르시겠지만 이 세계, 아니 이 소설 제목이 바로 그거거든요. 선물 받는 사람은 남자 주인공이고요.
‘뭐, 뜻이 좋아서 이 단어를 선택한 것도 맞으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냥 갑자기 ‘크루시아’를 새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 수 없는 본능에 기인한 느낌이었다.
“목걸이 안에는 어떤 그림을 넣으실 거예요?”
“아직 못 정했는데 아마 초상화를 넣을 것 같아요.”
그러라고 두 개를 사는 거니까. 하나는 레오나드에게 주고 하나는 내가 가져야지.
“괜찮으시면 제가 하나 그려드릴까요?”
“정말요?”
“간단하게는 그려드릴 수 있어요. 오랜만에 오는 손님이시라 감사한 마음에 해 드리는 거예요.”
솔깃한 제안에 나는 재빨리 시간을 살폈다. 약속한 때까지는 아직 10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밖의 상황을 보아하니 레오나드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했다.
“네. 그렇게 해 주세요.”
즐거운 기분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꽤 괜찮은 선물이 될 것 같았다.
* * *
선물을 사고 나온 나는 빠르게 움직여 제시간에 빵집 앞에 도착했다.
혹시라도 그사이에 레오나드가 올까 봐 뛰어오느라 죽는 줄 알았다.
“헉…헉……. 폐하는요?”
“아직 오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던 기사가 재빨리 대답했다. 뭐야, 아직 안 왔다고?
‘의외네. 솔직히 나보다 먼저 와있을 줄 알았는데.’
혹시 돈 쓸 준비 하라는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게 아닐까. 지금껏 레오나드가 착각했던 일을 생각해 보자면 그럴 만도 했다.
누가 봐도 돈 많은 사람처럼 치장하고 오는 건 아니겠지.
화려하게 나타나는 레오나드의 모습을 잠시 상상하던 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리 레오나드라고 해도 그렇지 설마 그 말을 못 알아듣겠어.
인상을 살짝 찌푸리자 뭐라고 오해한 것인지 기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제가 여관에 갔다 와볼까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오겠지. 아직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뭐 다른 거 구경할 거 없나?’
약속 시간이 가까워졌으니 이제 정말 어디 갈 수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구경할 거리를 찾아 주위만 두리번거리던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가느다란 음성이 들렸다.
“거기 아가씨.”
혹시 나를 부르는 건가 싶어서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낯선 음성의 근원지가 어디인지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산사태 탓에 관광객도 많이 줄어든 상태였고, 마을 사람들도 잔해들을 치우느라 바빠 길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으니 말이다.
다시금 귀를 기울이자 근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빵집 옆에 있는 골목에서 난 소리였다. 기사들과 조심스럽게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골목으로 들어서는 입구까지 가자 로브를 깊게 눌러쓴 여자가 그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혹시 절 부른 건가요?”
“그래. 여기에 아가씨 말고 부를만한 사람이 어디 있어?”
크게 손짓한 여자가 날이 선 말투로 대꾸했다.
그에 옆에 있던 기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섰으나 팔을 뻗어 가로막자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일단 이야기는 들어봐야지. 그다음에 대처해도 늦지 않았다.
“저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고민거리가 가득해 보여서 불렀어. 내가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여자가 조금 팔을 치우자 길고 큰 소매 부분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커다란 구체가 보였다.
점성술을 할 때 쓸법한 외양의 보랏빛 구슬이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입꼬리를 씩 올린 여자가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볼 법한 손짓으로 구슬을 매만졌다.
그 모습을 보자 말을 듣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다.
뭐야. 여기도 ‘도를 아십니까?’ 같은 게 있는 건가.
뭐든 간에 여기에 계속 있을 이유는 없어 보였다.
“그만 가요. 아무래도 여관에 다시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예, 알겠습니다.”
기사 하나가 먼저 몸을 돌렸고 내가 그를 따르자 나머지 기사들이 나를 보호하듯 내 뒤를 감쌌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아무리 내 말을 잘못 알아들었다고 한들 레오나드가 이렇게까지 나오지 않는 것은 이상했다.
레오나드는 약속 시간 한참 전에 나와서 기다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고작 5분 거리에 있는 약속 장소에 사정을 설명할 사람 하나도 보내지 않았다는 건 필시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거겠지.
이렇게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 것보다는 내가 가서 확인하는 것이 빠를 것 같았다.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이니 고민할 것도 없었고.
나는 망설임 없이 기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니,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었다.
“아가씨. 내 말 듣고 가는 게 좋을 텐데.”
뒤에서 불쑥 들린 말만 아니었더라면.
“알고 있던 것과 달라지는 것이 많아서 혼란스럽지?”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그 후 뒤를 돌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홀로 품고 있던 생각을 간파당했을 때 나오는 자연스러운 본능.
“……지금 그게 무슨 말이죠?”
잠깐 망설이다가 묻자 여자가 웃었다.
깊숙이 눌러쓴 후드로 인해 얼굴에 기다란 그림자가 그리워졌음에도 그녀의 입술 끝이 올라간 것은 알 수 있었다.
“무슨 말인지는 아가씨가 더 잘 알 텐데. 나는 아가씨 주변 상황을 읽은 것뿐이라고.”
“이상한 여자입니다, 백작님. 신경 쓰지 마세요. 그보다는 얼른 폐하께 가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주 궁금한 표정이네. 하하하하하…….”
“백작님, 어서 돌아가시죠.”
여자와 기사들이 번갈아 가며 나에게 입을 열었다.
여자가 뱉은 웃음소리가 눈에 잡힐 듯한 잔상을 남기고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냥 개소리라고 생각하고 가면 될 텐데 바닥에 뿌리라도 내린 마냥 발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왜일까. 내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말을 해서일까.
아니면 며칠 전부터 반복되던, 이 꿈같은 행복을 빼앗길 것만 같은 이상한 불안감 때문일까.
사실, 이제 와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결국 기껏 움직였던 거리를 되돌아 다시 여자의 앞에 섰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자 뒤에서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백작님!”
“잠깐만요. 조금만 대화하고 갈게요.”
앞으로 나서려는 기사를 다시 한번 막으며 작게 손을 저었다.
그에 기사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지만 얌전히 뒤로 물러났다.
물론 그 와중에도 정체 모를 여자에 대한 경계는 늦추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웃음기를 띤 얼굴인 여자를 향해 나직이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생각해 보니 상대도 존칭을 쓰지 않는 시점에서 굳이 내가 존댓말을 쓸 이유는 없었다.
그것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가 아니라면 더더욱.
그것이 아까부터 묘하게 긴장되는 마음을 숨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한테 할 말이 많아 보이는데, 기회를 줄 테니까 어서 해.”
마음 깊숙이 묻어두려고 했던 불안감을 건드렸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지.
여자를 가만히 노려보자 그녀가 몸을 들썩이며 아까보다 큰소리로 웃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힐끗거리며 이쪽을 볼 정도였다.
크게 흔들리는 여자의 로브 자락 사이로 은빛 색채가 살짝 스쳐 갔던 것 같기도 했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골목에 비친 햇빛에 살짝 드러난 붉은 입술이 열렸다.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날씨가 완전히 따뜻해졌군. 조금 더 지나면 이 로브는 버려도 되겠어.”
“……뭐?”
나도 모르게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작게 헛웃음을 뱉었다.
대화의 흐름에 맞지 않는 말이었기 때문도 있지만, 그보다는 너무 어이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왜 버리지? 다른 옷이라도 있어?”
“그럴 리가. 날이 따뜻해져서 그래. 이런 날씨에 로브는 더 필요 없잖아.”
“그런 말은 이 나라에서 ‘추위’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나 해. 겨울이 되면 몸을 어떻게 보호할 거야?”
여자는 꼭 오늘과 같은 따뜻한 날이 계속될 것처럼 굴었다.
봄은 영원하지 않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그리고 겨울이 오는 것이 당연한 데도.
그리고 그때쯤이면…….
‘저런 차림으로는 버티지 못하겠지.’
나는 느릿하게 여자가 입은 로브를 훑었다.
검은 로브는 어느 봄 쌀쌀한 저녁에 걸칠 정도의 두께였다. 안에 입은 옷도 지나치게 얇다.
저런 차림으로 카일룸 제국의 겨울을 보내다가는 큰일이 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여긴 수도에서 가장 춥다는 북부다. 자칫하면 얼어 죽을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왠지 기분이 나빠져서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대로 무시했다가 나중에 북부에서 얼어 죽은 사람이라도 나왔다는 말을 들으면 괜히 찝찝할 테니까.
“그리고 그 로브도 겨울을 나기엔 부족해.”
“부족하다고?”
“그래. 물론 어느 정도 도움은 되겠지. 하지만 그 두께로는 완벽히 추위를 막을 수 없어.”
말이 없는 여자를 보며 나는 이마를 짚었다. 어쩐지 아까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왜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겨울에는 옷을 두껍게 입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내 모습이 우스웠다.
하지만 여자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들었다는 듯 여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 기울기에 맞춰 숨기고 있던 긴장감이 다시금 고개를 내밀었다.
“이상한 일이군. 그렇게 생각할 줄이야.”
말꼬리를 길게 늘인 여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때 묻지 않는 순수한 궁금증을 담고 있었다.
“나는 아가씨가 나처럼 생각하는 줄 알았지.”
어느 정도 나이가 있어 보이는 음성이 아니었더라면 어린아이라고 착각했을 법한 느낌.
너무 깨끗해서 도리어 소름이 끼치는 감각.
‘……이상하다.’
어쩐지 이 상황이 낯설지 않았다.
나 예전에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